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전히 시험은 있다 (마 4:5-11)

  • 잡초 잡초
  • 206
  • 0

첨부 1


여전히 시험은 있다 (마 4:5-11)

어느 날 한 부인이 심장마비로 병원에 응급으로 실려 왔습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하나님 이제 제가 죽는 것입니까?"그랬더니 하나님께서"아니다. 너는 40년을 더 살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부인은 안심하고 수술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이 되고 심장도 정상으로 돌아오자 40년을 더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남은 40년을 정말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 병원에서 턱을 깎아내고 눈을 집고 코를 세우고 주름제거와 지방흡입, 뱃살제거등 대대적인 성형수술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2개월 뒤에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에 병원 앞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천국에 간 부인이 하나님께 따졌습니다."아니, 하나님 40년은 더 남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일찍 데려오면 어떻게 하십니까?"그때 하나님이 이 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시면서 대답하십니다."어, 나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지....."

사람이 욕심에 빠져드는 것은 순간의 생각입니다. 좀 더 나은 것을 향해서 나아가고자하는 인간 앞에 유혹이란 참 물리치기 힘든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다하면 어디든지 달려가고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하면 무슨 짓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더 나쁜 것으로 인해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으로 유혹이 일어나고 그것 때문에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불러 오기도 하고 앞서가는 마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시험에 빠지는 것은 그 결과는 늘 좋아 보인다는 것 때문이거든요. 유혹의 너머에는 언제나 꿈같은 일들이 펼쳐질 것 같거든요. 더 나빠진다. 더 보기 흉해진다고하면 아무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요,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더 달콤한 결과와 훨씬 나은 대가가 있다고 생각할 때 쉽게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고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면서 화분에 심어 잘 가꾸어 제일 꽃을 예쁘게 피우게 한 사람에게 상을 많이 주고 그 대신 꽃을 도무지 못 피우게 한 사람에게 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꽃이 다 필 때쯤 되어서 모두 그 화분을 가지고 길가에 나와 진열해 놓고 임금님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기로 했습니다. 다 진열된 후 임금이 지나가면서 보니까 모두 훌륭하게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어느 소년이 꽃 없는 화분을 들고 나와서 그대로 그 옆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데 임금님은 예쁘게 피어 있는 꽃들은 다 눈을 찡그리며 보더니 이 꽃 없는 화분을 보고 기쁜 얼굴로 그 소년을 불러 칭찬하여 큰상을 주었습니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 꽃씨를 받아 심었으나 꽃이 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꽃이 예쁘게 피지 않은 사람은 벌 받는다고 하는 그 말씀이 두려웠고 또 예쁘게 꽃 피운 자에게는 상을 주신다고 하였기에 상을 타려고 부정하게도 다른 꽃씨를 심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꽃이 피지 않는 화분을 정직하게 꽃 없는 화분 그대로를 가지고 와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님이 오시는 길거리에 쭉 늘어져 있는 많은 화분에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은 요화(妖花)였습니다.  즉 부정을 통하여 억지로 만들어진 요사스러운 꽃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오색찬란한 꽃과 같이 황홀한듯하나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유혹과 시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인들의 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형편이 어떻습니까? 진실 아닌 것이 진실인 것처럼 우리를 유혹하기도합니다. 너무나 명확한 해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더 갈등하게 하는 시험들이 요소요소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진실하게 살려고 하고 제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시험은 있습니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은 깨진 도자기를 손가락으로 두드려보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깨졌기 때문에 두드려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마에서 꺼낸 다음에 깨끗하게 잘된 도자기는 반드시 두드려본답니다. 겉은 멀쩡한데 혹시 속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서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살아가는 것이 너절하고 시시한 사람, 그런 인격은 시험을 걸지도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간혹이런 사람들을 시험에 빠트리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너절하게 살아서 시험에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몰라요. 그래서 다른 사람 시험 들게 하는 것을 우습게 압니다. 이건 나쁜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요. 아예 신앙도 없고 성경도 모르고 예수는 오래 믿었다고 해도 신앙의 생활이 잘못된 사람은 남이야 상처를 받는 말이건 아니건 상관안합니다. 생각도 해보지 않고 함부로 해버립니다. 자기생각만합니다. 남들이 다 자기 같은 줄로 착각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깔보는 것이 반대로 자기의 생활이 그렇다는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게 무지해서 용감한 것입니다.
하여간 여러분, 바르게 살려고 하는 누구에게나 시험이 있습니다. 신앙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형태의 유혹이든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에 대한 잘못 된 이해입니다. 가끔씩 보면 시험에 대하여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데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하고 무엇인가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결과적으로 당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을 시험으로 잘못알고 있단 말입니다. 명백한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결과는 시험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마땅한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하여 시험이라고 오해하면서 견디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시는 이야기입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큰일을 이루고자 하실 때에 먼저 시험을 받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세 가지의 시험을 하게 됩니다.

