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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아가 깨어져야 (롬 7:18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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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깨어져야 (롬 7:18 - 8:2)

추수하는 농부가 구하는 것은 껍질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알곡입니다. 그런데 그 알곡은 껍질을 깨뜨린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 앞에 알곡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알곡 믿음은 자아의 껍질이 깨어진 성도만이 보여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후에는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후에도 믿음의 진보가 없는 사람들이 있고 변화되지 못한 성품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아가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가 있고, 그 속에 자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내 속에 자아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여 그대로 살려고 하는 속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겉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의 겉 사람과 속사람이 싸우는 것이 곧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주일 아침 교회 나오실 때 - 이 두 가지 마음이 싸웁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 - 그런데 죄를 짓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
기도해야겠다는 마음 - 기도를 싫어하는 마음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의 내 속에 있는 나와의 싸움 때문에 크게 고민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바로 < 내가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곧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괴로워했습니다.

(롬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경험이 다 있는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이러한 고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속에 있는 겉 사람과 속사람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겉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잘 순종하는데 속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고 하는데서 오 는 부조화가 곧 우리의 영적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자아가 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구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내적상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살펴봅시다.

(롬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엡 3:16)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치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 말씀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속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처소인데, 이것을 영이라고 하며, 이 속사람의 바깥에 우리의 생각·의지·감정을 지배하는 겉 사람이 있는데 이것을 혼이라고 가정합시다. 그 바깥에는 영과 혼을 담고 있는 육체가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구조라고 생각하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옷을 입고 있는 것같이 영은 혼을 입고, 영과 혼은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과 혼은 지각하면서 살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처소인 영은 지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가장 소중합니까? 종자 씨를 뿌리는 농부에게는 밀알 자체보다 그 속의 생명이 소중합니다. 옷보다 육체가, 육체보다 영혼이 소중하고, 계란껍질보다 흰자가, 흰자보다 노른자위가 더 소중하며, 겉포장보다는 속의 내용물 이 더 소중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의 속사람인 영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 곧 속사람이 밖으로 나와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속사람이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전도를 해도 열매가 없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 있는 삶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영이 밖으로 나오지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혼, 즉 자아, 겉 사람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를 오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신학공부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교회 중책을 맡았는데 성품의 변화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매우 호인입니다. 그러나 전도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속사람이 갇혀있어서 밖으로 나와 향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깨어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이 깨어지지 않으면? 보석을 담은 그릇을 포장한 채로 열지 않으면?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겉 사람이 깨어져서 속사람이 겉으로 나오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깨어져야만 속사람인 영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의 특징 1) 신령한 내적 문제보다도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교회에서 신령한 믿음의 은혜보다도 직분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열매가 자라기 위해서는 껍질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익으면 그 때 껍질은 버려야 합니다. 성도의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 직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이 되면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2) 자기의 주장, 고집이 살아있습니다. (자기가 교회의 귀중한 인물이라고 스스로 자처합니다.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의 뜻보다, 다른 사람 의 인격보다 더 소중히 여깁니다.)3)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주의적입니다. (때문에 많은 심령에 상처를 줍니다.) 4) 목회를 하여도 되지 않고, 전도의 열매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바로 이 자아가 깨어지지 않으면 참 하나님의 일꾼이 되지 못합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성도 때문에 교회는 성장이 중지됩니다. 교회 분쟁의 시험이 있는 곳에는 이런 신자들이 항상 앞장 서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자아가 깨어지지 않으면 많은 영혼에게 상처를 주고 병들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향유보다 옥합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보다 옷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보석보다 보석함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주님은 우리의 겉 사람을 어떻게 깨어지게 하십니까? 1) 떨어지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밀알 속에 있는데 껍질에 싸여 있습니다. 이 껍질이 터져야 생명의 싹이 납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묻혀야 습기와 온도의 작용으로 껍질이 터집니다.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낮아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땅에 묻혀서 "나는 죽었다" 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새로운 영으로 다시 열매 맺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은 축복입니다. 사람의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공중에서 일어서려고 하면 힘이 없습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더 겸손하고 아주 솔직해질 때까지 내려가야 그 사람의 진실이 나타납니다. 그 때 속사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에다 위선을 씌우고 물위에 둥둥 떠다녀서야 아무 일도 못합니다.

