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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내 마음 속의 구유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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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구유 (눅 2:1~7)

  구주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예수님의 탄생 배경, 특히 탄생 장소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시조 왕이나 종교의 창시자 등 지체가 높은 인물의 탄생 이야기는 신비롭고 화려합니다. 사실보다 부풀려 포장하고 신격화 한 ‘픽션’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초라할 정도로 단순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먼저 1절 보면, 예수님의 시대적 배경이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 ~ A.D. 14)인데, 그 유명한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식민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구센서스를 실시한 것입니다.

  그 당시 이미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던 마리아는 어디에 살고 있었습니까?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입니다. 그런데 호적을 하기 위해 약혼자 요셉과 함께 그의 고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남쪽 유대의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에 당도한 마리아에게 해산날이 닥쳤고, 거기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됩니다. 6절~7절 기록이죠. “거기(=유대 베들레헴)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 ”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구유! 구유는 짐승의 여물통, 죽통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짐승의 외양간(마구간)에서 탄생하셨고, 요셉과 마리아는 너무 가난한데다가 여행 중이었던 관계로 아이를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누인 것입니다. 강보는 뭡니까? 포대기입니다. 아마 다 찢어져 누덕누덕 기운 포대기였을 겁니다. 

  여러분, 한번 그 광경을 마음속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데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로 연출해 놓지만, 사실은 너무 초라하고 누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마구간에서 태어납니까? 특히 그 당시 마구간은 동굴이었다고 합니다. 동굴에서 누더기 강보에 싸인 채 말 죽통에 누워있는 하나님의 아들! 인간적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파격 중의 파격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부터 희한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왕의 왕이라면서 그렇게 누추하게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전지전능하실 테고, 그렇다면 본인이 얼마든지 좋은 데를 골라서 태어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누추하고 천하게 태어나지 말고, 좀 화려한 곳에서 멋지게 태어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정말이지 당신이 원하셨다면 얼마든지 화려하고 좋은 데를 골라서 태어나실 수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서, 아니면 하다못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라도, 왕궁에서, 아니면 웬만한 저택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으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골라서 시골  구석인 베들레헴의 동굴 마구간 구유에 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일부러 대저택(Mansion)을 마다하시고 구유(Manger)에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밀리고 밀리다 혹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많고 많은 장소가 있었지만 굳이 그런 곳을 고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굳이 그런데서 탄생하셨을까요?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보여주신 표적 :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증거

  예수님이 굳이 구유에 태어나신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표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런 것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 구세주라는 사실을 확실히 증거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표적’(表迹)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입니다. ‘증표’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sign’ 혹은 ‘mark’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면 표적이란 말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그의 아들 유리를 어떻게 확인했나요? ‘부러진 칼’을 보고 압니다. 어린 아들과 헤어질 때 그의 아내에게 증표로 주었던 ‘부러진 칼’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훌쩍 커버린 아들을 알아 볼 길이 없었지만, 바로 그 증표를 보고 확인한 겁니다. 