가장 첫 번째는 물질적 본성에 대한 시험을 합니다. 3절입니다."돌로 떡을 만들어라."는 시험입니다. 한 마디로 경제적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금식하셨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음식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경제적 자립니다. 오늘 예수님을 향한 마귀의 이 시험은 오늘 우리들에게 경제적인 유혹이 다가오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경제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즉, 돈이면 다 된다. 돈만 있으면 행복 할 수도 있고 넉넉하고 잘 살게 되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마르크스가 이렇게 외쳤고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를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참 어렵게 배웠습니다.

그 다음 순서를 달리해서 세 번째 시험부터 보겠습니다. 내게 한번 절하라 그러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을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라는 것의 참 의미가 무엇입니까? 서로 맞부딪쳐 싸우는 것이 정치가 아닙니다. 정치라는 것은 서로 만나서 잘 타협을 해가지고 그 중도를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밤낮 부딪쳐 싸우는 것만 보니까 정치가 죽었고 정치가가 없다고들 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위대한 정치가란 아무리 극한의 상태라도 만나서 주먹 잡이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타협을 잘 이루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대단한 정치가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일반적인 정치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사탄과는 타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언제나 선해야 옳습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불의 앞에 타협하고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마귀는 예수님께 이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눈 딱 감고 딱 한번인데 뭐...'하는 유혹과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험에 한번 빠지게 되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얼마나 오래 동안 겪게 되는지 모릅니다.

본문의 또 하나의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신앙적 시험입니다. 걸어 내려가도 될 것을 왜 굳이 뛰어내리라고 할까요? 사람들에게는 뭔가를 해도 크게 그리고 한번 만에 큰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터벅터벅 걸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가지고야 어느 세월에 무엇을 이루겠는가? 좀 화끈하게 이루는 스타가 되어야지. 그래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목사가 되려고 하고 선교사가 되어야하고 순교까지 해야 하는 눈에 보이는 깜짝쇼를 해야 하는 줄로 아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조그마하게 썩어지는 밀알하나로도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곧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열매가 아니라도 열매가 맺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사람을 전도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열두제자를 가르쳐 놓았을 뿐입니다.

그 제자들을 통해서 차츰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루합니다. 그 과정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당장에 화끈하게 이루어지는 효과만점의 일입니다. 당장이라고 하는 여기에 우리도 끌립니다. 그라나 급하게 쉽게 빨리 되기를 원하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시험입니까? 한 번에 크게 터뜨리려고 하는 영웅 심리를 자극하는 사탄의 시험이 바로 이 시험이 오늘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멀쩡하다면 사람들이 정말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고 믿어줄 것 아니냐는 제법 그럴싸한 유혹입니다. 그리고 뛰어내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천사가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적 유혹을 합니다.

자, 여러분 이 시험 앞에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주여! 믿습니다."하고 훌쩍 뛰어내리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못 뛰어 내리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뛰어 내리면 반드시 죽습니다. 안 죽으면 그게 기적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탄의 노리는 바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충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뛰어내리면 죽는 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자연계시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충분히 알도록 지식을 주셨습니다. 판단력도 주셨습니다. 추리력도, 양심도 도덕성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주신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다 부인하고 시험 앞에 무너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탄은 우리의 욕망을 절대적으로 믿게 합니다. 여기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 없이 영광을 취하라는 타협의 시험 앞에도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영웅 심리는 하나님의 뜻을 망치게 합니다. 자칫 내가 아니면 안 되고 그 일을 반드시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 때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나 말고도 할 사람이 많으며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걸음 물러서서 유혹을 이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