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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니고데모의 믿음 (요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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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믿음 (요 3:1-8)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제도는 일반적으로 왕이 다스리는 군주제와 왕이 없는 공화제로 나눕니다. 이젠 옛날처럼 왕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다스리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의 나라가 민주주의의 정치제도인 공화제를 따르고 있습니다. 공화제도 가운데 대표적인 양대 산맥이 대통령제와 내각제입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를 따르고 있어 우리의 손으로 국가 최고 책임자를 선출합니다.

  이제 제17대통령선거가 이번 주 수요일에 실시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라에 관심을 갖고 국가의 최고통치자를 선출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냥 하루 쉬는 날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소중한 한 표를 꼭 행사하여 나라사랑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번 선거를 통해 보여주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해야 합니다. 정치의 발전이 곧 경제의 발전이요, 나라의 번영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정치가 가장 발전이 안 된 곳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좋은 정치가, 좋은 지도자가 나와 나라를 잘 사는 나라,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정치 세계에도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바로 그런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정치가로서 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바로 니고데모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오늘날 국회의원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을 만났고, 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오늘 그의 믿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니고데모의 믿음은 거듭나는 믿음입니다.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모두 거듭남의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거듭납니다. 그래서 큰 변화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거듭나는 것이 믿음, 믿음은 거듭남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의 거듭난 부분은 무엇일까요? 크게 2가지 그가 거듭나는 것을 성경은 소개합니다. 이것을 통한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첫째는 신앙에 대한 거듭남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모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을 꽤 오래 믿은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고,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계속해서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지만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에 있어서 새롭게 거듭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니고데모는 그의 신앙이 새로워졌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따라 그의 신앙은 새로워졌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새롭게 된 거듭남의 신앙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에는 적어도 3가지의 요소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말씀이고, 둘째는 기도이며, 셋째는 제사, 예배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 당시 바리새인들은 어떤 신앙으로 살았는가를 보고, 당시 동일하게 살던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새롭게 거듭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들의 말씀은 형식주의로 빠져 있었습니다. 형식주의는 말씀의 내용보다 형식만 강조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근본정신이나 의미는 사라지고 오직 형식만 갖추면 말씀을 잘 이해하고, 지키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늘 부딪쳤던 것이 바로 이런 형식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주님이 일하고, 행하고, 생명을 불어 일으키는 것에 대해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안식일에 쉬라는 의미를 오직 형식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잘못을 책망하며 말씀과 율법에 대한 형식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지적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기도는 외식주의로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가장 많이 반복한 책망이 바로 그들의 외식입니다. 외식주의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들이 거룩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가장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달랐습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자기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남을 짓밟았습니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겸손이 빠진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한 기도를 드립니다. 자기를 한없이 높입니다.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모든 삶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들어내는 일에는 아주 철저했습니다. 금식하고도 자랑하고, 구제하고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을 가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히 짓밟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외식으로 주님의 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제사, 예배는 의식주의로 빠져 있었습니다. 제사에서 물론 의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의식보다 자기를 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자기는 엎드리고 빠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 화목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화목하고 와서 제사를 드리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 삶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너의 몸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런 제사의 의미를 알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늘 의식에만 치우쳐 역시 주님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 니고데모도 역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도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외식주의에 빠져 있었으며, 의식주의에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주님을 만나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되면서 이 모든 것에서 정말 새롭게 거듭나는 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그는 형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외식을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니고데모의 믿음이요, 오늘 우리가 추구할 귀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하면서 자칫 신앙의 본질에 속한 이런 부분에서 바리새인처럼 신앙 생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 우리가 말씀의 형식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은 보고 들으라고 주신 것보다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내용은 사라지고 그저 형식에만 치우쳐 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혹, 우리가 기도의 외식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나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입니다. 거기에 어느 누구도 개입할 이유가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에 내가 드러나고, 우리의 기도에 남을 판단하는 것이 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우리의 예배가 의식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순종이 있습니까? 화목은 어떠한 것입니까? 내 삶을 드리기를 다짐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혹이라도 우리의 모든 신앙에 이런 부족한 면들이 있었다면 다시 태어나야 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아무리 멀리 갔더라도 잘못 간 길이라면 빨리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귀한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새롭게 신앙을 재정립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처럼 신앙이 거듭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한해를 맞이하고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삶의 거듭남입니다. 니고데모는 그가 바리새인으로 살던 지난날의 잘못된 신앙에서만 새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신앙과 함께 삶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큰 교훈으로 전합니다.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록은 여기 3장과 7장과 19장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기록을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거듭난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신앙의 모습이 거듭난 것은 물론이고, 그는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봅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니고데모가 주님을 만나러 찾아온 것이 ‘밤’이었다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까요? 이것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우선, 조용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낮에는 분주하고 복잡합니다. 예수님도 바쁘시고, 니고데모도 바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가하고 조용한 시간을 생각하다가 밤에 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것은 깊은 토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이 어떤 사람과 진리에 대한 토론을 하려면 주로 밤에 많이 이루어졌고, 밤이 새도록 토론했다는 문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니고데모도 율법학자요, 성경을 잘 아는 바리새인이기에 주님과 깊은 토론을 위해 밤에 찾아 왔을 거라는 것입니다. 모두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기를 감추려는 의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를 숨기고 싶었습니다. 만약 공회원으로서 주님을 만난 것이 공개되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신중함이 밤까지 기다리게 했고, 아무도 모르게 진리를 알기 위해 그의 발걸음이 주님께 옮겨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니고데모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들어내기를 원치 않았고, 신분과 소속을 밝히기를 꺼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주님을 통해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은 뒤, 가장 달라진 그의 삶의 모습은 이제 공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3장에서 주님을 통해 거듭난 니고데모는 7장에서 완전히 자신을 공개합니다. 그것도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그들에게 주님을 만난 것과 주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과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변호합니다.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주님 편에 서는 것은 모든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과감히 공개하며 주님을 믿는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던 니고데모가 19장에서는 한발 더 앞서갑니다. 그는 주님이 죽으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몰약을 가지고 무덤가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주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이젠 완전히 자신을 공개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죽음이 무서워 노출했다가 다시 속이기를 시작했고, 모두 낮에서 이젠 밤으로 자기들을 숨겼지만, 니고데모는 반대로 밤에서 낮으로, 비겁한 자에서 용감한 자로 거듭난 것을 봅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삶의 거듭남이요, 변화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거듭남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비겁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밤에 찾아온 사람입니다. 자기를 속이고, 신분도 속이고, 직위도 버리고, 이름도 버리고 그렇게 삶의 현장에서 살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이름이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인데 그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분명 우리가 사명과 직무가 빛이요 소금인데 너무도 어둡게 살았고, 밤처럼 살았고, 밤을 즐겼으며, 밤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지금 진정 필요한 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바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밤에서 낮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삶이 변화되고 거듭나야 합니다. 교회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귀한 거듭남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에서 돌아서야 하고, 어두운 것에서 이제는 밝은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 신분, 직위에 맞는 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런 거듭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앙은 의미가 있을까요? 달라져야 하고, 바뀌어야 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거듭남의 역사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가 거듭남의 비밀을 소개한 뒤,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거듭나는 길은 육이 아닌 영으로, 성령으로,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사모해야 하고, 은혜를 충족히 받아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신앙의 거듭남이 이루어지고, 내 삶의 거듭남을 이루어 날마다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롭게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제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 신앙이 새롭고, 우리 삶이 새로운 거듭난 사람, 거듭난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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