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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성탄의 ‘마음’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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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빌립보서 2장 5절~11절
제  목 : 성탄의 ‘마음’
 
1. ‘더 높이, 더 크게, 더 많이’

사람에게는 ‘상승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승의지’란 더 높아지려는 것, 더 많이 가지려는 것, 더 행복해지려는 것, 더 오래 살려는 의지를 말합니다. 이러한 신분의 상승, 재물의 더 많은 소유, 학력에 대한 의지 등은 사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요. 누구에게나 있는 이 상승의지는 그로 하여금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하고, 더 열심히 일하게 하고,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이끄는 촉매제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을 잘못되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 높아지려하고, 더 많이 가지려하고, 더 행복해지려고 욕심을 내다보면, 불법이나 편법을 쓰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해롭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좀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해 학력을 위조하고, 외국에서 공부한 것으로 꾸며서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려 하고, 편법을 써서라도 세금을 줄이려 하고, 남의 것을 빼앗을지언정 자신의 것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과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상승의지가 잘못되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의 뿌리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이사야 14장 13,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로다.” 즉 인간의 상승의지의 뿌리에는 자신의 위치와 분수를 떠나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승의지를 다 좋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본능처럼 자리 잡고 있는 이 상승의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성탄의 마음”이라고 했는데요. 사실 이것은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성탄의 정신’, 혹은 ‘성육신의 정신’이라고 해야 옳은데, 굳이 잘못된 어법으로 “성탄의 마음”이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성육신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을 본받아 사는 것이 성탄절을 맞은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에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본능인 ‘상승의지’와 정반대되는 성탄의 메시지를 함께 들어봅시다.

2. 하나님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2000여 년 전, 첫 번째 성탄절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로부터 예수님의 생애가 시작되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은 그 전에는 계시지 않다가 2000년 전에 태어나심으로 그때부터 계시게 된 분이라고 알고 계신 분은 없는지요. 성자 예수님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존재하셨습니다. 비록 구약시대에는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때에도 계셨던 분이며, 더 나아가 구약시대를 뛰어넘어 이미 태초부터 계셨던 분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제가 ‘목사’라는 것은 저의 본체가 아닙니다. 저의 본체는 ‘인간’이고 ‘남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기로, 한 남자로, 목수의 아들로 계셨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말은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시고, 그 이름이 하나님이시고, 그 직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시는 일도 하나님이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달라지지 않고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인격을 갖추신 분이며, 찬란한 광채를 가지신 분입니다. 수학에서 이등변 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가 같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렇게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1-3)”고 합니다. 여기서 “태초”라는 시간은 시작이 없고 끝도 없는 시간, 아니 시간조차도 뛰어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시간을 뛰어넘는 존재, 즉 영원의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10:30)”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입니까? 하나님처럼 예수님도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까?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십니까?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입니까?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과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처럼 예수님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결격 사유를 하나도 가지지 않은 완전한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선언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쉽게 이해될 수 없는 말씀이지만,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3. 사람이 되신 예수님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영원불변의 진리를 하나 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입니다(7, 8).

낮은 자리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것, 더 커지려는 것,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을 향해서 끊임없이 달렸고 그러면서 성공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보기에 그는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달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계속적으로 다른 사업과 다른 일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를 걱정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속 오르기만 하지 말고 쉬기도 하고, 내려올 줄도 알아야합니다." 그랬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그 동안 줄곧 달려오기만 했더니 쉬는 것, 내려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여 멈추는 것이 어렵고, 낮아지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더 크게” 되려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까?

이런 시대에 누군가 나서서 자신이 가진 특권과 영화와 권리와 부와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그는 당연히 우리 시대의 관심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오늘 바로 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자기를 비어”라고 합니다. 이 ‘비웠다’는 말은 영어로는 ‘아주 텅 비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웠다는 말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 되심을 비웠다, 버렸다’는 말입니다. ‘자신이라는 그릇을 비워 아무 것도 없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요즘에도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전보다 겸손해진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 스스로 기쁘게 자신을 비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아님 실패했거나 망하거나 병들어서 겸손해진 것입니다. 즉 부득이해서 스스로를 비우고 낮아진 것이지, 기쁘게 자발적으로 낮아지고 겸손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원하셔서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스스로를 비우셨습니다. 스스로 겸손해지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과 우리 시대정신과는 완전 다른 것이죠.

