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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사 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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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성  경 : 사21 : 11 -12절           
제  목 :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강한 회귀본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려는 경향이 강한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교적 중앙으로 파고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서양 사람들은 나가는 문을 Exit 라고 합니다. 단순히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출입구라고 합니다.
    즉 나가는 문이요 다시 돌아오는 문이기도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라고 하여 올라가는 기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승강기라고 하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기계를 뜻하고 있습니다.
문도 보세요, 미닫이, 빼닫이라 하지요
        영어로 밀다, 뺀다는 뜻밖에 없지만
우리는 열었다 닫았다, 뺐다가 넣었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합니다.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단어들이 시사하듯이 우리는 강한 회귀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귀의식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종교심이 강한 것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떠나면 불편하고 돌아가야 편안합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만물의 이치요, 인생이요 신앙의 삶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7년 마지막 송년주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예배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말씀은 13장부터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주변국에 대한 심판의 예고 중 일부인데
바벨론에 이은 에돔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바벨론과 에돔은
이스라엘을 혹독하게 괴롭혔던 주변 국가 중 대표적인 나라들로서
      하나님 백성들을 영적으로 괴롭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분문에는
당시 백성들의 다급한 질문에 대한 파수꾼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파수꾼이 주는 영적 의미를 살펴봄으로
  인생 항해가 그렇게만 순탄하지만 않았던 한해의 송년의 시점에서
우리의 위치를 하나님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조명해 보고
새해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주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를 생각해 보면


1. 13장부터 계속되어지는 주변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참조/13장-22장)

먼저 우리는 이사야 13장에서부터 계속되어지는
바벨론 앗수르 불레셋 모압구스 애굽 그리고 에돔 아바비아 등
    주변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는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이실 뿐만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세상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그 역사를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하바국서를 보면
하바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항의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나님의 선민이 이방 앗수르에게 짓밟힐 수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 고 하시며
합2:4절 [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고 합니다.
그 믿음 즉 하나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마다 일어나는 사건을 두고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몸부림칠 때가 있지마는
  시간이 지나가면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까지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쳄프스 -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글에 보면
제자생활의 필수 조건은 당황의 단련이라고 합니다.
예수 금방 믿고 나면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고 신나게 예수님 따라갑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주님의 일국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정말 당황스러운 국면을 맞이할 때가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당황스러울수록 당황의 어두움이 끝날 때가지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혼돈한 세상인 것 같지마는 분명한 것은
겔1:에 보면 황옥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바퀴가 돌아가는데
황옥 같은 섭리의 바퀴는 너무 큰 바다같이 크신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향으로 이끌고 가시기 때문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은혜 받는 일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받으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고
      삶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 마지막이 되면 숙연해 진다고 합니다.
왜? 마지막 시점에는 내가 할 일이 없어요.
마지막 시점에 내게 가장 귀중한 일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의 다음을 맡기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송년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와 가정과 개인의 삶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변 국가 중에 두마에 관한 경고라고 합니다.


2. ‘두마에 관한 경고라’ 는 말씀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11절)

11절 [ 두마에 관한 경고라 ]
두마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즉 두마가 어떤 나라인가?
    아주 오래된 70인 역에서는 두마를 이두메라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두메가 헬라에서는 에돔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두마를 에돔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마를 에돔으로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본문 11절 초두에 "세일에서 나를 부르며..." 라고 한데 있습니다.
에돔의 여러 도시들은 세일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또 세일산의 세일은 털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에돔 지방의 산의 이름을 세일이라고 한 것은
    털이 많은 에서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마는 에돔 족속을 가리키는 말로서
    <침묵, 쓸쓸함>이란 뜻으로 에돔의 미래의 운명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에돔 족속은 오바댜1:10-이하에 보면
에돔은 에서의 후예로서 즉 이스라엘과 형제 나라이면서도
유다의 패망을 방관하며 대적을 도와 유다의 패망을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을 심판하여
          입도 벙긋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떠난 자의 침묵과 고통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에돔 속을 왜 두마라고 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에돔족이 아무 소리도 못하는 침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겪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에돔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의 후손입니다.
그날 이후로 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반면 에서는 인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 족속은
    아무 소리도 할 수 없는 침묵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바로 입도 벙긋할 수 없는 외로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기쁨도 찬양도 없습니다.
웨슬리는 성도가 감사의 찬양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영성의 최고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것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 자체가 멋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마지막 시점에 찬양과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부르짖음이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셔야 합니다.


