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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예수라 하라,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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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예수라 하라,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본  문  :  마태복음1:18-25

저는 지난 주간 화요일(12. 18)에 북한 개성 주변의 봉동리라는 마을과 개성공단을 다녀왔습니다. 휴전선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때에는 적은 설렘이 있었습니다. 전에 금강산을 다녀올 때에는 관광차 가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연탄을 싣고 들어가서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을 시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평양노회에서는 북한주민에게 연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북한에 연탄을 보내는 것은 창구가 일원화되어 있는데,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이란 단체가 있습니다.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은 북한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지방에 10개의 지부가 있어 생활보호 대상자와 산골 오지 마을에 연탄을 나누어주고 있는 NGO입니다. 북한에는 금년 한해에 150만장을 지원해주고 있었습니다. 설립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 단체인데, 대단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탄 나눔 운동에는 약15,000명의 회원들이 가입되어 있어, 자기들의 생활비에서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연탄을 제공해주고 있었습니다.  이번 평양노회가 북한에 가져간 연탄은 5만장인데, 번개탄도 수천 장 가져가다 보니, 한 대에 6250장씩 25톤 트럭 8대에 싣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힘들여 하역작업을 하였고, 봉동마을에 있는 봉동관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식사하고, 개성공단에 들어가서 현대아산사무실과 신원 에벤에셀 공장을 방문하였습니다.  현대 아산에서 나온 안내원은 북한여성이었는데, 평양외국어대학 출신이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는 영어로 개성공단을 자유자재로 설명하는 대단한 여성이었습니다.  개성공단은 앞으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어보였습니다. 북한 땅에는 오전9:30분에 일제히 들어갔다가 오후 4시에는 다시 일제히 나와야 했습니다. 

북한 주민을 직접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연탄을 내리는데 제 손에서 받아 쌓는 사람이 북한 남자였는데, 소학교 다니는 아들 하나를 둔 아버지였는데, 일을 잘 하였습니다. 우리는 연탄을 한 장씩 운반하는데, 그는 한 5장 정도는 한꺼번에 받아쌓았습니다. 그래도 연탄은 한 장씩 운반하고 내리는 것이 힘이 덜 들고 속도가 붙었습니다. 

봉동역 옆으로는 개성공단 2차 분양지로 예정되어 있어서, 주민들이 다 철수한 상태로 민둥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 앞으로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마을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주민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봉동리 중심부에 형성된 마을을 보면 우리나라가 새마을 운동하기 전 60년대 초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산에 파놓은 굴속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 물이 말라버린 개천에서 모래를 파 가는 할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 연탄 하역을 위해서 나온 많은 남자들, 곳곳에 서 있는 북한군인들, 일을 마친 후에 손을 씻으라고 따뜻한 물을 가지고 온 마을 주민들, 우리와 모습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을 붙이지 않으면 전혀 말이 없는 사람들,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는 열성당원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북한 땅은 일찍이 복음이 들어간 곳인데, 지금은 교회는 찾아볼 수 없고, 복음의 불모지가 되고 보니, 지구상에서 아주 어렵게 살아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목사들이라고 하면서 ‘목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믿으라고 설교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면서 웃고 있었습니다. 그 짧은 만남으로 복음을 전하기란 힘들고, 우리는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고는 열심히 일하면서, 좋은 인상을 주고 오려고 애를 썼습니다. 무언의 전도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핸드폰도 성경도 다 맡기고 들어갔으니, 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이 얼어붙은 북한의 곳곳에 울려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로, 금주 화요일은 성탄절이 됩니다. 오늘 주일 예배는 평양의 봉수교회가 건축을 완공하고 입당하는데, 우리 교단의 많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남선교회 회원들이 오늘 평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의 남선교회 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우리 교단에서 건축을 담당해주었습니다. 

지난주간에는 우리나라에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10년 동안 정권을 잡고 있었던 개혁세력을 내려앉히고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사상적으로는 보수 성향의 인물을 청와대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은 기독교인이요, 우리와 같은 교단의 소망교회 장로님이 당선되셨는데, 잘 감당하시고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야겠습니다. 조금 미숙한 점이 보여도 오래 참아주고 기다릴 줄 아는 넉넉한 마음으로 지켜보아야겠습니다. 12월 19일이란 숫자는 이명박과는 의미 있는 숫자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사회의 모든 헝클어진 것들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위축된 경제가 살아나고, 한미, 한일, 한중관계가 더 견고하게 되고, 대북관계가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신 분은 모든 계층을 끌어안고, 하나로 만들고,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그를 괴롭히더라도 포용하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넉넉하시고 대범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면서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 당선자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장로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인류에게 가장 귀한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메시아를 고대하던 유대인들만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전 인류에게 기쁘고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토머스 홈스 박사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는 때를 조사하였는데, 심적으로 가장 큰 변화가 오는 것은 배우자가 먼저 죽었을 때였습니다.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살아오던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입니다.  이렇게 배우자가 죽는 것을 100으로 보고, 그 밖의 다른 요인들을 점수화하여 비교하였습니다.  이혼의 경우가 73, 임신했을 때 40, 집을 고쳤을 때가 25, 놀라운 것은 크리스마스가 무려 12점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매년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인데도 마침 연말연시와 겹치면서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절이라고 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자리에 내려오신 희생의 날입니다. 성탄절이 주는 깊은 의미를 안다면 우리도 낮은 자리로 내려가고, 나를 희생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살릴 수 있는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후암동에 있고, 우리 동리에는 후암교동협의회가 있습니다. 9개교회가 한 형제와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한 동리에 살면서 하늘나라에 가서 통성명하게 된다면 부끄러울 것 같아서 몇 분 목사님들을 모아 교동협의회를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9개 교회가 모여 쌀을 모았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10Kg 자리 120포를 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은 것이 600포대가 되었습니다. 사랑나눔 연합바자회를 해서 9개 교회에 속한 45가정에게 현금50,000원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리는 사람 살만한 훈훈한 동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라 하라,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탄의 참된 의미를 예수의 이름에서 찾아보고, 의로운 사람 요셉을 보면서 성탄을 맞이하는 참 자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 구주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데 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과 하나로 존재했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수태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목수로 일하는 한 동리 청년 요셉이란 사람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약혼하고 결혼하는데, 유대나라에는 약혼이란 부모님들이 약속하고 정해주는 단계로 법적인 구속력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약혼과 같은 단계로 정혼이라는 것을 하는데, 이제는 두 사람이 대략 1년 안에 결혼하기로 약속을 하고 모든 사람 앞에 부부가 될 사람이라고 선포합니다.결혼을 준비하는 이 기간에 부정한 일이 일어나도 안 되고, 부정한 일이 일어나면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기간에 한 편이 죽는다면 아직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법적으로 처녀 과부가 되기도 하고, 총각 홀아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약속이라는 것을 생명같이 알았기에 한번 정혼하였으면 영원히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혼을 모르는 온전한 가정이 이스라엘을 복되게 하였습니다.