  당시 수많은 아기들이 태어났을 텐데 과연 어떤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어떻게 확인합니까? 그 증표로 보여주신 게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던 그 즈음에 들판에서 양을 돌보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죠. 천사가 목자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눅2:11~12을 보십시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Sign)이니라 하더니”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 준 말이 너무 이상했을 겁니다. “아니, 무슨 아기가 마구간에서 태어나지? 무슨 아기가 구유에 뉘어져 있다고?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지 ... ” 그런데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준 말씀이므로 순종합니다. 그들이 그 밤에 달려가 보니까 정말 그런 아기가 있는 겁니다. 그때 그들은 확실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아, 정말 그러네. 이 아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구나!” 그래서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기꺼이 경배하며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탄생 장소인 베들레헴도 일종의 표적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시 언급했는데, 미가 5:2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으로 예언되어 있죠. 미가 선지자가 B.C. 700 경에 예언한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다른 데서 태어났다면 다 어그러지는 것이죠.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바로 얼마 전까지 나사렛에 거주하던 마리아가 멀리 베들레헴에 가서 때마침 거기 머무는 기간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기가 막히죠. 하나님이 장소와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춘 겁니다. 여러분, 이런 걸 가리켜 뭐라고 부르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닌 말로 로마 황제와 목수 요셉이 짜고 그렇게 했겠습니까? 휴대폰으로 서로 연락해서 이러이러하게 하자고 합의했을까요? 그들은 각각 자기 의지대로 행동했지만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전 구약 시대에 수천, 수백 년 전부터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무려 약 350개 구절이나 됩니다. 만약 그 중 한 가지라도 틀렸었더라면 다른 것까지 믿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중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다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미리 짜고 한다고 해도 그렇게 뒤기 힘듭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350개가 몽땅 들어맞았다니! 비명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정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만난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민수기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동방박사들이 본 별도 역시 ‘표적’이었습니다. 후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확인한 과정도 역시 표적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요3:32~34 보면 그 경위가 나오죠. 세례 요한의 간증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누가 메시야인줄 몰랐다 ...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계세해 주시를 요단강에 나가서 세례를 주다 보면 한 사람 위에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다! 정말 어느 날 범상치 않은 한 분을 만나서 세례를 주었는데 정말 그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다 ... ”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였고, 순교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마구간 구유 탄생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혹은 단순하게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지 말고,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심을 확인해 주는 표적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장차 저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내 마음 속의 구유 : 예수님을 모실만한 마음 자세

  예수님이 굳이 구유에 탄생하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모시는 마음 자세를 교훈해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수도 예루살렘에도, 많은 사람들이 호적을 하러 몰려와 왁자지껄한 베들레헴의 중심지에도, 화려한 여관에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후미진 동굴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구유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마음에 오시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① 고요한 마음 :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주함으로 망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세상일에 파묻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정말 안타까운 사람이 나옵니다. 누구죠? 7절(하)을 잘 보면, 여관 주인입니다. 그는 만삭된 마리아를 거절했습니다. 아마 밀려오는 손님으로 인해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소란한 곳을 싫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요한 곳에 임하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그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군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실 때도 있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 오히려 도망치듯 피하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중에도 항상 고요한 시간과 장소를 즐겨 찾으셨습니다. 막1:35 보면 예수님의 하루 일과에 관한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하루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적한 장소와 시간을 찾아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항상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게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영력을 얻습니다. 지혜도 얻습니다. 우리의 살 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소리요, 축복의 소리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 ... 그런데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온갖 소음, 그리고 영혼을 죽이고 황폐화시키는 소리만 들립니다. 생명의 소리는 고요한 중에 들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늘 생명의 소리, 영적인 소리 영음(靈音)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다른 소리들 때문에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리를 피해 고요한 중에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간혹 고요한 산 속으로 가면 평소에 듣지 못하던 소리가 들입니다. 새 소리, 시냇물 소리, 바람소리 ... 마찬가지 우리도 고요한 마음을 준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영생을 얻습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구약 시대 엘리야도 모세도 한적한 곳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켰고, 그들에게 영적인 힘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이 성탄 절기에 고요한 마음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 모시고, 하나님의 음성 듣고 새 힘 얻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정결한 마음 :

  여러분, 예수님이 왜 마구간을 찾으셨을까요? 지저분하고 분뇨 냄새가 나고 그럴 텐데 ... 예수님은 단순히 여관방이 없어서 그런 데로 밀려나신 게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일부러 그런 곳을 선택하신 겁니다. 왜요? 얼른 생각해 보면 마구간이나 구유가 지저분하고 냄새 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깨끗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최소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인간이 왜 무섭습니까? 왜 더럽습니까? 위생 상태로 보면 훨씬 깨끗하죠. 그러나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보면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흔히 인간 세계에서 나쁜 인간을 가리켜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물 세계에서는 무라고 그럴까요? 어쩌면 나쁜 짐승을 가리켜 ‘인간만도 못한 짐승’이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짐승은 배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잡아먹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배불러도 계속 욕심을 부립니다. 같은 인간끼리 짓밟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인간과 짐승 둘 중에 누가 더 깨끗한지 헷갈립니다.

