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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임마누엘의 신앙 (사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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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사7 : 1 - 14절             
제  목 : 임마누엘의 신앙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위기나 중요한 시기에 처했을 때마다
      하나의 징조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아기가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이야기부터
    출애굽의 대장정을 펴실 때에, 모세가 태어나는 이야기,
    한나를 통하여 사무엘이 태어나는 이야기, 삼손이 태어나는 이야기
    또 신약에 세례요한이 태어나는 이야기 등이
중요한 때 중요인물로 쓰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할 때
사7:14절에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고 합니다.
오늘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임마누엘의 신앙에 눈이 뜨여지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본문말씀의 배경을 이야기 해 보세요(1절)

오늘 본문말씀은 아람 나라와 북쪽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남쪽 유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새로 등극한 유다 왕 아하스가
    당시 신생 강대국인 친 앗수르 노선으로 선회하자
    반 앗수르 동맹을 결성하고 있던 아람나라와 북 이스라엘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습니다.

대하28장에 보면
하루 만에 유다 용사 12만 명이 죽고 20만 명이 사마리아로 포로 잡혀가고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치려고 포위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왜 이런 참상을 당하는가 하면
아하스가 20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치리하면서
1) 대하28장에 보멵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자식을 우상 앞에 불살라 바치는 일을 행하였고
2) 왕하16장에 보면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갔다가
  다메섹에 있는 우상의 단을 보고 돌아와
  제사장 우리야로 하여금 다메섹에 있는 대로 성전에 단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대하28:19절에
[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
이렇게 하나님이 낮추니 급박한 상황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위급한 상황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2. 당시 상황의 위급함이 어느 정도입니까?(2절)

2절 [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산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
    고 합니다.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과 백성들의 마음은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것같이
    그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음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산림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떨고 있습니까?
물론 아람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략으로 떨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두려움은 단순히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불신앙 하는데서 오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똑 같이 예루살렘이 포위 당하지마는
사37장에 보면 아하스 왕의 아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이때도 성경은 [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
이렇게 상황은 아하스나 히스기야나 똑 같지만
믿음의 사람 히스기야 왕은
    옷을 찢으며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며
    사자를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내어
    [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 ] 고 부탁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 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그래 알았다 내가 직접 손볼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둘러쌌지만
이런 사태가 발생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의 불신앙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요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주기 위함이기 때문에
이번 문제는 두려워 떨 일이 아니요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문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방에 우겨 쌈을 당하였다고 다 두렵고 떠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시27:1-3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
    [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

시46:1-3절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문제 만날 때 지금 두려워 떨고만 있을 때인지
신앙에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께 기도해야할 때인지 잘 분별하여
히스기야같이 주의 종에게도 도움 청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왕과 백성들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대책을 보여 주십니다.


3.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3-9절)

3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네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를 만나 내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 왕을 만나라고 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시각적 메시지라고 합니다.
이사야의 아들은 사8:18절에
[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
이사야가 스알야숩을 데리고 간 것은 징조와 예표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럼 어떤 예표냐?
스알야숩은 그 뜻이 [ 남은 자가 돌아온다 ] 는 말입니다. ]
남은 자 사상은 사6:13절에 이 땅의 거룩한 씨를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 시대가 타락하고 어둡더라도
        거룩한 씨를 남겨 뜻을 이루어 나간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스알야숩을 데리고 간 것은
아하스 왕으로 하여금 아무리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지만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나타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방에 우겨쌈을 당해 우리에게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지마는
하나님은 지금도 스알야숩의 하나님으로 남은 자들을 통해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컬럼브스는               
신천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모두 네 번이나 항해를 감행했는데
      그는 자금난, 반대자들의 모함, 선상의 반란
      그리고 기후의 악조건, 바다의 풍랑과 싸웠지마는
      마지막 그의 기록에는
      나는 평생 나 자신의 욕심과 싸웠다고 말합니다.

