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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동방박사들이 온 목적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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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들이 온 목적 (마 2:1-12) 

12월 25일은 우리 주님께서 태어나신 바로 그 날은 아닙니다. 동방교회에서는 1월 6일에 성탄을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역사적인 한 날’에 이 땅에 오신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교회는 한 날을 정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연중행사의 하나나 연말 축제처럼 맞이할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기념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고, 이 날에 기념한 것이 다른 날들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장 성탄절을 의미 있게 보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성탄을 가장 의미 있게 맞이했던 사람들로 볼 수 있는 동방박사들을 통해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첫 번째 성탄에 참여했던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았던 이방인이었고, 별자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유대 땅을 찾은 것은 관광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에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2절을 봅시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목적은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말로 번역하자면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지 않고 예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박사들은 별자리를 연구하다가 새로운 별자리를 발견하였고,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 그 별은 참된 경배의 대상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별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경배의 대상이 탄생했음을 깨달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지적인 깨달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경배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몽땅 재편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배의 대상을 발견한 이 후로, 그들의 삶은 ‘경배하려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었습니다.

함께 신학을 공부했던 동료 중에, 예배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서울과 남부지방을 매주 오갔던 분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몇 년 동안이나 그 생활을 반복했었는데, 나중에는 수요 예배 때도 그렇게 했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재정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많은 헌신이 필요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그 삶이 참으로 즐거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선교사로 활동 중이신데, 하나님의 채워 주심을 여러모로 많이 체험하신 분입니다. 저도 차비가 없어서 두 시간을 걸어서 예배에 참석해보긴 했지만, 그분의 간증에 비할 바가 못 되어서 상당히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동방박사들의 예배는 이보다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한 번의 경배를 위해서 장거리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비행기 타고 편안하게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습니다. 낙타를 타고 매일 야영을 하면서 몇 달을 가야하는 거리였습니다. 나이가 많은 박사님들로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부담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행 경비는 스스로 부담해야 했을 것이고, 그 동안의 급여는 받지 못했을 것이며, 경배의 대상에게 드릴 예물을 준비했기 때문에 재정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배하기 위해서 시간의 헌신, 몸과 마음의 헌신, 재정의 헌신을 결단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는 어떻게 이러한 헌신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남보다 더 배운 박사였기 때문에, 혹은 남들보다 더 많은 재력을 소유했기 때문에 헌신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하여 동방박사들보다 훨씬 더 잘 아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등장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5-6). 또 박사들보다 훨씬 재정적으로 부유한 헤롯왕도 등장합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탄생한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남쪽에 라헬의 언덕이 있는데, 그 앞쪽에 베들레헴이 있습니다. 보아스의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저자 마태는 예수님에 대해 상당히 빈약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배하러 왔던 동방 박사들과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탄생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동방박사들의 모습과 소동하는 헤롯과 백성들의 모습도 대조됩니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경배가 지식이 많다고 더 잘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나 소유가 많다고 해서 더 많이 헌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배는 거리가 멀거나 가까운 것의 문제도 아닙니다.

예배란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존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영혼의 무릎을 꿇어 경배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거리나 소유나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영혼의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놀라운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영혼이 이미 메시아로 오신 분에 대하여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의 태도가 그러하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큰 희생이 따르고, 체력적으로 큰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재정적으로 만만치 않은 손실을 각오해야 했지만 그들은 기꺼이 경배하기 원하였습니다.

저는 예배함에 있어서 성서계명교회 성도님들의 성숙함이 늘 감사 제목이었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간사로 활동했을 동안에는, 명절이 주일과 겹쳐지는 때면 비상 대기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배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과 수단을 간구하고 애를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곳에서 목회하는 동안 계속해서 추석과 구정이 주일과 겹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토요일에 본가에 먼저 다녀오고, 주일에는 모여서 함께 예배한 후에, 주일 오후에 처가에 다녀오는 형태가 우리 성도님들의 한 특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들은 시간의 헌신, 몸과 마음의 헌신, 재정의 헌신에 대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는데, 모두가 성숙하게 대처했으므로 저는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함이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계속 느끼게 하셨습니다. 전체적으로 결혼 시즌만 되면 예배에 대한 의식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한 두 사람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주일과 결혼식이 겹쳐지면 우선권을 결혼식에 두는 경향이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워낙에 결혼은 인륜지 대사라서 예배에 빠져도 서로 이해해주고 용납해주는 분위기 속에서 과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또한 좀 더 성숙한 경배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고민했습니다.

그 후 결혼식도 명절처럼 대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전날에 찾아가서 축하해주거나 선물이나 부조금을 전해주고, 예배가 끝난 후에 다시 찾아가서 돕는 형태를 취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지금보다 좀 더 시간의 헌신, 몸과 마음의 헌신, 재정의 헌신을 결단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가족 친지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영혼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 그분을 무엇보다 최우선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는 성도가 마땅히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핍박이기도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고백은 하면서 아내를 위하여 일주일에 고작 한 두 시간 투자하는 것조차 아까워한다면, 혹은 남편을 존경한다 하면서 남편을 위해 약간의 수고와 희생을 각오하지 못하겠다면, 처음 사랑이 식어진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입니다. 예배 시간보다 좀 더 일찍 나와서 마음을 준비하는 그 시간이 아깝게 여겨진다면, 예배하는 일을 위해 가족 친지들의 핀잔을 기꺼이 각오할 수 없다면, 과연 우리 주님을 향하여 영혼의 무릎을 제대로 꿇고 있는 것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부터 그분의 은혜로우신 인도함을 받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그 인도하심을 주목하지 못하고 한 동안 별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통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바른 예배자들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참으로 바르게 예배할 자들을 인도하셨다는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들은 마침내 경배할 대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의 첫 성탄절은 뭔가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처럼 원래 예배는 드림과 연관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드림의 형식을 잘 보여줍니다. 신약 역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명합니다. 박사들은 드림의 의식을 통해서, 자신들을 드렸고 앞으로 남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자세로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탄이 되면 ‘받는 날’이라는 생각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탄을 가장 의미 있게 맞이했던 동방박사들은 첫 성탄에서 ‘드림’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과 영혼의 무릎 꿇음을 표현했습니다. 주일 헌상(獻上)은 주님은 참으로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고백하며, 새로 시작하는 한 주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생명과 소유를 사용하겠노라는 결단의 의미가 있습니다. 경배의 의미를 잘 생각하는 성탄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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