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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베들레헴에 나신 왕 (눅 2:1-7,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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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 나신 왕 (눅 2:1-7, 마 2:1-12)


구주 성탄의 기쁨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과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이틀 앞둔 오늘 주일 아침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소개하고 있는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영국의 대형 상점 경영주들은 성탄절을 이틀 앞둔 오늘 23일이 소비자들의 선물 구입이 가장 많은 대목으로 여겨 기대가 큽니다.  그런데 금년 23일은 주일(일요일)과 겹쳐 장사에 타격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정부에 상점 영업시간을 연장 요청을 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본래 영국은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무조건 영업을 할 수 없고, 일요일 상거래 활동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94년부터 일요일 상거래법을 제정하면서 일요일에도 오전 10시부터 오후6시까지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허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요일이 성탄절 대목과 겹치면서 속이 탄 대형 상점주들은 이 일요일 제한 영업시간을 무조건적으로 연장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하면서 다양한 로비 활동을 벌였는데 이에 대해 교회와 노동계에서는 이 요청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이만큼 영국의 성탄절은 상업주의와 물질주의 이벤트로 그 본래의 정신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만 영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동일하고 세계 많은 나라들의 공통점입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명절로 지켜왔는지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1세기 초대교회나 2세기에는 성탄절을 지킨 흔적이 없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비로소 4세기경부터 교회가 12월25일을 성탄절로 정하여 지키게 되었다고 추측합니다.  그것도 12월25일이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아닙니다.  로마 시대에 태양신을 숭배하던 이교도들의 태양신 탄생 축제일을 기독교의 성탄절로 바꾸어 지키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밤이 가장 길다가 다시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태양의 기운이 회복되는 동지를 태양신의 탄생 축제로 벌였는데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로 태양신 대신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변경하였다는 학자들의 증거를 따릅니다.

성탄절을 X-mas라고 부릅니다.  잘못하면 X(엑스)-mas 라고 읽게 되는 이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본래 헬라어 Xριστο의 첫 글자 X(Chi)와 ‘예배’라는 뜻의 라틴어 Mass가 합하여 된 말로 ‘그리스도의 예배’(Mass of Christ)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본래 성탄절은 로마 시대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예배 중심으로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서양의 국가들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이 날이 일년 중 가장 큰 명절로 지켜졌고 점차 예배보다는 축제의 성격으로 변하였습니다.  거기에 세속화와 상업화의 가세로 성탄절은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흥청거리는 축제의 날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절의 참 정신과 뜻을 오해하고 이날을 먹고 마시며 흥청대는 축제의 날로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엑스(X)마스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수학에서 X란 알 수 없는 것을 의미하듯, 성탄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엑스 마스’로 알고 지내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앞둔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교우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이 무의미한 X(엑스)-마스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이 땅에 탄생하심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 날을 정확하게 정하지 않았지만 오늘 읽은 복음서의 두 기록을 보면 대략 그 시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을 보면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는데 수리아 총독 구레뇨가 팔레스틴 지역에서 첫 번째 호적을 실시한 시기에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갔다가 아기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장을 보면 헤롯이 왕으로 있을 때 동방으로부터 별을 보고 찾아온 박사들이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를 경배하러 왔다고 한 말을 근거로 그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두 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국을 다스리고 있을 때, 로마의 황제가 팔레스틴 지역을 관리하도록 세운 분봉 왕 헤롯 대제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BC 4년경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의 강력한 제왕들의 통치 아래 가장 가난하고 힘 없는 가정의 어린 아기로 태어나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들은 각자 자기 고향에서 호적 등록을 하라고 내린 호구조사 명령을 따라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간 목수 요셉의 큰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에 아구스도라 기록된 아우구스투스는 평화와 번영의 로마,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이룩하며 로마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로서 최초로 황제 칭호를 받았던 권력자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받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의 정체에 대하여 심히 궁금해 하고 두려워하였던 헤롯 왕은 헤롯의 가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왕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로마에 절대 충성했던 헤롯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하여 엄청난 재물을 들여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새롭게 시작했던 사람입니다.  로마를 모방하여 수로를 건설하고 도시화 작업과 극장들을 세움으로 예루살렘을 최고의 도시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유대의 영토 확장 등 다른 어떤 왕들보다 많은 업적을 남겼던 왕이었기에 헤롯의 가문에서 오직 그만 대제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이스라엘의 서민들이나 가난한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과 노역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시대에 권력자들에게 억눌리고 가난에 지친 백성들, 고난의 아픔을 끌어안고 구원자가 오시기만을 기다리는 백성들이 살고 있던 베들레헴 땅으로 오셨습니다.  