3. 사람들이 두 번이나 파수꾼에게 던지는 질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11절) 

11절 [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
지금 에돔의 사람들이 파숫군에게 밤을 묻고 있습니다.
지금 저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밤중에 처해 있습니다.
아침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묻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절망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에돔 족속은 이 절망의 밤에 처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에돔 족속이 깊은 밤에 빠져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선지자를 찾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질문을 받은 사람은 예언자 또는 선지자입니다.
[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 라고 하였습니다.
즉 고통 가운데 있었으니 선지자를 찾은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세일에는 물을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점쟁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술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마다하고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별 문제 없을 때는 지식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는 경험에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 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심각한 질문에 저들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고통 가운데서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로마로 끌려가는 바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끌려갈 때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때는 금식하는 가을이 지났으므로 풍랑이 이는 동절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울이 지나고 가자고 했습니다.
무리하게 운항하였다가는 배와 화물과 생명에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죄수들을 인솔하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바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경험 많은 선장의 말이 때로는 유익합니다. 경험도 소중합니다.
    경영에 귀재인 선주의 생각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문제를 풀어나가려면 경험적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저들의 말을 더 믿고 바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배가 잘 나갔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왔습니다.
백부장과 선장은 자기들이 바른 선택을 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
배는 어쩔 수 없이 풍랑에 떠밀러 갔습니다.
살기 위하여 모든 짐과 기구를 다 내던졌습니다.
    저들이 의지하던 것을 다 버렸습니다.
저들은 그제야 바울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늦었지만 그래도 바울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늦게라도 바울의 말을 듣게 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이 복된 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바울의 말을 따라 생명을 건졌습니다.
지식도 중요하고 경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전문가 찾아가고 선배 찾아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 앞에서는
선지자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복된 길입니다.

본문에서 선지자를 파수꾼이라 부릅니다.
성경에 파숫군이란 말이 2가지가 나옵니다.
6절에 보면 파숫군이 나오는데 이 때는 <메차페>라 해서       
    적의 침략에서 성을 방어하는 파수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쇼메르>라 해서 밤에 깨어 성을 지키는 파수꾼을 말합니다. 
메차페는 보초 군인이라면 쇼메르는 치안 경찰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바로 영적인 밤을 깨우는 자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파수꾼은 영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밤을 깨우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밤이 왔다고 같이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일교회 성도들아! 이 세상의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이 밤은 영적인 밤, 경제의 밤,
      때로는 개인적으로 환난의 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한 해 지루한 밤을 당한 교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이 너무 절망적으로 보입니까?
경기가 너무 침체되어 경제의 밤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환난의 밤을 당했습니까?
하나님 백성은 밤을 만날지라도 답변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밤을 당한 사람들을 깨워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해를 살아오면서 밤이 앞으로도 계속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는 이 세상을 향한 영적인 파수꾼으로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합니다.
사62:6절에
[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
[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게 하라 ]
즉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칭송하도록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을 부등켜 앉고 기도할 때
      세상에 희망을 던져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밤을 부둥켜 앉고 기도할 때 분명히 대답이 주어질 줄 믿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밤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희망이 보일 줄 믿습니다.

파숫군은 아침을 내어다 보고 아침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오늘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밤을 맞이했다고 같이 헤매어서는 안 됩니다.
되레 밤중에서도 아침을 바라보고
          아침이 올 것을 예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이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서
    밤 같은 세상에 아침이 온다고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났을 때 일입니다.
영국 런던이 독일의 첫 번째 공습을 받았을 때
    국민들은 밤새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런던에 있는 신문기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때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 영국 언론은 예리한 비판력을 가진 언론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비판은 나중에 하고 우리는 희망을 안겨다 주는 기사를 씁시다 ]
그들은 이 일에 합의했습니다.
저들은 하나같이 군대에 출정하는 젊은이들의 늠름한 모습을 실었습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는 부모들이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희망찬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실었습니다.
영국 전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믿기 시작했고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아침이 온다고 외칠 수 있는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묻는 말에 파수꾼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 파수꾼의 대답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12절 상반)