떨어지고 낮아지는 것을 통해서 뿌리내려 새로운 생명을 많이 낳은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방법입니다. 2) 상처 나게 하십니다. 즉, 깨뜨려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타작할 때 사정없이 두드려서 알곡과 껍질을 분리시킵니다. 밤알을 얻으려면 껍질이 깨어져 야 합니다. 옥합은 깨어져야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우리의 겉사람이 깨어져서 속사람 의 향기가 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육체를 깨뜨리십니다. 사업도 명예도…….만약 깨어지지 못하면? 상처가 생기지 않으면?

* 놋요강이 깨어지고 녹아지면 그것으로 밥그릇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깨어지지 않고 녹지 않으면 그 때는 주인의 뜻에 맞는 그릇이 되지 않으므로 버려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집이 있습니까? 아집이 있습니까? 자기 주관이 너무 강합니까? 주님께서 연단시키실 때 속히 깨어지고 녹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각자에게 주신 주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깨어지게 하시는 방법/ 주님은 우리 겉 사람을 깨뜨리실 때1) 점진적인 방법2) 돌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어떤 이는 돌연적인 방법을 쓰신 후 점진적 훈련을 시키며, 어떤 이는 점진적인 방법을 쓰신 후 어느 날 대규모의 파쇄를 가하십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겉 사람을 깨뜨리시는 시간들은 대개 수년간의 기간이 걸립니다. 어떤 이는 10년, 그 이상도 걸립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련과 아픔은 주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되게 하시는 방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 때 속히 내 주장·내 고집·자만·교만·재간·이기주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용광로 속의 은이 불에 녹으면, 그 때 찌꺼기를 다 건져내고 깨끗하고 맑은 은이 되듯이,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바뀌어 질 때까지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이 청결해질 때까지, 어린아이 같이 될 때까지, 속사람이 완전히 밖으로 흘러나올 때까지 깨어지게 하십니다. 성도가 그렇게 깨어질 때까지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시키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깨어지는 과정을 보십시오. 모태에서 형과 다투고, 간사, 교활, 속이고…… , 그 결과는? 집을 도망쳐야 했고, 20년 동안 삼촌에게 속았으며, 라헬은 일찍 죽고, 아들 요셉은 멀리 팔려갔고, 베냐민을 애굽에 갇히고……, 계속 하나님께 얻어맞으면서, 늙어서야 변화되었습니다. 바로에게 섰을 때 그는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는 어떻게 변화된 모습으로 죽었습니까? 그가 힘이 없어 지팡이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할 때, 그의 임종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한 인간을 철저하게 깨뜨리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 : "내가 감히 바로 앞에?" … 하나님은 그 때 그를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속사람이 겉 사람을 깨뜨리고 나올 때 위대한 일꾼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3) 준비하는 자에게 깨어지게 하십니다. 열매 맺기까지는 준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준비 없이는 절대로 결과가 없습니다. 사업도, 공부도, 결혼도, 잔치도 준비해야 합니다. 은혜 받는 일도 준비해야 합니다.

깨어진 자의 모습/ 1) 겸손합니다.2) 진실하게 됩니다. 3) 어린 아이 같은 깨끗한 심령으로 (* 장기려 박사 일화)4)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됩니다. 5)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믿음의 사람으로 6)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연단 중에 기도 많이 하여 성령의 지배 아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 옥합을 깨뜨리듯, 밀알이 터지듯, 겉 사람이 깨뜨려지고 속사람이 나와서 많은 사람에게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겸손하고 지혜 있는 자 되어서 하나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신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낱알 그대로인 밀을 가지고는 빵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밀을 부서뜨려 밀가루가 되어야 비로소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영글어야 되고 자아는 부서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쓰시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 중에 하나는 깨어지지 않은 상태로 유명해지고, 크게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거센 파도가 노련한 항해사를 만들어 내듯이 끝이 안 보이는 혹독한 광야학교는 우리의 거친 자아를 곱게 부서뜨립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내가 죽는 것이고, 문제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보다 더 사모해야 할 은혜는 내가 고운 가루처럼 부서지는 일입니다. 부서지지 않은 채로 은혜를 받고 쓰임 받으면 그 사람은 '산신령'이 되고 맙니다. 부서지는 경험이나 광야학교를 거치지 않은 채로도 크게 쓰임 받을 수도 있고 큰일을 할 수도 있다는데 함정이 있습니다.

