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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하라 내 백성을! (사 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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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라 내 백성을! (사 40:1~5)

사람은 누구나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시인 김재진의 ‘너를 만나고 싶다’라는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중략)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어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런 사람을 결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시인보다 더 고약스러운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시고 위로해주시며 사랑해주셨다는 사실 앞에 감격스럽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위로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타락한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처참하고 참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왕국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그 찬란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황량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낯선 땅이었던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지쳤습니다. 말이 70년이지 한 세대, 아니 두 세대, 세 세대의 긴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에 가능성이 없는 절망으로 백성 전체가 낙담하고 실망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죄 값으로 받아야 할 형벌과 심판이 끝났다. 내가 죄악을 용서해주겠다. 이제는 새로운 소망을 가슴에 품어라. 가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고통 받는 백성, 낙심하는 백성,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백성을 위로하고 소망을 심어주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북 이스라엘과 남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 죄악은 하나님이 정말 받으시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사야 1:2-3)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존적, 존재론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각하여 자신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창조주와 주인이신 여호와를 잊어버렸습니다. 여기는 정치 지도자들의 죄악이 있었고, 무엇보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한군데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치적인 타락은 그래도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타락은 가장 무서운 타락입니다. 종교 지도자가 타락하면 모든 소망과 가능성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형편에 들어갔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정의와 공의는 사라지고 거짓과 부정이 이스라엘백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신실하던 성읍은 마치 창녀와도 같이 되었다. 포도주에 물을 섞으며 혼합주의적인 사고와 행태가 팽배해지고 부정함이 시대에 판을 치고 있었다. 고관들, 정치적 지도자들은 패역하여 서로 짝하여 뇌물을 즐겨 받고 있었다. 재판관들은 고아를 돌보지 아니하고, 과부의 한 맺힌 송사를 들어주지 아니했다.” (이사야 1:21-23)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백성들에게 소망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악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 동안이나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가게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은 버림받은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이 여호와의 신보다 더 크고 우월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신을 섬기는 백성을 무찔렀다고 큰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모욕합니다. “바벨론의 신들이 여호와의 신보다 더 크지? 우리가 여호와의 신을 섬기는 백성을 무찔렀으니 너희들의 신은 신도 아니야. 죽은 신이야. 여호와의 신은 이름뿐인 신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예언자 이사야가 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희망과 소망을 부어주셨습니다. 인간은 비록 현실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소망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인생이 새롭게 열려지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소망은 활기와 열정과 흥분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소망이 결여되면 무관심과 타성을 낳을 뿐이다.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온전히 성숙한 인간다움을 위해서는 마음속에 소망이 꼭 필요하다.”

  소망이 없으면 인간은 자포자기하고 분노합니다. 근본적으로 세상이 말하는 낙관주의적인 사고와 기독교신앙이 말하는 소망은 다릅니다. 세상의 낙관주의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있는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소망을 이렇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죽은 뒤의 천국에 대한 소망은 사람을 수동성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혁명적 계열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기독교적인 소망은 현실도피나 환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소망을 품으면 그 안에는 사랑과 기쁨과 열정이 생깁니다. 창의적이고 헌신된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가 소망입니다.

소망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소망은 우리 삶을 바꿔 놓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찾아오시고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

  두 번이나 반복해서 위로하라고 말씀하시며 새로운 소망을 주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바벨론 포로 시대가 끝났다. 이제는 죄악이 용서를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는 특별한 존재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버림받은 백성, 포로 된 백성, 징계 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요 내 소유물이다. 너희는 결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귀중한 존재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는 꼭 필요한 존재란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쓰레기처럼 있다가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존재란다. 내가 너를 위해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주신 축복을 경험하면서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포로 된 현장에서 그립던 고향 땅으로 이끌어 동행하겠다는 임마누엘의 말씀을 하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위로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님이 위로하는 방법은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동행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투에서 희생된 병사를 생각하며 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종종 부상당한 병사들이 있는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군의관이 심한 부상을 입고 죽기 직전에 있는 한 젊은 병사에게 링컨을 안내했습니다. 링컨은 병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소?”
  그랬더니 병사는 그가 대통령인 줄도 모르고 신음하면서 말했습니다.
“제 어머니께 편지 한 통만 써주실 수 있습니까?”
  링컨은 젊은 병사 옆에 앉아 불러보라고 말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는 제 의무를 다하던 중에 그만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회복되지는 못할 것 같군요. 제가 먼저 떠나더라도 저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존과 메리에게도 저 대신 입 맞춰 주시고요.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축복해 주시길 빌겠습니다.”
  링컨은 편지 말미에 다음과 같이 서명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이 편지를 대필했습니다.”
  병사는 편지를 자기에게 보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읽다가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대통령인가요?”
  링컨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대통령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소?”
  그러자 병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을 잡아 주시오. 그러면 평안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는 병사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맺혔고, 링컨의 눈에도 안타까움과 비통함의 눈물이 보였습니다. 대통령이 고통 받는 병사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위해 찾아오셨고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감사이고 기쁨을 줍니다.

성탄절은 평화의 소식이면서 위로의 소식입니다.
성탄절은 기쁨의 소식이면서 감사의 소식입니다.

  병상에 누워 고통과 슬픔을 경험했던 어떤 사람의 이런 고백도 있습니다. “나는 슬픔에 겨워 앉아 있었다. 누군가 와서 하나님이 나를 다루심에 대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그리고 무덤을 넘어선 소망에 대해 내게 말했다. 그는 쉬지 않고 말했고 틀리지 않는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말에 감동을 받지 않았다. 단지 그가 빨리 가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마침내 그는 갔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는 내 옆에 앉았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한 시간이나 그 이상을 내 옆에 앉아 내가 무언가를 말했을 때 들어주었고 간단히 대답했으며 단순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떠났다. 내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 나는 사실 그가 떠나가는 것이 싫었다.”

  우리 인생에 위로를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옆에 있는 것만으로, 함께 동참해주는 것만으로도 인생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고통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고 지금도 옆에 계십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고 계십니다. 신음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시며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위로와 관심이 필요 없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때로는 낙담하고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너무 고고하고 교만하게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늘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축복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우리가 때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다는 거꾸로 된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자이시기에 이사야서에는 위로의 말씀이 가득 차 있습니다.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곧 나이니라” (이사야 12:1, 49:13, 5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찌하여 다른 곳에 가서 위로를 찾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성령님께서도 위로자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성령을 ‘Comforter’ 즉 위로자라는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성령님께서도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먼저 받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존경받고 칭송 받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고통의 현장에 내려가서 거기 있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더 존경받고 칭송받아야 합니다. 참된 위로가 있을 때 그것이 이 땅 위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로 바뀝니다.

  우리는 이 민족과 국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풍성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과 국민이 부자 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더 커지면 커질수록, 더 성장하고 성숙할수록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와 풍요와 축복을 통하여 이 땅에 고통 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주위에서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그 공동체, 사회, 국가는 더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죄악에 억눌린 사람들 , 질병에 고통 받던 사람들, 세상의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억압에 의해서 위협을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생명의 역사, 진리의 역사, 풍요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모습, 말구유에 가장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이 있으므로 우리 주위가, 이 시대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원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행복의 사람, 축복 받은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축복받은 백성,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 하나님이 이 민족을 다시 전 세계 지구촌에 다시 세우기를 원하는 백성임을 먼저 증거하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억눌림에서 자유롭게 하셔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딸이다.’라고 가르쳐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받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위로하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풍요의 역사로 바꿔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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