사람들이 선지자를 찾아와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라고 물었을 때
선지자는 파수꾼으로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고 대답했습니다.
“ 참고 기다리라 아침이 곧 온다 ” 이렇게 말하면 될 건데
“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 ” 또 밤 이야기 합니다.
이 대답은 참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 밤이 오리니 아침도 오리라 ] 이렇게 말하면 시30:5절 말씀같이
[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
명쾌하게 알아듣겠는데
반대로 [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 ] 고 하니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요.
그러나 이 답변 속에 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침이 오면 또 다시 밤이 온다는 것은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뒤에 나오는 것
[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 ] 라는 말씀과 연결시킬 때
놀라운 메세지가 선포됩니다.

선지자가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고 답변한 것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지
      그런데 그 아침이 어떻게 되었단 말이야 !
              아침이 오면 또 밤도 오는 건데,
물론 기다리고 있노라면 아침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밤이 오고야 맙니다.
막연한 기다림은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에돔인 두마는
          이스라엘과 함께 앗수르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두마가 언제 아침이 오느냐고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바벨론을 일으키시어 앗수르를 멸망시키셨습니다.
바벨론이 일어나므로 인해서 핍박받던 이들은 자유를 얻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그들에게 더 무서운 핍박을 가했습니다.
밤이 다시 온 것입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또 애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참된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파사를 일으키시어 바벨론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밤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파사의 고레스 왕을 들어 서 이스라엘에는 아침이 왔습니다.
이들은 해방의 노래를 부르고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바벨론은 파사에 망하고
      또한 파사는 헬라에 망했습니다.
헬라 시대에 이스라엘은 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헬라는 로마에 망합니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아니하는 한 악순환이 계속 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빛이 비췰 때 비로소 밤이 사라지게 됩니다.

파수꾼은 대답합니다.


5. 파수꾼의 대답 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12절 하반)

[ 파수꾼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찌니라 ]

선지자는 밤을 묻는 사람들에게
[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 ] 고 하면서
이어서 [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오라 ] 고 합니다.
아침이 온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아침이 오면 또 밤도 올건데,
그것이 너희에게 해 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 물으려거든 물으라 ] 진정 답을 듣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 
즉 돌아와야 궁극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아침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다림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어지는 밤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55:6-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리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36년간 일제의 압박으로 고통당하다가 해방이 되었으나
  불과 5년 만에 동족상잔의 처절한 6.25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36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기다렸습니까?
그리고 기다리던 아침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큰 기쁨이 채 성숙하기도 전에
    또다시 밤이 왔으니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막연한 기다림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음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막연하게 아침을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다림, 그것은 신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세계의 여론조사에서
    가장 강하고 멋있는 남자들이 그리스 남성들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해변에서 그리스 남자들을 보니 다 찰톤 헤스톤 같고
                    다 헤라클레스 후예들 같아요.
그렇게 멋있는 남자들이 된 배경에는
그리스 국민의 국가적으로 내려오는 전통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가 아테네 도시 국가일 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켰습니다.
      신체적 단련을 철저하게 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헬스클럽에서 소속되어 훈련을 받았습니다.
딤전4:8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하지요
[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유익이 있느니라 ]
바울도 인정할 만큼 헬라인들은 육체의 연습에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 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 나는 이 조국을 내가 물려받은 것보다 작게 만들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현재보다 더 크고 훌륭하게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
        는 국가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적 훈련도 헬레니즘을 붙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신앙훈련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
그럴 때 세계에서 빼어난 민족 되고 우뚝 솟은 봉우리 될 줄 믿습니다.

새천년이라고 해서 반드시 희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밤이 올 것을 내어다 보고 대비하는 자에게는 희망의 날을 맞이할 것이고
여전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편안한 것만 꿈꾸는 자에게는
    자신의 부고가 적혀있는 다른 밤을 만난다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결 론 >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교회는 이 시대의 파숫군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이 밤같은 세상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밤을 맞이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다가오는 아침을 바라보고 희망을 갖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침이 온다고 해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정신차리지 못하면 더 혹독한 밤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것 꼭 명심하시고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우리는 신앙인의 회귀본능을 발휘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송년주일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석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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