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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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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리는 신앙 (눅 1:5-17)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메시야를 목마르게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믿지만 그들은 과거에 아직 오시지 않은, 그러나 곧 오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기다림의 대상과 내용은 다르지만 그 콘셉트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나,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함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기다림은 동일하다고 봅니다.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설렘과 기쁨이 동일한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에 나타난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통해 메시야 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자세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 의롭게 살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눅1:6절을 함께 하시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더라.”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으며,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데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가랴가 귀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의롭게 살았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다고 하는 것은 당시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반대하며 부인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살았다고 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 말씀은 사가랴의 삶이 평탄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바리새파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교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에 바리새파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의롭게 살아갔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미움과 시기와 또 다른 불이익을 수없이 받으면서 살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상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제사장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였습니다.

사가랴가 어떻게 기다렸습니까? 그는 오로지 한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첫째는 주신 직분에 충실하면서 주님을 기다렸다는 것과 둘째로 주의 계명과 율례들을 바르게 지키면서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시 말씀드리면 늘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분명히 붙잡아야 할 말씀이 없다면 그는 기다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수없는 주변의 환경과 소리 때문에 얼마나 많이 흔들릴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끝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는 일이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 정치판은 더럽습니다. 어떤 이는 마치 진흙탕의 개들과 같다고 악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나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사가랴 시대에도 헤롯의 절대 권력 앞에 숨을 죽이며 살았습니다. 헤롯이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여 준 것은 그가 믿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 수완이었습니다. 때문에 제사장들은 물론 서기관들과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그의 권력 앞에 아첨하고, 그 눈치를 보면서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 권력과 종교가 결탁하여 서로의 불의를 눈감아 주면서 지내던 시대였다고 하겠습니다.

사가랴는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의 제사장직을 올바로 수행하였습니다. 여건과 환경이 좋아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건과 조건이 맞아서 의롭게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음에도 그 시대의 타락한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의로움을 사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가 도전 받아야 할 교훈인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환경과 여건이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에 더욱 메시야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때문에 더욱 의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거룩하신 메시야를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2: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고 하셨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이는 오실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철저히 회개함과 동시에 주님께로 돌아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의 모습입니다.


2.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그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복 있는 사람,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 세상, 이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불의가 만연하였습니다. 권력에 아첨하였습니다. 불의를 눈감아 주었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다 그 불의한 세력에 굴복하고 타협하면서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가랴는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랐습니다.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고 그 의를 지킬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는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이 시대의 흐름을 따르고 그 유행을 좇아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 대림절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 희랍사람들은 젊은이를 가르칠 때 두 가지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네 자신을 알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네 자신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두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희랍의 대 철학자인 플라톤은 “인간생활이란 검은 말과 흰 말, 두 말이 끄는, 한 수레와 같다”고 했습니다. 흰 말은 이성이고, 검은 말은 욕망이나 본능을 의미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수레가 넘어지지 않고 바로 가려면, 절대로 검은 말(욕망과 본능)에게만 수레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검은 말이 수레를 끌고 가도록 방치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흰말(이성)로 하여금 철저하게 검은 말(욕망과 본능)을 통제하도록 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금욕적인 삶을 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상과 짝하고 타협하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월남 전쟁 시에 우리 젊은이들이 많이 참전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중동 지역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파견되어 건설 사업에 파견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는 꼬박꼬박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라면, 전쟁에서 무사하기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기다릴 것입니다. 남편이 없는 지금의 삶이 너무 외롭고 고통스럽기에 간절하게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없는 사이에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바람이 난 아내가 있다면, 그는 오히려 남편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그가 오실 때 우리의 삶에 기쁨이 있고, 영원한 생명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안주하려는 사람들은 주님을 기다릴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이렇게 좋은데 무엇 때문에 예수 재림을 기다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아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잠시는 달콤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 파멸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결국, 벗어날 길 없는 깊은 멸망의 수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처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본향을 사모해야 할 것이고,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이제 끝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사가랴는 이런 마음으로 기다린 결과 뜻밖에 천사를 통해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눅1:12,13절을 함께 하시겠습니다. “13)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다 늙었는데 그에게 아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메시아를 준비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아이 때문에 나도 좋고 너도 좋게 될 것이랍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을 평탄케 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백성들로 하여금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자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사가랴는 대단히 기뻤을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는 것만도 감사한데 그 아들이 사람들을 의의 길로 이끌어 드리고, 메시야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는 예언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어찌 아니 기뻤겠습니까?(눅1:70-71,76-77)

모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의롭게 살면서 기다렸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 세례요한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을 얻었다기보다는, 바로 구원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축복으로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재림 주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의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더 나은 본향을 우리가 사모해야 합니다.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서 경건과 헌신의 삶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재림 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구원입니다. 천국의 영광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해 주시면서 영광의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 부디 이런 은혜가 이 대림절, 대강절에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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