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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섬기는 사람들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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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사람들 (마 20:20-28)

일본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미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약한 사람들을 도와 주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강조하는가? “기죽지 마라!”고 가르친다.

인류 역사 가운데 자녀들에게 종이 되라고 가르치는 교육은 없다. 그런 종교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구원관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것 만큼 예수님의 삶이나 가르침역시 대단히 역설적인 모습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것 은 바로 “섬기는 자가 되라. 종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세상의 교육이나 종교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가르침인 것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자식들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한 어머니의 욕망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1.어머니의 욕망(20-21)

(마 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 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1)세베대의 아들들
세베대의 아들들은 야고보, 요한이었고, 어머니는 살로메였다. 그 여인은 자기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공손히 절한 후에 찾아온 목적에 대하여 말했다.

2)무엇을 요청했는가?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또 다른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러니까 조선시대 정부 직제로 말하자면 두 아들 중 하나는 우의정으로, 하나는 좌의정으로 임명해 주실 것을 약속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3)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왜 이런 요청을 했는가?
성경 주석가 바비에리, “모성애적 자존심의 발동이며, 시대와 민족을 초월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인간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는 있다. 자기 자식 잘 되기 바라는 것은 부모의 가장 큰 소망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와 같은 요청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살로메의 이런 요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셨다.


2.예수님의 답변

1)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무지(22절)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가? 그것은 제자들이 구하는 영광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천국의 영광을 구하긴 했지만 그 영광이 세상의 영광과 비슷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때 즉시 제자들이 대답했다.
“마실 수 있나이다.”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 잔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마셔야 할 잔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면 즉시 “마실 수 있다”라고 대답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한 이유는, 장차 받을 영광에 대한 기대가 컷기 때문이었다.

그 기대감은 앞서 19장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부자 청년은 항상 마음 속에 갈등이 있었다.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제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재물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그는 결국 재물을 택하고 말았다. 그 부자 청년이 떠나간 후 예수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충격적이었다.

(마 19: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근심에 빠졌다. 그리고 심각한 어조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그런즉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마19:27)

베드로의 질문은 상당히 조건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친절하면서도 엄숙하게 답변해 주셨다.
(마 19: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말씀에 제자들은 자극을 받았고, 조급한 마음을 갖게된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이 순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함으로서 장차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오해와 무지는 또 다른 집착을 불러오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살로메는 아들들의 말을 듣고 이번 기회에 아들들을 확실하게 출세시켜볼 각오를 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 주의 나라의 영광과 보좌와 능력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 보좌 좌우편에 자신의 두 아들이 앉게 될 것을 그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다해 주님 앞에 찾아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영광의 날에 앞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다리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자신 있게 주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불과 며칠 후에 거짓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2)십자가 뒤의 영광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마 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누가 주님의 나라와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마셨던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가 그 영광을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에도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바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기꺼이 세상의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가?
-당신은 옛사람의 습관을 과감히 끊어버릴 수 있는가?
-당신은 세상에서 고난과 조롱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영광을 구하기 전에 그리스도의 잔을 마실 각오와 십자가를 질 결단이 필요하다.

“No Cross No Crown!”이란 말이 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한다면 십자가 지는 일을 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감정적 태도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성숙과 성장을 말씀에 근거해서 의지적 결단을 통해 이뤄진다.

당시 제자들의 행동은 예수님을 실망, 슬프게 하는 짓들이었다. 3년 간의 동고동락, 그의 말씀, 그의 이적, 그의 삶을 보며 생활한 제자들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유는 고난의 십자가는 외면하고 영광만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넘겨져 능욕을 당하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고난당하실 일들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다. “육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전에 영광스럽게 되어질 것을 구한 것이다.”

제자들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다 도망갔으나 훗날 그들이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을 것임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머니까지 동원했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훗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기독교회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고, 사도 요한은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순교자로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장차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계시록을 쓴 주인공이 되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된다. 주님께 제자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셨던 것처럼 부족하지만 훌륭한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음을 인식하고 주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또한 우리 앞에 놓인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제자들 사이에 분노가 일어났다 - 순수하지 못한 시기의 분노.
(마 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3.큰 사람이 되려면

1)섬기는 자가 되라.
(마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여기서 큰 자에 대한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신다.
세상에서의 큰 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 권력있는 자, 학위를 가진 지식인, 명예, 인기,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 소위 집권자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임의로 주관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너희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다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큰 자는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큰 자는 타인의 영적 행복과 현세적 행복을 증진시키는 자요 섬기는 자여야 한다.
예)이명박 당선자,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큰 자가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2)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섬기는 차원 보다 한 단계 더 강조된 섬김이라 할 수 있다. 섬긴다는 말은 자발적 동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면,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큰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소란한 이유는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요,. 종이 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전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로운 교회는 서로 섬기고, 서로 종이 되어 준다.
종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 줄로 믿는다.


4. 예수님의 모범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께서 오신 목적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두 가지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첫째는 섬김(serve), 둘째는 줌(give). 이것이 주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표적 모범이다.

성탄절을 앞두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며칠 전 아침에 TV에서 소개하였다. 그는 4년 전 2003년 7월 영등포역에서 어린 아이를 구하고 달려오는 새마을호 열차에 다리 한 쪽을 잃은 주인공 김행균씨 였다. 그 후 그는 의족을 신고 현직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가산 디지털단지역 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 당시 구해준 어린이와 가족의 소식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치료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격려전화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분이라고만 알고 있다며, 연락이 없다고 해서 절대 서운하지 않다”고 한다.

영원한 철도원 김행균씨는 “또다시 위급한 순간이 와도 주저 없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또한 올해 서울사이버대학교 중국통상학과 1학년에 입학한 김씨는 앞으로 우리 철도가 중국철도와 연결돼서 동북아 물류를 부산항에서 유럽까지 개통되면 회사와 나라를 위해 조그마한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 준비차원에서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도 자신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며 섬기는 김행균씨와 같은 사람이 우리사회를 더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희생정신은 이 맘 때가 되면 미담이 되어 각박한 세상 살이에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훈풍이 되고 있다.

세상에서 자존심 세우고 높아지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는 아름답지 못하다. 진정 높아지기를 원하며, 진정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종이 되어야 한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그릇된 위대함을 추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다시 또 맞는 성탄절에 성탄 장식, 아니면 입술로 메리 크리스마스, 복받으세요.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너무나 분명하다. 섬기고 주기 위해 오셨다. 그렇다면 그분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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