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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인간이 되신 하나님(마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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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신 하나님(마1:1~17)

성탄절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대강절을 보내면서 계속 예수님의 성탄과 관계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族譜)를 중심으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 전해 드립니다.

신약성경을 척 펴면 제일 먼저 무슨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1:1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스라엘의 조상)과 다윗(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왕)의 자손으로 묘사됩니다. 여기 ‘계보’(系譜, genealogy)라는 말이 나오죠. 구 성경(한글개역성경)에는 ‘세계’(世系)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바꾸면 ‘족보’입니다.

일반적으로도 족보는 고리타분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성경 첫 장을 펴자마자 족보가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습니다. 낯선 이름들이 죽 나오는데다, 처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도저히 누가 누구인지 모를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씁쓸한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교에 막 입학했는데, 기드온 협회에서 와서 파란색 비닐 커버로 된 신약성경 작은 책을 한 권씩 나눠 주었습니다. 호기심에 집에 가서 첫 장을 폈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고,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고 ... 계속 낳기만 합니다. 아니, 무슨 책이 이래? 황당했습니다. 좀 더 인내하고 읽어내려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교회 다니는 친구에게 성경책이 왜 이러냐고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대학생이 되어서 친구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됐지만, 돌이켜 보면 좀 더 일찍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아무리 내용이 난해해 보이고 지루해 보여도 다 중요합니다. 뜻이 있습니다. 성경은 부피가 큰 책이지만, 꼭 필요한 말씀일 수록해 놓은 ‘콘사이스’와 같은 책입니다. 본문의 족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자세히 공부해 보면 인물 하나하나도 중요하고, 전체적으로도 여러 가지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성탄’을 간단히 한 마디로 뭐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런 사실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 증거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느 구절이겠습니까? 당연히 16절이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 구절을 보시고, 또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2절부터 죽 보십시오. 기록된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2절 이하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16절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나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가 아닙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 된 것은 맞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말인가요? 다른 인물들은 ‘남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생부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법률 상, 호적 상 아버지일 뿐입니다. 마리아는 생모입니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세상의 사악한 자들은 이걸 갖고 억측을 합니다. 마리아의 사생아라고 말합니다. 천벌 받을 소리이죠. 성경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보면 그 예언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기거 보면 에덴 동상에 거주하던 인간의 타락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합니다. 그 죄로 인해 죽음의 형벌이 주어집니다. 영적으로 죽고, 육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게 됩니다.(3중 사망=영혼의사망+육체의사망+영원한 사망) 인간을 이렇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뱀 곧 마귀(사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을 최초로 말씀하십니다. 바로 창3:15 말씀이죠. “내(=여호와)가 너(=뱀)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최초 선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리켜 흔히 ‘원시복음’(原始福音, Proto-Evangelium)이라 부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바로 마리아를 통해서 이뤄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마1:18~25)을 보면 마리아의 성령 잉태 사실과 요셉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경위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약혼자였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결혼 절차는 아주 특이합니다. 약혼(정혼)을 하면 동거하지 않지만 법적으로는 완전한 부부로 인정됩니다. 대개 약혼 후 1년 동안 이런 기간을 보냅니다. 이 기간 중에는 철저히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만일 부정한 짓을 하다 발각되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간 중에 마리아가 잉태하게 된 겁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수태 사실을 알고 순종했지만, 요셉에게 말할 수 없었었습니다. 말해봤자 핑계 같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을 하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간이 가면서 요셉이 낌새를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고민합니다. 데리고 살자니 불쾌하고,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폭로하자니 당시 율법으로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을 테고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해명해 줍니다. 마1:20 “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사람으로 오시는 것임을 설명해 준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를 확인하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 성자를 인간의 몸을 입혀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또 마1:23을 보면, 천사가 무슨 말을 해 줍니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God with us) 함이라"(사7:14 인용)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된 것은 갑자기 된 게 아니라,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7백년 전에 예언했던 것이 성취된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요셉은 비로소 마음이 풀렸고, 기쁜 마음으로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수종을 드는 차원에서 동침하지 않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그 기간 중에 누가복음 2장 기록대로 로마 황제의 호적령이 발령된 겁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갔고, 거기서 출산하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절묘한 섭리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갈등을 잘 극복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기 예수를 호적에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되셨음을 증거합니다. 이런 특성을 가리켜 신인양성(神人兩性)이라 부릅니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신인(神人, God-Man)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둘 다 믿는 게 중요합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이런 저런 이단들이 때로는 신성을 믿지 않아 예수님을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신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도 일종의 이단입니다. 때로는 인성을 믿지 않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만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1세기에 극성을 부렸던 이단이 바로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 - 그노시스 이단) 이단입니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신비주의입니다.(요일4:1~3 참조) 이게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 잉태도 거짓, 십자가 죽음도 거짓, 부활도 거짓, 재림도 거짓, ... 모든 게 거짓이라는 말이 됩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말짱 거짓말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 이단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추켜세우는 것 같지만 결국은 기독교 복음을 무효화시키려는 마귀의 장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악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족보는 선언합니다. “예수는 하나님 맞다! 그런데 그분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의 족보가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다시한번 이 족보를 통해 예수님이 참 하나님 참 인간임 재확인하시고 올바른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 : 대속, 동정

그러면 하나님이 굳이 인간이 되신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대속(代贖) :

예수님은 대속물(代贖物)이 되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막10:45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는 희생제물’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굳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입니다. 빌2:6~8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러분,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다줍니까? 우리 자신이 죄값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됩니다.

