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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유에 눕혀진 아기 예수 (눅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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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구유에 눕혀진 아기 예수
본문 : 눅2:3-7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신 사건이며 사람과 하나가 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육하신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찾는 다는 것은 잃어버림을 의미합니다. 잃어버림바 된인간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겐 하나님 자녀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그 자녀의 형상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마귀 자녀의 형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끊임 없이 찾고 계신 것입니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을 찾으신 맨 처음 음성입니다. 이후 선지자들을 통해 인간을 찾으셨고 나중에 직접 예수님이 이땅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눅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그래서 예수님의 성탄 즉 성육신은 인간을 찾으러 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위치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정상적인 인간 생육의 과정에서 동정녀를 통해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동정녀 통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육체를 입었다는 것 자체, 어린아이로 말구유에 뉘임, 등이 인간의 위치로 낮아지신 하나님의 모습을 타나냅니다.

낮아지지 않고는 낮은 자리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실 수가 없어서입니다. 육체를 입지 않고는 육체로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낮고 천한 인간의 육체를 친히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이미 계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의 보좌에서 만유를 통치하실 영광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존재의 시작이 아니라 존재 공간의 이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예수님은 “있을 곳” 이 없으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 마지막에 보면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했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예수가 있을 곳이 없어서 구유에 눕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사람들의 완악하고 강팍한 마음 때문입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베들레헴에 호적신고를 하러온 수 많은 사람들의 인파 때문에 여관은 마루도 휴게실도 빈방은 없었습니다. 결국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실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는 외양간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산월이 다 되어 해산기가 보이는 여인을 방이 없다고 길거리로 내모는 당시 베들레헴 사람들의 강팍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했습니다.

사관은 어떤 곳입니까?
헬라어로 ‘카탈뤼마’ 라는 말인데 이 말은 흔히 여관(inn)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여관이 이미 손님들이 꽉차서 더 이상 만삭이 된 이 부부를 들일 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관 주인이 동정심이 없어서 그랬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여관이 꽉 찼다는 것입니다.
이미 돈 많고 권세 있던 사람들이 미리 예약을 해놨겠지요. 아니 요새처럼 프리미엄을 받기 위해 여관주인이 방이 있으면서도 가난해 보이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는 방이 없다고 거짓을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짿든 그 여관에는 아기 예수가 태어날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가 있는 마굿간 한 모퉁이에 자리 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굿간이라고 표현하지만 어쩌면 양의 우리였을 것입니다. 당시 일반적으로 말은 유대인들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양의 우리에 한 편에 자리를 펴고 잠을 청하려는 그 날 밤 마리의 몸에 산기가 돌았고 결국 해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으면 그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마 5:3절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기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가난한 것이 복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가난함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의 가난한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 5:39-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가난한 마음은 완악하지 않습니다. 고집부리지 않습니다. 남을 존중하고 높일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압니다. 위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가난한 자의 태도를 갖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강팍함이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모실 곳은 어디인가?

1) 사랑하는 마음에 모실 수 있습니다.
요일4:16절에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님이 계실 집입니다. 프란시스는 이 땅에서 가장 경건하게 살다가 간 하나님의 사람이다.

교회사가인 샤프는 “그리스도 이후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장 잘 체득한 사람은 성 프란시스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미국의 교회사 연구가인 워커도 “성 프란시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절대적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길 가다가 나병 즉 한센씨 병을 앓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움칫하였으나 그는 곧 그 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그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의 입은 옷은 허술하고 문둥이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헌데를 씻어 주었고 화려한 성당은 피하고 언제나 쓰러저가는 낡은 기도원으로 예배하러 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찬양하며 기쁨으로 베풀어 주는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는 받으려 하지 않고 늘 베풀어 주었고 취하지 않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사랑의 생애였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29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하시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삼상 2:30절 끝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던 것처럼 지금 주님의 마음을 모르고 예수님의 동상에 금관을 쒸우고 좋아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말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영혼 구원입니다.” 즉 죄악중에 죽어가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예수가 죽기 위해서 오신 날입니다.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파노라는 착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습니다. 그는 잠이 들었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내일 크리스마스 날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집을 방문하실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날, 예수님의 방문을 약속 받았으므로 그는 크리스마스 때만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위에 올려놓고 구둣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밖을 내다보니 청소부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길 건너편의 청소부를 향해 "이리 들어와요. 추운데 몸을 좀 녹이고 커피 한잔 마시고 하세요."