착각하지 말라

쓰임 받는 것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사역의 사이즈와 깨어짐(성숙)의 사이즈는 별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산신령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어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무엇인가요? 깨어진 사람보다 산신령의 숫자가 더 많을지 모름에 있습니다. 예배당은 많은데 교회는 적고, 성도는 많은데 성자는 적고, 꽃은 피었는데 열매는 없고,

성장은 되는데 성숙은 덜됨이 위기요, 문제일 것입니다.

옥합이 깨어져야 향유가 흐르고 반석이 터질 때 생수가 흐르지 않던가요? 대장장이는 쇠붙이를 불에 달궜다가 물에 담궜다가 그것도 모자라 큰 망치로 후려칩니다. 그러나 그렇게 들볶인 쇠붙이는 마침내 소중한 연장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대장장이 되십니다. 하루도 쉴 날이 없이 우리를 불에 담궜다가 물에 넣었다가 좀 숨 돌림만하면 후려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기력조차 쇠하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단단한 자아가 깨어지기까지 하나님의 담금질은 멈추질 않으십니다. 우리의 죽겠다는 아우성도 아랑곳 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만일에 쓰임 받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쓰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만일에 부셔짐이 없이 형통하거나 충만하다면, 우리는 곧 위대한(?) 산신령 됨을 알기에 섬세하신 하나님은 지독한 곤고함과 기다림을 통하여 우리를 고운 가루되게 하십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면 어찌되었을까요?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기근 없는 믿음이 믿음이 아니듯, 고통 없는 축복은 오히려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어야 열매가 맺힙니다. 죽는 길이 사는 길이며 부서지는 길이 바르게 쓰임 받는 첩경입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우리를 날마다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다림 보다 우리의 자아를 급속히 깨뜨리는 도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을 빼라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려 합니다. 그 충돌의 결과로 우리는 언제나 갈등하고 곤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르지 않을 샘으로 살지 못하고 마른 샘으로 갈증을 겪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육신의 힘이 빠져야 하나님은 오십니다. 사실 우리의 기다림보다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기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이 더 처절하십니다. 벌써 몇 년째인가? 깨어지지 않은 채로 예수를 믿음이... 하나님은 최상의 시간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너무 늦지도 너무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오십니다. 그 시간은 내 힘이 빠지고, 내 자아가 깨어지고, 내가 나의 힘을 포기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곤고함과 갈등은 아직도 성령의 힘으로 살지 아니하고, 내 힘과 능으로 살려고 발버둥침의 증거들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안 된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되신다" 이 사실을 아는데 수년이 걸리지만, 아 사실을 적용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깨뜨리시는 주님.. 사방이 막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모든 일이 안되게 하심이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힘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함을 아는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삶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산신령 되지 말게 하옵시고 주님을 닮은 성숙한 당신의 밀알로 살게 하소서. 아-멘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의 영적코드-기다림

누군가가 인생을 ‘기다림의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생의 여러 기다림 중에서도 참 기쁨과 행복,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기대는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기다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기다림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절망을 지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하여 질그릇을 금 그릇 되게 하십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잘 기다리게 하는 힘이며 뿌리 깊은 영성이란 기다림의 영성입니다. 이러므로 인생의 실패는 기다림의 실패이며, 신앙실패의 원인 중에 하나는 조급함에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당장 이루라' 재촉하며 충동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라 하십니다.

시므온이 기다렸던 분은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까지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하심을 받고 결국 탄생하신 메시야 아기 예수를 만나 뵙게 됩니다.

이 시므온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일생동안 의롭고 경건하게 지내며 그리스도를 기다렸을까요? 그것은 시므온이 살던 세상이 어두움의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세상은 개인적인 윤리, 사회적인 윤리가 다 파괴되어지고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종과 여자들의 인권은 여지없이 무시되었고, 기형아와 비록 멀쩡한 아이라도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는 죽이는 것이 용납이 되었습니다. 이교도의 우상숭배가 만연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건하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유대인들도 무거운 형식적 율법주의에 속박되어 있었고, 예언자들의 소리는 그친지 오래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로마에 식민지 된 상태에서 유대 백성은 로마의 압박과 수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또 로마에 빌붙어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 왕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했으며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온갖 사치와 향락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세상 속에서 시므온은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이 어두운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두운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되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다림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탄생한 그리스도를 만나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에 어둠을 밝히실 빛으로, 온 인류의 위대한 희망으로 오십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비추이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어떠합니까? 시므온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물질문명이 발달했지만 죄로 인한 세상의 어두움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멀리 여행하고, 더 신속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더 높이 건물을 지으며, 더 많은 문화의 혜택과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어두움은 초나 전기가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어두움은 정신적, 영적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삶의 여러 분야에 짙은 어두움이 전혀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 성으로 인한 차별, 출신지로 인한 차별이 여전하며, 무자비한 폭력과 지능적인 범죄가 계속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치 이천년 전에 시므온이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린 것같이 우리도 예수를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떠나간 임이 올지 안 올지 몰라서 불안과 탄식으로 범벅이 된 절망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시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오시는 분에 대한, 오셔서 어두움을 비추시는 빛이 되시며, 어두움을 깨치시고, 새벽을 여시는 분에 대한 기대와 감격에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다림도 암울한 현실 앞에 불안해하고 있는 인류에 참 소망을 주실 것에 대한 간절한 기대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우리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어두움에서 구하실 유일한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 시대가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간절한 기다림을 볼 수 없습니다.

