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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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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나시니라 (마 1:1-16)

I. 마태복음 연구를 시작하며

새해가 되면 여러 가지 결심을 합니다. 그 가운데 새해부터 성경을 읽어야지 창세기를 펼칩니다. 창세기 잘 읽고 출애굽기까지는 무사히 통과합니다. 레위기에 가서 위기가 옵니다. 래 위기 위기가 왔다고 레위기입니다. 구약은 안되겠다 신약부터 읽자. 신약 마태복음 1장을 펼치다가 포기해 버립니다. 큰 장벽에 부딪히지요. 낳고 낳고 산부인과 기록부도 아니고 재미가 없습니다. 이상한 이름들, 혀가 돌아가야 읽지요.

성경통독의 장벽, 좁은문 통과하지 않으면 매년 창세기 출애굽기 읽고 끝나고 1년을 보냅니다. 그러나 레위기 마태 1장은 그렇게 시시한 성경이 아닙니다. 유대인 크리스챤들이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읽는 성경이 레위기와 마태복음 1장입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 최고의 말씀이 율법서, 모세 오경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섯 손가락으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엄지 성경의 시작입니다. 은혜와 복음의 시작입니다. 요셉은 "입관하니라"(창50:26) 입관으로 끝이 나지만 그 입관은 새로운 서막을 열게 됩니다. 출애굽기라는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되는 것이지요.
출애굽기-새로운 구원의 시작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고 모세는 당당히 얘기합니다.
레위기-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제사하는가 예배하는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출애굽한 백성, 예배하는 백성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예배의 중심이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명기입니다.

손가락 다섯의 중심을 레위기 키가 가장 큽니다. 레위기를 정점으로 해서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감싸고 있고 창세기와 신명기가 함께 감싸고 있는 것. 모세 오경 가운데서도 민수기는 정상,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수많은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 이름이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니라 마지막 16절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를 향하여 집중되어 있습니다. 족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속에서 자격없는 내이름을 보게 됩니다. 우려도 우려도 진액이 빠져나올만큼 마태복음 1장에는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좀더 자세하게 강해를 하면 마태복음 1장만 가지고도 1년 이상 강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구약 창세기 1장 1절만큼이나 장엄하고도 대단히 중요한 성경입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지요.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3x9=27 합이 66권입니다. 66권 가운데 신약의 첫 4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권의 복음에만 복음서라고 붙어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신구약 어디에나 예수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피묻은 복음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고 우리에게 많은 행적을 남기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당해야 될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기록한 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곳에만 있습니다. 이를 복음서라 이름합니다.

그 중 신약 첫 번째 책으로 배정받은 책으로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했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라 하는데 마태복음 어디에서 제자가 마태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마태가 아니라는 기록도 없습니다. 마태가 저자 아니라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그런 싸움은 신학자들에게 맡겨두기로 하십시다.

마태의 처음 이름은 레위입니다. 구약 창세기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는 사랑받지 못하던 여인 레아가 셋째 아들을 낳고 "연합" 이제 남편의 마음이 내게 오겠지 하고 지은 이름입니다. 그 후에 레위가 마태로 이름이 바뀌어집니다. 마태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The gift of God)"입니다.

공관복음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똑같다 그래서 공관복음이라 하는데 공관복음에 보면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는 사건이 퍽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사건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기이하게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마태는 가버나움이란 동네에서 세리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입니다. 가버나움이 어떤 마을입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아 가버나움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고 저주하신 마을이 가버나움입니다. 바로 이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던 한 세리가 좋은 직장과 넉넉한 수입을 포기하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공히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지요.

12사도의 이름을 소개하는 곳이 마태복음(10:3) 마가복음(3:18) 누가복음(6:15) 공관복음과 사도행전(1:13)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태의 이름을 기록할 때에 다른 모든 곳에서는 그냥 "마태" 그렇게 기록하고 남깁니다. 그런데 유독 마태복음에서는 "세리 마태"라고 자기가 자기 이름을 기록하면서 세리였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밝히고 있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손가락질 당하던 한 세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여기 감사와 감격이 묻어있고 당당한 선언이 묻어있는 기록입니다.