롬3:23~24에 이런 말씀이 있죠.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 고후5:21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인간에게 원죄가 이어지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성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셨으므로 죄에 오염이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 담당할 있는 겁니다. 만일 자기 죄가 있으면 자신이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만 해도 대속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대신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면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줄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이중전가(二重轉嫁)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의와 인간의 죄를 맞교환(Exchange)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대속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중국에서 복음 전하고 있는데 전염병이 돕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어찌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런 생각을 해냅니다. 미국으로 병원균을 가지고 가서 면역체를 만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리병에 전염병 병균을 담아 미국으로 떠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검역소 직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철저히 검색합니다. 만일 발각되면 끝장입니다. 고민하던 선교사는 병원균을 입 속에 삼켜버리고 유리병을 버립니다. 무사히 통과되었지만, 온몸에 병균이 퍼졌고 고열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가서 의사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선생님! 내 몸은 지금 중국에서 번지고 있는 전염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이 병원균을 뽑아 면역체를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그것을 중국에 보내 많은 사람들을 살려 주십시오!” 그 후 선교사는 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그 희생의 대가로 전염병의 면역체가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자를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병자가 된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의인이지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성탄과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굳이 인간이 되신 것은 당신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지만,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탄과 십자가로 우리가 속죄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는 자만 죄 사함 받고 의인이 됩니다.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습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면서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② 동정(同情) :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를 동정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정이란 말 대신 체휼(體恤, Sympathize)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구 성경(한글개역성경)에 보면 ‘체휼’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체휼 - 한글개역성경)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한다는 것은 동정한다는 의미인데, 그 뉘앙스가 특이합니다. 동정하되 몸소 체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동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 중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병자의 고통스런 처지와 심정은 그 병을 앓아본 사람이 잘 압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을 보고 동정한다고 하지만 속속들이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직접 체험을 해보지 않고 동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무기수 출신 목사님과 교도소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수형자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그 목사님이 사회를 보았습니다. 그분이 먼저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다가 여기 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7성 장군이요! 막판에는 무기수로 독방에서 묶인 채 생활했었는데 예수 믿고 새사람 됐소.” 그러자 그 전까지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찬물을 끼얹은즉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 모시고 왔으니까 조용히 말씀 잘 들으시오!” 합니다. 제가 설교하는데 얼마나 잘 듣는지 오히려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직접 체험해 본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습니다.

이런 성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작은 천사가 손가락으로 가시면류관을 만져봅니다. 따끔따끔할 텐데 전혀 아픈 표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프지 않은데 왜 그러나 하는 표정입니다. 왜 그럴까요? 천사는 영적 존재이므로 육체적인 고통을 못 느낍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어떻습니까? 전지(全知)하신 분이니까 물론 우리의 인생고와 애환을 아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지식의 차원일겁니다. 그런데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인생고를 체험해 보셨습니다. 탄생할 때 집 없는 설움을 체험하고, 탄생 직후에는 헤롯왕의 학살을 피해 애굽에 가서 피난살이를 체험하셨습니다. 그 후 지상 생애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체험하셨습니까? 배고픔, 목마름, 피곤, 멸시, 증오, 상처, 고통, 고독, 죽음 ...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고통을 다 겪어 보신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고통을 당하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누가 내 사정을 알겠는가? 자기 설움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 줄 것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알아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괴롭습니다. 섭섭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이게 체휼입니다. 동정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뉘앙스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동정을 해도 능력이 없으면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앓던 병에 걸린 병자에게 가서 손을 꼭 잡고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성으로 체휼하면서 동시에 신성의 능력으로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체휼과 동정을 가지고, 동시에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시고 도와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보면 나병환자 치유 사건이 나옵니다. 막1:41~42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그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능력으로 도와주신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는 그 무덤으로 가서 우셨습니다.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러나 울고 끝난 게 아니라, 나사로를 살려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도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감람산 위에서 성을 내려다보며 눈물흘리셨습니다. 눅19:41 “가까이 오사 성(=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그 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갖고 예수님에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히4:16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동정심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의 고통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계21:4 보면 천국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러므로 천국을 소망하시고, 또 고통 많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체휼하시는 사랑과 천국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 성탄의 절기에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원의 기쁨을 충만하시고, 모든 슬픔과 고통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해결 받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놀라운 성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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