대림절 기간에 그리스도의 오심 즉 성탄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탄생은 보통 사람들의 출생과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자연적이고 단순한 출생의 사건만이 아니라 특별한 "오심", "강림"의 사건, 즉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그분은 저절로 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오신 목적을 알려주는 칭호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시고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즉 기름부음을 받은 분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전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며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그 분은 오셔서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오셔서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죄의 어둠, 실패의 어둠, 좌절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분은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가 오신 것은 세상 모든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 바로 이러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벅찬 감격 속에서 성탄을 맞았습니까? 진정한 성탄 준비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없으면 화려한 성탄 장식이나 행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간절한 기다림 속에서 이 대림절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시므온처럼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감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탄절을 보내면서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벅찬 감격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이 정말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시므온은 평생 동안 간절하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감격에 벅차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시므온처럼 우리 개인의 소망이시며, 인류의 희망이시고 구원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하며 대강절의 남은 기간을 보냄으로써 벅찬 감격 속에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최고봉은 기다림

신앙의 최고봉은 기다림이며 연단 중에 마지막 연단도 기다림입니다. 인생의 성패도 기다림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생은 출발부터 기다림으로 출발합니다. 산모가 새 생명을 잉태하여 열 달을 기다림으로 채워야 출산의 기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새 생명이 열 달의 기다림을 다 채우지 못하게 되면 조산하게 되고, 조산하게 되면 미숙아로 분류되어 인큐베이터 안에서 남은 기다림을 채워야 합니다. 이처럼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축복도, 응답도, 성취도 기쁨도 없습니다. 찬란한 새벽도 길고 긴 밤중을 기다려야 찾아오고, 새파란 봄도 매서운 겨울을 기다려야 우리 곁에 찾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풍성한 가을의 수확도 지루한 장마와 태풍을 기다려야 살포시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세상살이가 기다림의 연속인 듯합니다. 이러므로 기다림을 아는 자가 인생을 알고 하나님을 닮은 자입니다. 세상에는 하루아침에 성취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건축 시에도 기다리지 못하여 시공을 급하게 서두르게 되면 그 건물은 부실공사 되어 나중에는 붕괴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인생과 신앙의 건축도 마찬가지 입니다. 충분히 그리고 마땅한 기다림을 견뎌내지 못하면 설익은 밥과 같고 떫은 감과 같게 됩니다.

결혼이 급하십니까? 성공이 급하십니까? 다이어트가 급하십니까? 신앙의 성장이 급하십니까? 기도 응답이 급하십니까? 교회 부흥이 급하십니까? 내 집 장만이 급하십니까? 그래도, 돌아가야 합니다. 결코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고, 견디고, 꾹~ 참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기다림 없이 거저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밥을 지을 때도 30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1분에 한 번씩 솥뚜껑을 열어 본다면 그 밥은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입니다. 과속이 당장은 빠른 듯 보이나 결국은 사고로 이어지게 되고, 과식이 금방 포만감을 느끼나 곧, 배탈을 가져오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속도에 예민해 있고, 빠른 속도에 익숙하여 삽니다. 이제는 고속이 아니라 초고속이며, 정보가 아니라 첩보시대입니다.