신천지를 발견하기 위한 항해의 본래의 목적은 금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컬럼브스는 부자가 되고 지위도 얻고 싶은 욕망에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항해 때에는 지금의 도미니카, 구바, 하이티, 프에로토리코
      땅을 밟을 때마다 금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항해 때부터는 대원들에게 금 찾기를 일절 금하고
    새 땅에 대한 탐험과 연구만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컬럼브스가 이렇게 욕심을 이기고 신천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1502년 스페인 페르디난도 왕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새 땅으로 나를 인도한 것은 수학이나 지도나 어떤 지식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이 일은 이사야서의 남은 자란 말씀이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남은 자 사상,
모든 환난과 혼돈한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남은 자를 거룩한 씨로 보존한다는 남은 자 사상이
    컬럼브스로 하여금 모든 악조건과 싸우며, 나아가 자신의 욕망과도 싸우며
          신앙인으로서 개척자로써의 사명을 잘 감당했던 것입니다.
오늘 스알야숩을 통한 하나님의 시각적 메시지에
    오늘 우리도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은 그 시대의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4절 [  너는 이르기를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 
삼가며 종용하라는 말은
주위 상황만 보고 떨지 말고 마음을 안정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위급한 일이 생기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 보시기에는
    연기 나는 두 부지갱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부저갱이 아시죠?
다 쓰고 나면 아궁이에 던져버리죠?
하나님이 잠시 쓰다가 불 아궁이에 던져버리는
          부지갱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5-7절에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자기들에게 협력하지 않는 아하스 왕을 폐하고
      다브엘의 아들로 왕을 세우려고 하는 도모를 하지마는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8-9절에서
아람도 패망하고,
이스라엘도 65년 내에 나라를 다시 이루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니 왕이 진정 두려워할 자가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아니라 
    저들을 연기 나는 두 부지갱이로 쓰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당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고 명하십니까?


4. 문제에 직면한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10-11절)

11절에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 고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이런 위급한 상황을 당하게 합니까?

고후1:8-9절에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
따라 합시다 - 하나님만 의뢰케 하심이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은
    당시 강대국의 유행을 따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 전에서 형식적으로만 예배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람과 이스라엘을 세워 예루살렘을 포위함으로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도 어려운 문제 당하거든 일단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경의 일화입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 영국이 곤경에 처했을 때 영국 의회가 열렸습니다.
의회가 서로 책임을 물으며 공방을 하지만 대책이 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장이 보니 수상이란 사람이 팔에 얼굴을 묻고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즉석에서 쏘아붙였습니다.
[ 여러분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려는 자리에서 우리의 수상은 졸고 있습니다 ]
그럴 때 처칠이 머리를 들고 하는 말이
[ 너무 앞이 캄캄하여 나는 어떤 말보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때라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소 ]
그렇습니다.
지금 책임 공방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따질 때인가, 기도할 때인가 잘 분별하여
    앞이 캄캄하거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아하스 왕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2절에 아하스 왕 보세요.
[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데
        아하스 왕은 기도하는 것 귀찮다고 합니다.
왜 아하스 왕이 기도하는 것 귀찮다고 합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1) 성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삶의 저력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요단강도 여리고성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불평꺼리, 근심꺼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불평하고 근심할 마음은 있지만 기도할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귀찮게 여기는 것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1880 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온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한 번 걸리기만 하면 처음에는 몸이 나른하면서 기운이 없어지고
  사람이 말라 들어가면서 매사에 의욕을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피를 토하고 죽는 병이었습니다. 소위 결핵이라는 병이었습니다.
지금은 결핵이 치료만 하면 낫는 병이었지마는 그 때는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당시 이 결핵을 뭐라고 불렀는가 하면 < Decline > 이라고 불렀습니다.
기울어지는 병이라는 뜻-이 병에 걸리면 인생이 기울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영적인 Decline 환자들이 전염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의 문제를 안고서도
      신앙생활에 의욕이 없고  기도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것이 귀찮으면 영적으로 기울어지고 맙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의 줄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아하스 왕이 구하지 않겠다는 말은
  왕하16장에 보면 다른 믿는 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아하스 왕은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아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사자를 보내어
[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하며 성전의 금 은 보물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며 도움을 청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 아람을 물리치지만
결국은 앗수르 왕 디글락 빌레셋이 도리어 군박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하스 왕이 의지하던 앗수르 왕은
      나중에 자기 아들 히스기야에게 큰 고통을 주게 됩니다.

나의 삶에 어려움 닥칠 때 신앙적인 방법을 강구하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우선 적당하게 뇌물 좀 서면 될 것 같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도와주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도모가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된다는 것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귀찮게 여깁니다.