  예수님은 깨끗한 곳을 좋아하십니다. 공생애 마지막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무엇을 타고 가셨죠? 나귀 새끼! 보잘 것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결한 겁니다. 아무도 타지 않은 정결한 것! 그래서 굳이 나귀 새끼를 타셨던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정결한 마음에 임하십니다.

  여러분, 마5:8 보면 8복 가운데 무슨 말씀이 있나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정결할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의 탐욕과 죄악, 음란과 방탕으로 얼룩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에는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결한 마음은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시편 51편 다윗의 참회시편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참회할 때 마음이 정결해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마음이 더럽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세상으로 인하여 계속 더러워집니다. 마음속에 잡초가 돋아납니다. 그러므로 계속 가슴을 치며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죄악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결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만나주십니다.

  약4:8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미음을 성결케 할 때 하나님이 만나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부디 이 성탄의 절기에 정결한 마음을 준비하셔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③ 겸손한 마음 :

  구유는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얼마나 더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곳은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으로 좌정하신 자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유는 ‘예수님의 왕좌’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겸손한 구유와 같은 마음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을 예수님께서 왕좌로 삼으시고 좌정하십니다. 

  요즘에는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윗목 아랫목이 따로 없지만, 옛날에 구들장에 장작이나 연탄을 땔 때는 어땠습니까? 윗목 아랫목이 있었습니다. 아랫목은 따끈따끈하고, 윗목은 차디찼습니다. 아랫목에 모여 앉아있다가도 어른이 들어오시면 어떻게 했습니까? 아랫목을 어른에게 내어드립니다. 이게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나를 구원하시고 저 천국으로 인도하실 어른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내 마음의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마음속의 가장 좋은 자리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구유가 초라한 것 같아도 예수님이 좌정한 왕좌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남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내 안에서 가장 소중한 자리 마음의 중심을 내어드리면 예수님께서 기꺼이 오셔서 나와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약4:10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모시면 주님이 나를 높여주십니다. 존귀케 해 주십니다. 

  성지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탄생기념교회’(The Church of Nativity)가 있습니다. 그곳의 출입문을 ‘겸손의 문’이라 부르는데, 아주 특이합니다. 옛날 십자군 전쟁 때 군인들이 말을 타고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출입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1.2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문이라 키가 작은 아이도 꼿꼿하게 서서 지나갈 없습니다. 세상의 왕이나 귀족이라도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그곳을 방문했을 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출입문 바로 위에 종이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글로 서툰 글씨였지만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머리 조심!” 정말 우리는 머리를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히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기본은 겸손입니다. 유명한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당연히 겸손이죠.”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요?” 그러자 어거스틴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도 겸손입니다.”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요?” 어거스틴은 힘을 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도 역시 겸손입니다. 겸손을 빼놓으면 신앙생활이 불가능하죠.” 이만큼 겸손이 중요합니다.

  반대로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16:5, 18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한 마음에는 주님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런 마음은 미워하십니다. 그러니 잘 될게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의 화려한 데, 소란한 데를 찾지 않으시고 후미진 마구간 구유 위에 나셨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찾아오실 수 있도록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고요한 마음, 정결한 마음,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분주하게 살다가 욕심만 부리다가 교만을 떨다가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 밖으로 예수님을 내쫓은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우리 마음의 문 밖에서 노크하며 문을 열라고 부르는 그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계3:20 “볼지어다 내(=예수)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무쪼록 이 음성 듣고 마음을 활짝 열어 성탄하신 예수님 모시고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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