II. 마태복음 보는 눈(안경)

마태복음 스물여덟장 전체를 해석하는 핵심 구절, 주제 성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을 읽고 해석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고 안경이 되기도 합니다. 이 안경을 얻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면 매 장마다 가슴에 느껴오는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 성경이 읽혀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을 해석하는 안경은 마지막 세 구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18절-20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핵심되는 주동사가 하나 나옵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형 주동사입니다. 다른 동사는 보조동사입니다. 누구를 제자로 삼으라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으로 마태복음은 막을 내립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결론이요 열쇠요 안경입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이 뒤에서부터 안경을 얻어 서론으로 마태복음 1장으로 돌아와서 읽기 시작해야 마태복음의 복음이 보인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성경을 연구하면서 바로 이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함께 성경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훈련하고 끝나는 얘기가 아닙니다. 공부할 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이 삶의 목적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내 자녀들에게 내가 멘토가 되어서 그들을 제자로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비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III.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마태복음 1장 1절을 펼쳤더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아브라함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의 계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설명한 첫 단초는 구약성경에서 수없이 약속해온 바로 그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구약 약속의 성취로 이땅에 오신 메시야가 예수라는 겁니다.

약속과 성취라는 이 도식을 통해서 마태가 하고 싶은 일차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시고 선택하신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믿어지지 않으시는 분들은 성경을 읽어가다가 어떤 약속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약속과 성취만 연구하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시고 선택하신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절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가문이 훌륭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숭배하던 아브라함 가문을 불러서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셨듯이 어떤 사람들은 불교가문에서, 어떤 사람들은 유교가문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상숭배 잡신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 상속자,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을 선택하시고 쓰신 것은 그가 죄도 없고 훌륭해서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약점이 있고 죄가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며 놀라운 선언으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보다 크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약점보다 크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번 선택하면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선언으로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안에는 무한한 하나님 사랑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선택했다. 너는 구원받은 나의 자녀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을 때"에 엑센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메시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 했을까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우리가 자랑하는 왕국 다윗의 후손,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바로 그 핏줄을 타고 예수님이 오셨다고 이해했습니다. 강조점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크리스챤들에게 또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하고 다윗의 자손이 영원히 이른다는 말씀의 자손은 유대인의 번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자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믿었습니다. 온세상에 복이 편만해진다는 얘기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이 온 땅에 가득히 흘러 넘치고 편만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너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 너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윗의 왕족이 될 수 있다. 너도 하나님 나라의 공주요 너도 왕자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엑센트가 자손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읽었습니다.

창세기 13장 15절 16절에서 복이 네 자손을 통해 영원히 이르고 네 자손을 통해 무수히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손은 단순히 이삭, 야곱 12지파, 이스라엘을 가르키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자손"이란 말은 구약성경에서 복수로 되어 있지 않고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기가막힌 해석이 나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 너희 자랑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니라. 마태는 이방인 - 모든 민족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 즉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니라. 여기 자손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의 구세주이니라. 이 복음이 온 땅에 가득할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 바로 그 복음은 너의 복음이다. 너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가득히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란 이 한마디를 통해 마태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 싶었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마태는 오늘 우리에게도 1장 1절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는 바로 당신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는 바로 당신의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은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복덩어리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바로 당신의 족보입니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족보를 여기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IV. 모든 죄인을 구원하고 싶은 하나님의 열심

그렇습니다. 모든 족속, 모든 사람, 모든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히 이 족보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 열심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얻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족보 안에 마리아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여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특이한 기록입니다. 당시의 통념으로 볼 때 이건 파격입니다. 당시 여인들은 아무런 법률적인 권리가 없었습니다. 인격이라기 보다 남자에게 속한 부속품으로 간주되어졌습니다. 더더구나 여기 등장하는 여인들은 마리아를 제외하고 나면 순결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상한 경력을 가진 여인들이었습니다.

마태가 이 사실을 모르고 이런 여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했을까요? 구약에 빛나는 신앙과 아름다운 성품과 인격을 가졌던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무지해서 무식해서 이 흠많은 여인들, 이상항 경력을 가진 여인들을 족보에 끼어 넣었을까요? 아닙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와의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가나안 창녀로서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준 공로로 구원을 얻습니다. 룻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이 간음죄를 범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습니다.

이 흠 많은 여인들이 없었으면 구원 족보는 단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이 가문이 예수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아브라함의 가문이 얼마나 훌륭한가? 여기에 시선을 집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문도 우리의 가문과 똑같은 가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약점 많고 흠 많은 가문이었지만 하나님이 불러주시면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복의 근원 가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계 모든 열방에게 복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 족보를 통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예수 안에서는 선민과 죄인의 장벽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의 죄와 허물 약점과 실수가 예수 안에선 모두 허물어지고 용서받는다는 복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과거를 모두 십자가 밑에 묻어버리세요.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하나님 나라 족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마태는 지금 이 사실을 확실히 해 놓고 다음 진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네 명의 여인들은 신분적으로 출생적으로 약점이 많은 여인들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분명했습니다.