5. 왕의 불신앙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하며
      임마누엘 신앙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13-14절)

그럴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하는 말이 13절에
[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 고 책망합니다.
이렇게 신앙적인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하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계획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절호의 은혜를 거절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 주실 때
우리는 그 기회를 붙들고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아하스 왕은 이렇게 불신앙적으로 행동했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약속하십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14절에 [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아하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징조를 주시며 자신의 뜻과 경륜을 이루어 가십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이냐? 좋다. 그러면 너가 구하지 않아도
  내가 한 가지 징조를 주마. 봐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연합군이
      유다를 괴롭게 하지 못할 것에 대한 징표로서
      동정녀 탄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지금 쳐 들어오고 있는 적의 세력 앞에서
    아하스와 백성들을 지켜주실 징조로서 이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징조도 이런 징조가 어디 있습니까?
유다를 지켜 주실 것에 대한 징조라면 천재지변을 일으켜 연합군의 침공을 막던가,
  그들의 눈이 멀게 하여 공격을 중단시키던가 하는 것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엉뚱하게도 처녀가 아들을 낳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장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8백 년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8백년이 지나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도 징조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아하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 7장의 사건이 갖고 있는
    의미심장한 뜻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동정녀 탄생을 징조로 주셨을까?
아하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국면은
유다가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에 망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한 유다의 힘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막을 방법도, 힘도, 해결책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못 믿는 아하스에게
    승리할 것의 증표로서 “동정녀 탄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주시는 메세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갖는 것과 네가 연합군과 싸워 이기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어려워 보이냐?
      어느 것이 더 불가능해 보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느 것이 더 어려워 보입니까?
어느 것이 더 불가능해 보이십니까?
예, 처녀가 아이를 갖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훨씬 불가능합니다.
전쟁에서는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강하다 할지라도
  작전을 잘 짜거나, 기습 공격을 하면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남자도 없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여 이룰 수 없는 일을
  내가,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 불가능한 일도 내가 하는데
      싸움에서 너를 이기게 못해 주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었던 아하스를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8백 년 후에 일어날 일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일어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시간에 제한을 받고 살지만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8백 년 후의 일도 현재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8백 년 후에 있을 동정녀 탄생이 승리의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이 갖고 있는 역사적 배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누려야 할 메세지가 들어 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위로와 확신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에게 둘러싸여
      무서워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나약한 아하스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믿음도 연약하여 아하스 왕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아하스에게 주셨던 동정녀 탄생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조국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 후보들마다 자기가 대통령 되면 경제를 살린다고 장담합니다만
    역대 대통령 치고 경제 살린다고 장담안한 대통령 누가 있습니까?
사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또 가정의 어려움, 개인의 어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러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면 용기가 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동정녀 탄생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동정녀 탄생을 기념해야 할 이유입니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처녀의 몸에서 아이를 낳게 하시는 하나님은
승리할 수 있는 조건도, 가능성도 없는 상황 속에 있는 우리를
  얼마든지 지켜주신다는 약속에 믿음과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에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위로가 있는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이런 소망이 있는 절기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 복된 메시지가 온 세상에 전해지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금년에도 성탄을 맞이하시는 성도님의 가정에
이러한 위로와 축복과 소망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징조, 임마누엘 신앙에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괜찮습니다. 형통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유명한 책을 썼던 성자 <토마스 아 켐피스>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 아 켐피스야, 네가 너무도 나를 사랑하고 내 뜻을 받들어 살려고 하니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기 원하노라 네 소원을 말하라` 
`주님,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니다. 내가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으니 말하라` 
`주님 함께 계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소원이 없습니다.`
`아니다. 말하라` 세 번이나 물어봐도
  여전히 토마스 아 켐피스는
`더 이상 소원이 없사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함께 하심에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네 번째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 켐피스야, 너는 세상에 아무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장 좋은 것을 가졌느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임마누엘 신앙이
    신약 교회 성도에게 있어서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적 의미입니다.
마28:19-20절
[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고 세례 주고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임마누엘 신앙에 눈이 뜨여지면
      선교에 눈이 뜨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 아무 교회 아무 교인이나 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가
    선교에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위대한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은
  말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학위 수여식에 앞선 예배시간에 리빙스턴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 어떻게 아프리카 밀림에서 더위와 맹수와 그리고 무지한 토인들의 공격
  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 고 질문했을 때
사실 그의 오른 팔은 사자의 공격으로 불구가 되어 있었지마는 
    리빙스턴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 내게 있어 비결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영원한 진리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 결론 >

우리가 문제를 당할 때 떨며 두려워하고 있을 일인지
하나님께 기도해야할 일인지 잘 분별하여
      아하스 같이 불신앙적으로 행하다가 넘어지지 말고
      히스기야 같이 기도로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리는 문제 앞에서
    한 징조를 구해야 합니다.
그 한 징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신앙은 선교적 차원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선교하는 교회와 성도와 기업에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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