청소부는 너무나 좋아서 빗자루를 던져두고 언 몸을 녹이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점심 때가 되도록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홑이불에 어린 아이를 싸들고 걸어옵니다. 노인은 측은하여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무심코 아기의 발을 보니 빨갛다 못해 파랗게 얼어 있었습니다. “아기가 신발이 필요 할 텐데, 쯧쯧” 하면서 팔려고 내놓았던 작은 신발 하나를 아이에게 신겨주었습니다.

겨울의 해는 빨리도 넘어갑니다. 이미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준비를 위해 올려둔 스프와 방이 데워지고 있을 때 한 떼의 거지들이 나타났습니다. 언제나처럼 노인은 그들에게 자신이 먹을 스프와 빵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거지들은 모처럼 성탄절에 행복했고 파파파노는 기뻤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리다 지쳐서 의자에 털씩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결국 꿈이었단 말이지? 혹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쳐버렸나?”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파파파노야 나는 너의 가게에 세 번이나 방문했다. 첫 번째는 청소부로, 두 번째는 아기를 안은 누추한 여인으로, 세 번째는 거지로 갔었지.. 나에게 베푼 따스한 사랑 정말 고맙구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함께하시고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반드시 하늘나라의 상급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웅장한 집에 살던 한 부자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집은 비가 새는 허름한 오두막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옆에 으리 으리한 대저택이 건축되고 있어서 부자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저 웅장한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
"당신의 옆집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의사가 살집입니다." 라고 천사가 말했습니다.
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의사는 동네에서 아주 조그마한 병원을 운영하는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사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을 무료로 치료하느라 평생 돈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천사는 놀란 표정을 짓는 부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땅에서 쌓은 선행들은 모두 하늘 나라로 배달됩니다. 당신의 선행은 오두막의 지붕을 쒸우기에도 부족 한 정도예요. 당신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어요. 그러나 저 의사는 평생 동안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요. 그가 베푼 사랑은 저렇게 대 저택을 짓고도 남을 분량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3) 낮아진 마음에 계실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내가 높아지면 예수님이 낮아집니다. 내가 낮아지면 예수님이 높아지고 이웃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롬 12:16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라고 했습니다.
겔 21:26절에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신자의 낮아짐이 신앙의 상승을 이룬다” 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폭삭 엎드리는 사람은 은총으로 올라갑니다.
어거스틴에게 레이나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볼일이 있어서 제자를 불렀는데 아무리 불러도 방에 있는 것 같은 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화가난 그 제자의 방문을 신경질 적으,로 열어졌혔을 때 아차하고 뉘우쳤습니다.
그 제자는 방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 스승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제자에게 간청했습니다.
너의 발로 내 목을 밝고 서서 교만한 어거스틴아.. 교만한 어거스틴아 교만한 어거스틴아 하고 이렇게 세 번 외쳐다오...
어거스틴은 이렇게 사과했다고 합니다.
겸손한 어거스틴에게도 그에 내부에 이렇듯 무심결에고개를 드는 교만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는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사람이란 내가 교만하다 라는 자기 평가를 내릴 때 겸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에 예수님이 계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예수님에게 나의 방을 내어드립시다. 내 마음의 방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바로 성탄을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고 불리는 9세 된 아이가 있었는데 나이로는 4학년이지만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해 성탄절이 가까워 오자 교회에서 연극을 준비하게 되었고 담임 선생은 󰡐윌리󰡑에게 여관집 주인역을 맡겼습니다.

성탄절이 되어 교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연극이 진행되던 중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와 여관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여관집 주인이 나와 방이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더욱 간절히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서 왔습니다. 아내는 출산할 날이 찼고 쉬어야 할 곳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아무 말도 없이 마리아를 오래 쳐다보았습니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잊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윌리󰡑는 막 뒤에서 선생이 일러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습니다.
"안돼요. 방 없어요. 가요!"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듯이 뒤로 돌아 걸어갔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각본에 따르면 󰡐윌리󰡑는 방안으로 들어가야 했으나 󰡐윌리󰡑는 문간에 그냥 서서 걱정스러운 듯 눈물을 흘리며 마리아와 요셉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돌아와요."
물론 각본에도 없는 대사였습니다.
"내 안방을 써요. 내 방에서 쉬란 말이에요!"

내 안방을 내드리는 마음에 예수님은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첫 번 성탄절에 예수님이 오셨으나 잇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나의 안방으로 모십시다. 내 마음의 안방 그곳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모셨지만 불편하게 해드리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해서 예수님이 나의 방에 들어오시도록 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원토록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주님이 낮아지신 것처럼 낮아집시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힘써 행합시다. 그러면 하늘의 영원한 상급과 영원히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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