나사렛에 살던 목수 요셉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명령을 따라 만삭이 되어 몸이 무거운 마리아를 데리고 겨우겨우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왔다가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탄생 이전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는 메시야의 오심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에서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 오실 것까지 언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가 호적령을 내림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호적 명령이 없었다면 나사렛 사람 요셉이 구태여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먼 길을 여행하여 베들레헴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고,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을 찌를듯한 절대 권력자 로마 황제의 명에 의해 요셉이 호적을 하러 간 것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도록 하시기 위해 황제 아구스도가 그와 같은 명을 내리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 황제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결국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만 왕의 왕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데 도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대단한 권력자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나 헤롯 대제는 물론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아기 예수의 출생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박사들만이 유대인의 왕이 탄생함을 알고 찾아와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외곽 들판에서 양을 지키던 몇 명의 목자들이 천사들이 전하여 준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와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아기의 출생이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위대한 왕의 탄생임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을 기대합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제발 새 시대를 열어줄 인물이 등장하기를 고대합니다.  로마에게 시달리고 유대 총독과 권력자들에게 시달리던 유대 백성들은 언제나 메시야가 오시려나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나라가 지난 주간에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였습니다.  비록 투표 참여율은 선거 역사상 가장 저조하였지만 당선인의 득표율은 차점자와 압도적 차이로 당선하여 정권을 갈아치우는 기회를 거머쥐었습니다.  투표 결과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상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정권 재창출을 기대했던 여당과 그 지지자들은 이번 패배로 실권하게 되어 큰 실망을 하였지만, 현 정권에 대하여 실망하고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새로운 정권에 커다란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경제가 회복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무지개 빛 꿈으로 가슴이 부푼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꿈처럼 그렇게 될는지는 내년에 시작해보아야 알 일입니다만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만이 복지국가로 가는 지름길이고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수 많은 의혹과 도덕적인 결함을 애써 감추고 오직 잘 살아보아야겠다는 일념만으로 돌진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부조리와 부정을 생산하는 과오가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 받아 정직과 공의를 실천하며 살아야 할 교회와 기독교인들로서는 경제를 살리는 기술을 가진 새로운 대통령을 뽑은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이라고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정당화 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오직 새롭게 당선된 리더가 국민들과 국가의 앞날을 위하여 하나님과 국민들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겸손하게 섬기며 봉사하는 일군이 되도록 위하여 기도하고 함께 힘을 모아야 진정 우리 나라의 앞날에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2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새 아기가 출생함으로 새로운 세계의 역사가 열렸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작은 도시였고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고향 동네이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생명의 떡으로 주시기 위하여 떡집에서 탄생하셨으며, 죄와 죽음과 질병과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참 평화와 기쁨으로 다스리는 평화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세상의 평화와 행복은 팍스 로마나를 부르짖던 절대 권력자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로마를 등에 업고 유대 땅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헤롯 대제에 의해 실현되지도 않았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평화의 왕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한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는 자로 오셨고 목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를 잉태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렸던 마리아의 찬송에서 예수님이 새로운 세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목적, 성탄절의 참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1장46절부터 56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송을 함께 찾아 읽어봅시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이 찬양 중에 51절에서 53절의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바로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며 무력하고 허망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인간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것을 의지하는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흩으신다는 말은 분산시키고 무너뜨린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패한 인간의 권력과 지혜와 재물을 의지하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권력과 지혜와 재물을 흩으심으로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진정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위에서 내리치시며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눌려 신음하고 울부짖는 비천한 자들을 높이십니다.  세상은 권력을 추구하며 권력자들에게 붙어 아부하고 높여주고 높아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힘이 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짓밟으려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죄악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만한 권력을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다스리심입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존귀함을 받고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들을 배불리시며 거짓과 술수로 부를 탐하는 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황제 아구스도나 헤롯 대제는 권력 구조를 바꾸고 도시를 바꾸며 영토를 확장하는 변화를 주었지만 사람을 새롭게 바꾸는 일은 할 수 없던 인간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심성을 그 뿌리부터 바꾸는 일은 오직 베들레헴에 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지금 어떤 왕을 기다리십니까?  어떤 왕이 나의 삶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시기를 원하십니까?  친히 낮아져 주시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왕으로 모시고 사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참 의미를 알아 어린 아기로 오신 예수를 기쁨으로 환영하고 다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는 사람의 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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