다말 -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구원의 씨가 유다 지파를 통해 흘러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이 약속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다말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 몸을 더럽히면서까지 이 약속의 대를 잇기를 원했습니다.

라합 -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하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타락한 시대에서 하나님의 구원공동체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붉은 줄 아래 들어가 구원받았습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입니다. 이것 포기하라면 죽을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그토록 처절한 회개를 통해 약속의 아들 솔로몬을 얻는 기쁨을 얻습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믿어야 만이 신앙고백이 분명해야지 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분명한 신앙고백. 예수님이 나의 주요 구세주라는 확실한 신앙고백. 나는 죽어도 구원 공동체, 교회를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구원이 만민에게 열려 있지만 이방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을 구원족보에 넣지는 않습니다. 구원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지는 않습니다.


V.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

오늘 본문에 낳고 낳고 - 낳았다는 말이 40번쯤 나옵니다. 구약의 족보는 언제나 죽고 죽고 - 또 죽었다는 족보입니다. 예수 이전엔 인간 모두는 죽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낳고 낳고 생명으로 끝이 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낳고 낳는 일입니다. 생명을 낳는 일입니다. 영적인 자녀를 낳는 일입니다.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목적이요, 이것이 복음이 우리 가운데 전해지는 목적이요, 온 세상에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인생들의 마지막 비전이요 마지막 인생의 꿈이요 마지막 삶의 비전이라는 것을 마태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낳고 낳다가 마지막에 누구를 낳는 것으로 끝이 납니까?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 한 말씀속에 마태복음 족보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모순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 낳고 낳는 얘기를 써내려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결론도 이 흐름대로 요셉이 예수를 낳으니라. 이렇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 얘기하기 위해서 40명이 낳고 낳고 낳고 낳고... 요셉이 예수를 낳으니라. 이래야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참으로 이상하게 끝이 납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 엄밀하게 얘기하면 아브라함과 다윗 가문 남자들의 족보와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들 족보가 예수그리스도를 낳은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마지막에 와서 주어 동사 토씨 하나를 놓쳐버리고 나면 마태복음의 모든 보물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 지금까지는 주어가 전부 남자들로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자식을 낳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어가 달라집니다. 태어나는 예수가 주어로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낳았다고도 아닙니다. 동사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모두 낳고 낳고 낳고 나다가 마지막으로 나시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가 나시니라. 주어가 달라지고 동사가 달라집니다. 여기에 기가막힌 복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예수의 조상이 아닙니다. 이 족보는 예수의 출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한가지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을 했기 때문에 이 가문으로 입양이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정확한 기록입니까?

여기에 성탄절 만민을 위한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피를 타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만민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땅에 태어나셨지만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의 메시야가 되십니다.

예수는 아버지가 있어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다면 하나님 한분 아버지가 계실 뿐이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없이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이지 자식이 스스로 태어나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인류역사에 단 한번 예수님은 부모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 스스로 태어나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란 뜻이지요.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예수는 우리의 왕으로 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노엘은 성탄입니다.
성탄 성탄 성탄 성탄 그리스도 예수 나셨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예수 이전의 인생과 예수 이후의 인생으로 나누어 집니다. 그들의 운명이 나누어 집니다. 예수 이전 지옥의 운명과 예수 이후 천국의 백성으로 나누어 집니다. 예수님이 나심으로 역사는 두 동강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 이전의 역사(BC)와 예수 이후(AD)의 역사로 역사는 나누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나심으로 이 인류 역사는 이 지구의 역사는 온 인류의 역사는 역사가 된 것입니다. His Story.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안에는 예수님의 제자로 성품이 바뀌어진 사람. 예수님의 제자로 비전이 바뀌어진 사람. 예수님의 성품으로 그 가치가 바뀌어진 사람. 이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섬기고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으며 악을 물리치고 당당히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대로 이끌어 왔는가? His Story. 예수님의 이야기로 온 땅은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 가정에 오셨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다. 성탄절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이 민족 가운데 이 백성 가운데 예수가 나셨습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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