21세기는 '속도전쟁의 승리자가 진정한 강자'라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속도전쟁에 덩달아 춤을 춥니다. 그래서 기다림과 더딤에 어색해 하며 못 견뎌 합니다. 빨리,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기를 바라며 빨리 기도응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빠른 교회부흥을 원하며, 빨리 내 뜻대로 주변사람들과 상황들이 변하기를 조급해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의 불평과 마르지 않는 목마름은, 속도에 대한 하나님과의 충돌현상입니다. 우리는 급한데, 하나님은 느긋하시다 못해 꿈쩍도 안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에 보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10년, 20년. 숨어 계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아픔과 맥 빠짐과 무너짐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과 미숙을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덜됨과 철없음을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향하신 기다림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10년, 20년을 끈질긴 사랑으로 기다려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지체들을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하심에 대하여 한 달을 길다 합니다. 1년 앞에 쉽게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기다림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부부, 자녀, 친구, 동료, 교우, 이웃에 대하여 기다림에 너무 인색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로 인하여 늘 마음이 눌려 있고 상해 있습니다. '왜? 저 모양인가...' '왜? 저렇게도 안 변할까...' '왜? 아직도 그 수준밖에 안되나....' 이런 넉두리와 한숨 속에는 내 자신에 대한 교만과 다른 지체들에 대한 조급함과 경시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의 마음도 이러하실 터인데...'왜 그렇게 믿음이 없냐?' '왜 그렇게 성화되지 못하냐?' '왜 그렇게 아직도 그대로냐?'고.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극심한 조급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당장 마실 물을 달라 하고 고기와 먹을 것을 달라합니다. 안주면 돌아간다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의 일그러진 실존형상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장 응답하시라 보챕니다. 하나님의 때를 앞당기라 떼를 씁니다. 왜 이렇게도 더디냐고 따집니다. 그런데 조급함의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리고, 야곱이 21년을 기다리고, 모세가 80년을 기다리고, 요셉이 13년을 기다렸듯이, 가족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자녀들에 대하여, 포기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기다리되 투덜거리지 말고 잠잠히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기다려주지 않으시고 당장 포기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은 몽둥이와 잔소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기다려 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변화속도 만큼 남도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기다리게 하실까요? 그 이유는 기다림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기다림처럼 우리를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깨뜨릴 방법은 없습니다. 그 기다림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은 부서지고, 자아는 죽고, 속사람의 찌꺼기는 걸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자신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것은 나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치명타를 아십니다.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빨리 깨어지고 쉽게 항복하는지를 아시기에 하나님은 그 부분을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리심

우리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리심 중에 어느 쪽이 더 힘들까요.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주님이 계시고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준비케 하시는 놀라운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배려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끝은 나의 깨어짐으로 앞당겨 질수 있습니다. '기다리라' 하심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섭리이며, 나를 나 되게 하시는 기막힌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냥 막연히 기다리시면 안 됩니다. 기도하며 은혜 받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침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실수 있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 애가 3;25-26)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 32 : 6) 주께서 우리 자신과의 교제를 원하시고,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명상의 시간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응접실에 주님을 홀로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할 시간을 찾으십시오. 주님과의 교제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준비하며 기다리자

성탄이 우리에게 축복의  날이고 또 그날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준비하여 맞이할 때 우리 가슴에 가득한 기쁨과 축복을 누리지만 기다림 없이 의미 없이 맞이한다면 성탄으로 베푸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행사는 조용하고 검소하게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기다림으로 들떠야 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4 주 전부터 대림절을 지킵니다. 대림절이라는 말은 기다리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다가오는 절기라는 말이 아니라 기다려야 다가오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기다리는 사람이 맞이하는 절기입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그냥 기다리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맞은 사람은 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야30장18절에서는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여 기다렸습니다. (마태 2장) 안나와 시므온은 사모하며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누가2:25-40).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준비 없이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중요한 일이 있는데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 없이 맞을 때 성탄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인 것처럼 주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준비하는 신자가 됩시다.

이번 성탄은 준비하여 맞이합시다. 깨끗하고 넓고 넉넉한 마음을 준비하고 주님을 맞읍시다. 주님은 너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에는 오실 수 없으시고 주님은 너무 크신 분이기에 좁은 마음에 오실 수 없고 주님은 사랑이시기에 미움이 있는 곳에는 오시지 못합니다. 비록 마굿간처럼 낮은 마음일 지라도 넓고 깨끗하고 넉넉한 마음에 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공간을 넓히고 단장하고 맞이합시다. 그러면  성탄이 참으로 큰 축복이 절기가 되어 성탄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끝 날까지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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