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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모든 이에게 생수를 주시는 주님 (요 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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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에게 생수를 주시는 주님 (요 4:3-19)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 계셨던(요2:23)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적이 있습니다(본문 3-4절). 사마리아는 옛날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심을 이루는 땅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를 포로로 잡아 다른 피점령국으로 이주시키고 그 빈 자리에 다른 피점령국의 백성을 또한 강제로 이주시켜 살게 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족속들이 섞여 사는 동안 사마리아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혈통과 신앙이 그 순수성을 상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중간 쯤 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즉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유대인과 같은 백성이라 생각하지만 유대인들로부터는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해지는 일로 여기게 되었으며,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상대하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에 반발하여 자기들 나름의 성경을 가지게 되었고 별도의 성전을 세워 거기서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도 일부러 그 땅을 피해 멀리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땅을 피하지 않으시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을 때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돌아가시기 위해 출발하신 곳에서부터 수가까지는 하루하고도 반나절 걸리는 거리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합니다.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했는데 해 뜨는 때부터 시간을 재는 그 당시의 시간으로 여섯 시는 오늘 우리의 정오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낮에 사마리아 땅 수가 성 우물가에 당도하신 것입니다. 그 전날 하루 종일 걸으시고 또 그날 동 트자마자 다시 길을 떠나셔서 여섯 시간을 걸으신 것으로 짐작됩니다. 매우 지치고 목이 마르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 한 것 보면 기진맥진하셔서 털썩 주저앉으신 것 같습니다. 수가 성 문밖 우물까지 오시기는 했지만 예수님께는 물을 길을 수단이 없었습니다. 물론 먼 길을 가야했던 만큼 제자들이 물주머니를 가지고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들은 물주머니를 지닌 채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망설임이 없이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습니다(본문 7절).

  예수님의 이 요청은 그 여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놀람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반문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본문 9절) 그 여인이 그렇게 물은 것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본문 10절). 예수님의 대답은 종종 그렇듯이 그 여인의 질문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 자체보다는 질문하는 사람의 속생각에 곧바로 답하기를 즐겨하셨으며, 중요하지 않거나 의미 없는 질문은 아예 무시하시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진리와 삶의 참된 의미를 밝히시는 비약의 기회로 삼곤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여인은 유대인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걸고 물까지 달라 할 수 있는지를 물었지만 예수님께는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이 아느냐 하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나는 그대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가져왔다. 나는 그대에게 생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의 선포를 당장 알아들을 리가 없었던 그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본문 11-12절) 여기서 사마리아 여인은 두 가지를 묻고 있습니다. 첫째는 “물 길을 그릇도 없어서 나에게 물을 달라고 구하면서 당신이 어디서 생수를 길어 나에게 주겠다는 것이요?” 하는 물음입니다. 둘째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우물에서 나에게 물을 달라 하면서 다른 생수를 거론하는 것은 이 우물물보다 더 신선한 물을 줄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준 조상 야곱보다 당신이 더 훌륭하다는 말이요?” 하는 물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 반문에 예수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시며 본래 뜻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본문 13-14절).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수를 거론하신 것입니다. 즉 당신이 구원과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려 오셨다는 뜻으로 생수를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그것을 곧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을 그런 물이 있다면 매일같이 땡볕 아래 물 길으러 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 좋겠다는 생각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청하기를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본문 15절)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굳이 사마리아를 통해 길을 가신 본래 의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본문 16절). 이 느닷없는 말씀에 대해 그 여인에게서 불쑥 튀어나온 대답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였습니다(본문 17절).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본문 17-18절). 그녀는 남자 없이는 살 수 없으면서도 한 남자도 자기의 합법적인 남편으로 둘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정체를 꿰뚫어 알고 계셨고 그녀의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찌르셨습니다. 그녀의 삶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셔서 그녀 앞에 서신 것입니다. 그 여인은 삶의 속살이 다 드러난 자기 앞에 서있는 예수님 때문에 놀라기도 하며 “도대체 이 이가 누구인가?” 하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본문 19절).

  그러나 이 여인은 아직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 다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보통 인물이 아니고 선지자의 하나처럼 느껴지자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뜨거운 논쟁점의 하나인 진정한 예배의 처소에 관한 문제에 답해주기를 청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는 질문에 답하시기보다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인 가르침을 내놓으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1-24).

자기의 질문에 대해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대답하시지 않고 다른 차원에서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기는 아직 그 여인에게는 이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앞에 나타난 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유대인이 과연 참 선지자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려는 그녀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그 여인은 말했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4:25).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 예배의 처소 문제에 대해 바른 답을 주실 것이고, 그러면 그녀의 앞에 서있는 유대인 남자가 참 선지자인지 아닌지도 분명해지리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요4:26).

  그때 제자들이 마을로부터 돌아옴으로써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대화는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 여인은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연 것 같습니다. 의심의 구름이 걷힌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알고 있고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메시야가 자기 앞에 서있는 이심을 믿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물을 길으러 우물로 왔었지만 물 긷는 일은 다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 동네로 달려 돌아갔습니다. 마셔도 또 목마를 물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없이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과 참된 복락을 주실 메시야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동네로 들어간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도 잊어버리고,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외쳐댔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예수님을 만난 그 여인은 예수님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여자가 전한 이 말 때문에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동네에서 예수님께로 나아와 믿게 되었습니다(요4:30, 39).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의 청을 받아들이셔서 그들과 함께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며 가르치셨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믿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습니다(요4:40-41).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그녀를 변화시키시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이들은 직접 그의 말씀을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요4:41-42를 봅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 사실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주목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천대받는 사마리아 땅을 찾아오시고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오셨으며 그녀와 같은 많은 사람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천대받으며 외롭고 삶에 지친 여인이었습니다. 물을 긷는 여인들은 일반적으로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 아침이나 저녁에 물을 길으러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 여인은 혼자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여인은 함께 다닐 친지도 없었으며 스스로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남들이 나오지 않는 정오에 뜨거운 햇볕 아래 물을 길으러 나오곤 했던 것입니다. 다른 이들보다 고되고 지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된 여인의 삶의 자리에 우리 주님께서 먼저 가계셨음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삶에 지친 심령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 줄 생수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이며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이방인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어디에서 예배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취급당하며 세상으로부터 멸시 당하는 하찮은 존재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오시고 그의 남자들까지 다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의 남편을 데려오라 하셨지만 그 “남편”은 한 사람의 정식 남편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그녀가 상대한 모든 남자들, 더 나아가서는 그녀만큼이나 부끄러운 삶을 사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생수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지금까지 홀로 주님께 나아오던 모든 이들은 이제 아직 주님께 나아오지 않은 남편, 아내, 가족, 친지 등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을 주님께로 데려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들이 다 나아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를 믿는 백성, 구원 받는 백성, 영원한 생명의 샘물을 마시는 백성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 그는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바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음 주일은 성탄주일입니다. 처음 주께로 나아오는 남편, 아내, 가족, 친지들로 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는 오는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고되고 힘든 삶 때문에, 세상의 조롱과 멸시와 외면 때문에 상처받은 심령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위로와 소망과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의 삶은 변화합니다. 마셔도 마셔도 목마르는 물을 매일 같이 길어야 하는 삶에서 그 귀한 물동이를 내던질 수 있을 만큼 더 귀하고 중한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천대하고 배척하고 따돌리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외치게 됩니다. 수많은 심령을 오히려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외롭고 고되고 지친 삶의 자리에 먼저 와계신 주님을 모두가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가 주시는 생수를 마시며 삶의 활력과 기쁨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의 복락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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