조선시대, 숙종 임금은 종종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고 서민들의 생활 현장으로 들어가 민정시찰하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어느 가난한 집에서 선비가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자세히 들어보았습니다. 듣자 하니, 학식이 높고 인격도 고상해 보이는 한 선비가 늦은 밤까지 글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집의 가세를 살펴보니 너무 가난하여 먹고살기조차 힘들어서 과거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함께 먹고는, 그를 위하여 특별한 과거를 열기로 마음먹고, 그에게 과거의 시제가 될 힌트를 주었습니다. 얼마 후, 과거를 열었는데, 그 선비는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날 밤에 왕이 준 힌트대로 답을 적은 답안지가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 답안지는 어느 젊은이가 적은 것이었는데, 왕에게서 힌트를 들은 그 선비는 시험 치는 날, 배탈이 나서 과거에 오지 못하고 자신의 제자에게 왕이 준 힌트를 전수하여 제자로 하여금 과거를 보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알려지면서 숙종 임금은 훌륭한 임금으로, 뛰어난 지도자로 인정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숙종 임금이 서민대중을 살피고, 그들의 생사고락을 헤아려서 국정에 반영하고, 그들을 위하여 살았지만, 어쩌다 한 번 씩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왕이 왕궁의 높은 담을 헐거나, 왕궁을 떠나거나, 왕복을 벗고 백성들 속에 섞여 살 수 있었겠습니까? 왕 자신도 신하들이나 백성들도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이나 백성들은 왕이 한 번씩 백성들이 사는 현장을 살펴주고, 그래서 자신들의 처지를 알아서 그것을 국정에 반영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왕의 옷, 왕의 면류관, 왕궁 등은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냥 왕인 그대로 있으면서, 자신들을 위해 한 번 씩 자기들의 생활 현장으로 들어오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우리 예수님은 이 숙종 임금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람의 아기로서 다른 아기들처럼 여인의 몸에서 핏덩이로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여려서 작은 손가락이라도 갖다 대면 어딘가가 부러질 듯 한 모습으로, 그렇게 아무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아기로 나셨습니다. 송아지는 태어난 지 얼마 있지 않아 곧바로 뛰어다니지만, 사람의 아기는 1년 가까이 지나야 비로소 걷기 시작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런 몸으로 1년 정도를 계셔야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 우리처럼 입을 옷 없이 발가벗겨진 채로 자라셨을 것입니다. 우리처럼 사춘기를 지나셨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셨으며, 한 때 우리를 측정하던 아이큐와 같은 잣대로 ‘영특하다 아니다’ 판단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을 다 겪으셨습니다. 아니 사실 예수님은 우리 일반인보다 더 험한 삶을 사셨고, 더 심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분이 스스로 피조물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왕이셨던 분이 지배를 받는 입장이 되셨습니다. 주인이셨던 분이 노예가 되셨습니다. 자유로우셨던 분이 자유를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께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집회 인도 차 가셨을 때 보고 들은 이야기입니다.

샌프란시스코는 기후가 좋아서 미국에 있는 많은 에이즈 환자들이 거기로 옮겨와서 산다고 합니다. 에이즈 환자들만 사는 마을이 있고, 에이즈 환자들만 다니는 교회도 있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아들을 수레에다 태우고서는 그것을 끌고 다니면서 “에이즈 환자를 사랑합시다”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의사인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에이즈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일에 바빠서 분주히 돌아다니다 보니 가정과 남편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밖으로 나돌게 되었고, 어찌어찌 해 가지고 그만 에이즈에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상처라도 아물지 못하고 그대로 곪으면서 썩어 가는 것이 에이즈 아닙니까? 아내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일을 핑계로 아내 노릇 못하고, 당신과 함께 있어주지 못하고, 당신을 챙기지 못해서, 결국 당신을 에이즈 환자로 만들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은 내 책임이라는 것이에요. 이대로 당신이 죽으면 당신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죄인으로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같이 에이즈를 걸려서 같이 죽자면서 그때부터 다시 신방을 꾸며서는 신혼부부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의사로서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부인이었지만, 남편을 위하여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창조주인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사람이 얼마나 한계가 많고, 제약이 많고, 못할 것이 많고, 약한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높이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높아지기를 꿈꾸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탄의 마음입니다.

4. 성탄의 ‘마음’

말씀을 맺겠습니다.

일본의 어느 화가가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 초상화의 제목은 “바보 예수”입니다. 그 화가가 보기에 예수님은 아무리 보아도 바보였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섬기느라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든지 입술은 말라 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나와 있었으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한 쪽 눈은 찌그러지고 진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화가가 보기에 예수님은 정말 바보였습니다. 하나님이시고, 능력 많으신 분이, 왜 그렇게 되셨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바보 같아서, 그래서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마음, 낮아지는 마음, 자신의 피조물과 같이 되는 마음, 자신을 죽기까지 복종시키는 마음, 바로 이 마음이 성육신의 마음이며, 성탄절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성탄절에 저와 여러분이 결단해야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 동안 우리에게 길들여져 온 ‘더 많이, 더 높이, 더 빠르게, 그리고 더 크게 되는 상승의 본능’을 이 성탄의 계절만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영적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얼마나 자신을 비우려하고, 얼마나 자신을 낮추려하고, 얼마나 자신을 복종하려하고, 얼마나 자신을 죽이려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의 역사는 낮아짐의 역사입니다. 주님의 나라 사람들은 낮아지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탄의 마음은 여러분의 인간적인 정욕을 얼마나 십자가에 못 박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싸우면서 살아왔습니까? 올 한해도, 그것을 시원하게 한 번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며,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며 사는 것이 참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시는 성탄의 마음은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못 박으셨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2007년도 성탄절을 맞으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 성탄의 마음, 성육신하신 주님의 태도, 우리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탄절을 맞는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을 더 잘 알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될 때,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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