예수의 양부가 될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가치관으로 보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바르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자기와 약혼한 사람, 결혼하기로 정혼한 사이인 여자, 마리아를 바라볼 때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와 결혼하지 않았고 동거하지도 않았는데, 가까이에서 몸매를 보니 이상합니다. 그녀가 아기를 가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이가 수태되면, 뱃속에서 10개월을 자라야 합니다. 아기가 자라다보니 엄마의 배가 불러오게 되고, 그래서 임신은 숨길 수 없습니다. 

요셉은 자기와 결혼할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놓고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 동리에서 사랑한 여자인데, 그와 함께 살아갈 아름다운 꿈이 산산이 깨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자로서 아내 될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임신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에 떨어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랑한 여인인데, 나만 참고, 조용히 넘어가면 마리아는 어떻게 하든지 살아갈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미워할 것도 없이 자기가 먼저 가만히 정리하면 될 것이라고 이런 저런 생각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마리아에게 수치가 되지 않도록, 사려 깊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말씀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신앙이란 역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이해된다고 하여 수용한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고 있고, 인성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논리를 파괴한다고 하여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역설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에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 여자가 임신하였는데, 이것을 가지고 성령으로 임신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사람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역설이요, 모순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영적인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주님을 영접할 때만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무엇을 믿으라 말라 할 것입니까?  신비한 무엇이 있어야 믿을 만 합니다.  성육신이라는 것이 신비한 것이기에 우리의 믿음을 요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한 것을 어떻게 믿을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 고백한다면 동정녀의 탄생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주의 사자가 전하여 주는 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내인 마리아가 혼전에 임신한 것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는 말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였습니다.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의롭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기들 부부가 쓰임을 받는다는 생각에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붙잡고 쓰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정혼한 사이의 마리아를 더 두고 보지 않고, 아직도 기간이 남아 있고, 결혼이 급한 것도 아닌데 서둘러 아내를 데려왔으며,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고 보호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훌륭한 성품은 마리아를 데려왔다는 말은 결혼식을 치르고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인데, 아이를 낳기까지 참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요셉과 같이 신실하게 인내심이 많고,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사람이 성탄절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이나 신약의 요셉이 다 훌륭합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로부터 아내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정하시는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인용하여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기록된 말씀도 그대로 믿었습니다. 성경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한 마디로 “임마누엘”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탄의 깊은 뜻을 알려면 오늘 임마누엘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우리 주님의 속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깊은 성탄의 의미를 강조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 14)고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은 아들과 하나로 계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자기 땅에 오시는데 지저분하고, 더러운 사람을 통하여 오시지 않고, 마리아라는 순결한 처녀의 몸을 빌어 오셨고, 요셉과 같이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 의로운 사람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은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사람으로 나시기 위해서는 한 분의 어머니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처녀여야 하였고, 그녀의 자발적인 헌신이 없이는 성육신의 역사는 불가능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말씀드리고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성이 정말 훌륭한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남편이 될 요셉이라는 사람도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은 착한 사람이요 성품이 좋았습니다. 원만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주의 사자의 지시에 순종하며, 들려준 말씀을 그대로 믿고 헌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주님의 나심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구원하는 역사를 널리 전파하려고 힘쓰며, 하나님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려는 의지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어느 단체에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장 가고 싶은 장소가 어디인지를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백화점, 명동, 설악산 등 다양한 장소가 나왔고, 심지어 해외여행을 선택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대망의 1위는 스키장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얀 눈이 깔려 있는 스키장에 가족들과 연인과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사회복지 시설에 찾아가겠다는 사람은 0.8%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00명에 한 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도 냉정해지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 가는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우리 교인들에게도 사회봉사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일 년에 하루는 사회복지기관에 가서 자원봉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인내하고 희생하고 낮아지고, 헌신하다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보는 순간에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에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고 하는 결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요셉과 같이 아름답게 쓰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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