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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아기 예수를 기다린 사람 (눅 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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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를 기다린 사람 (눅 2:25~35)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인내하며 극복하게 됩니다. 인간이 가지는 최상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 소개된 시므온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직접 만나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의 환상을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계시와 언약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오늘날 성탄의 의미를 알고 크게 기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뜻 깊은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앙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메시야를 사모한 사람

모세의 율법에는 여인이 아이를 낳은 후 산혈이 끝나게 되면 정결케 되는 예식을 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레위기 12:1-8에 남자 아이의 경우 삼십 삼 일이 지난 후 일 년 된 어린양이나 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가 번제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율례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올라갔다가 시므온을 만났습니다.

1) 경건한 사람입니다.

본문말씀 25절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은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전형(典型)입니다. ‘의롭다’라는 말은 불의가 없고 정의롭다는 뜻이지만 이는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의 특징이기도 합니다(롬 8:1). ‘경건하다’라는 말은 ‘구별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지향하는 거룩한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레 11:45).
경건한 성도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임재(臨在)의 장소입니다.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한다는 뜻이 됩니다. 항상 깨어서 기도하며 성령과 교통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인내하며 기다린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옛날부터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1:41).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눅 24:21). 세례요한이 먼저 나타나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메시야인줄 알고 따르기도 하였습니다(눅 3:15).
시므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종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마 24:42-47). 예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소동한 것은 예측하지 못할 때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처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만남의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을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봅니다. 전통적인 유대인의 생각은 메시야가 명문대가의 집에서 태어날 줄 알았습니다(요 1:46). 그렇지만 지금 예수님은 가난하고 이름 없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생후 30 여일 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다는 것은 용의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시므온이 이를 메시야인줄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가 세례 베푸는 곳으로 예수님이 나오실 때 성령이 예수님인 것을 알게 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요 1:33-34). 사도 요한은 땅위에 사람들이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거부하였지만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에 따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요 1:12-13).

2. 믿고 증거 하는 사람.

성경적 믿음에는 언제나 불가사의(不可思議)적 요소가 있습니다. 이는 과학적인 지식이나 합리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20:29).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시므온의 경우도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그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의 믿는 바를 증거하였습니다.

1)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26절에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상은 하루 이틀에 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조상 때부터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신앙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당대에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경우는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되리라고 하신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이 약속이 이루어진 사실을 자기 입으로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언약을 믿고 기도하며 이를 전하기도 하는 사람이 막상 그 사실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보았을 때 오히려 불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매일같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빌립으로부터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고 하며 이를 거부하였습니다(요 1:46). 여기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한 그의 믿음을 실증하였습니다.

2) 메시야에 대한 믿음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올바른 기독론의 신앙을 갖지 못하고 있어서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인류의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고 이를 증거하였습니다. 또 30절에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32절에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 이며 인류의 빛이요 소망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34절에는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있어서 흥망(興亡)의 근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비유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7-8).

3.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사람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찬송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찬송이 많이 있습니다. 1장에는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찬양이 있고(눅 1:41-45) 이에 화답하는 마리아의 찬양과(눅 1:46-55)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찬송이 있습니다(눅 1:68-79).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준 천군천사들의 새벽송이 있습니다(눅 2:8-14). 여기 시므온의 찬송도 앞서 언급한 찬송과 함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격하는 찬양입니다.

1) 소원이 성취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28-29절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남으로 지금까지 기다리고 바랐던 그의 소원이 다 이루어 졌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는 뜻으로 만족하며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성령의 지시에 따라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가장 큰 희망을 걸고 하루하루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그 결과를 보게 되었으니 그 감격과 감사가 엄청 컸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것을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주님인 것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에 감격하는 성도의 입에는 저절로 찬송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노래하였습니다.

31-32절에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의 신분과 인격과 그의 사역에 대하여 알았고 이 사실을 두고 하나님께 찬양하였습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은 천군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외양간으로 찾아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직접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였습니다(눅 2:20). 한편 머나먼 이방인의 땅 메소포타미아에서 별을 보고 찾아 온 동방 박사들도 아기에게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린 예물의 비중으로 보아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황제와 같은 가장 존귀한 신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구약시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는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을 “흑암에 비취는 큰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2). 그는 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3) 이스라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본문말씀 32절에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군 천사들의 새벽송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하였습니다(눅 2:1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나라와 백성은 왕에게 칭송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우주적인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세무궁토록 찬양을 받으실 영광스러운 분입니다(계 11:15).

여기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란 다윗과 솔로몬 때의 황금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그렇지만 바벨론 포로 이후 로마의 속국이 된 그때까지 사실상 그 영광은 회복되지 못 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된다고 하였습니다(눅 4:18). 이는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 속박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와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롬 3:23-24).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요 성탄으로 인하여 참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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