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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장의 이익 때문에 영원히 손해 본 사람 (룻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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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의 이익 때문에 영원히 손해 본 사람 (룻 4:1-6)

룻기에 나오는 룻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결혼하여 아이도 낳기 전에 남편이 죽었지만 끝까지 홀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효성을 다하는 아름다운 효부라는 사실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룻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룻의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한 가정에서 남자가 죽어서 대가 끊어지게 되면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기업 무를 자가 되어 그 가정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고 미망인과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주어야 하는 기업을 무르는 법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친족 중에 유력한 사람이었던 보아스가 자기 가문의 기업무를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룻 2: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보아스는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가난 때문에 다 잃어버리고 자식이 없어 혈통 마져 끊겨질 위기에 놓인 나오미의 가정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바쳐 땅을 찾아주고 룻과 결혼하여 그 가정의 대를 잇게 할 자녀를 낳아줄 기업 무를자가 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이행하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룻 3:12절에 보면 기업을 무를 의무를 지닌 나오미 가정의 친족 중에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4:1-2절에 보면 보아스가 성문에 나가서 그 성의 장로 10인을 청하여 증인을 삼고(4:2) 그 사람을 청하여 지금까지의 일들을 설명하고 그에게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테면 무르라고 말합니다.(4:4)
설명을 들은 그 이름 없는 친족은 처음에 흔쾌히 대답합니다. 그러나 단지 땅만 사는 것이 아니라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의 대를 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는 (5) 기업무를 의무를 포기하는 것을 봅니다. 6절에 보면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노라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이름 없는 근족에게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당장 이익 때문에 영원히 손해 본 사람” 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 것을 우려해서 기업무를 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손해를 두려워 한 이 사람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지 맙시다.

무명의 친족은 처음에는 기꺼이 나오미 가정의 고엘 즉 기업 무를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손해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은 원래 소유한자가 가난하여 타인에게 팔았어도 희년이 되면 자동으로 원 소유주에게 돌려지기 때문에 60년 마다 한번씩은 공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속받을 자식이 없는 가정을 위해 기업을 물려주면 희년이 되도 영원히 돌려질 사람이 없으므로 영원히 자신에게 귀속되게 되기 때문에 자기 가문의 기업이 확장되는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친족은 나오미 가정의 기업무를 자가 되라는 말에 처음에는 기꺼이 응했습니다. 그런데 룻과 결혼하여 그 기업을 엘리멜렉 가정의 이름으로 잇게 해야 한다는 말에 그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그는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그렇습니다.
계산상 이익이 될 것 같을 때는 나섰지만 생각해보니 손해가 될 것 같아 그만 두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입니다. 당장의 이익만 생각합니다. 당장의 이익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한 것, 진정 참된 것을 얻고자 하면 과감히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손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 1장에 나오는 메시아의 족보중에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만일 무명의 친족이 자신이 나서서 룻을 아내로 삼았더라면 다윗 왕을 낳는 족보 중에 보아스라는 이름 대신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그는 자신의 가문에 찾아온 놀라운 축복의 기회를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넣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남이 지기 싫어하는 그 일을 기꺼이 나섰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그가 그 기회를 포기하자 기꺼이 자신이 기업 무를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은 보아스의 차지가 된 것입니다.

2. 땅에 것만 생각하다가는 하늘에 것을 잃어버립니다.

무명의 친족은 “손해가 될까하여...”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손해, 무엇에 손해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가 생각한 것은 물질의 것, 재산상의 손해가 있을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재산의 손해를 걱정하여 영원한 기업을 포기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약간의 재산의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하나님의 기업 무를 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더라면 그는 룻을 통하여 다윗 왕가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이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다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손해를 보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해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손해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것들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미국의 시카고에 살았던 『콤 케인』이라는 사람이 말라기 3:10절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라는 말씀을 근거로하여 일간지에 광고를 냈습니다.

“진실하게 십일조를 바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지 않는 다는 증거를 대는 사람에게 큰 보상을 하겠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신문 광고가 나간 후 그는 만여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내용이 다 온전히 십일조를 낼 때 복을 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온전하게 십일조를 하고도 손해를 봤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물질로 손해를 보고 시간으로 또는 체면상으로 손해를 보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결코 손해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전도하는데 어떤 분이 교회 나가면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고 싶어도 못가겠다고 하더랍니다.
실제로 초신자가 교회 나오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갈까요. 교회에서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고 무슨 봉사에 대한 광고를 한다 해도 자신의 마음에 감동이 없으면 안하면 그만입니다. 헌금 안하려면 교회오지 말라고 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다만 설교나 광고를 듣는 중에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스스로 작정하여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되어있습니다. 주님께 드림으로 얻는 것이 얼마나 많고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되면 그렇게 수지 맞는 일을 위해 기꺼이 헌금도하고 봉사도 하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일도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땅에 심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가가 사업을 하기위해 돈을 투자하는 것은 결코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투자는 재생산을 위한 것입니다. 이름 없는 근족이 영원하고도 아름다운 진정한 축복을 바라보았더라면 자신에게 약간의 물질적 손해가 있다할지라도 기꺼이 나오미 가정의 기업무를 자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것을 위해 투자 합시다. 지금은 약간의 손해 보는 것 같더라도 하늘의 영원한 것에 투자합시다. 영원하고도 참된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3. 의무를 감당하기 싫어서 권리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본문 4:6절에 보면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라고 했습니다.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나오미 가정의 기업무를 자로서의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이 무명의 친족은 의무를 지기 싫어서 권리까지 포기한 것입니다.
의무는 누구나 감당하기 싫어합니다.
이름 없는 친족은 나오미 가정에 가장 가까운 친족이었기 때문에 기업무를 자 1순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정한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 손해를 두려워해서 의무감당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2순위에 있던 보아스가 그의 기업무를자가 되었습니다.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면 거기에 따른 권리 즉 축복이 주어집니다.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르는 의무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나오미 가정과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기업무를 자 1순위에 있던 친족이 포기한 것을 2순위에 있던 보아스가 감당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 중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마1:5-6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그의 3대 자손 중에 왕이 났고 또 그의 족보를 빌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영광을 안게된 것입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누릴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잠시 잠간의 물질적 손해가 아까워서 의무를 포기했던 그 근족은 그 이름 조차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그의 삶을 후회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불행한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신 25:7-10절에 계대 결혼법이 나옵니다.
계대 결혼법이란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죽은 형의 이름으로 기업과 혈통을 이어가게 하는 법이 바로 계대 결혼 법이었습니다. 이 계대 결혼법에 의하면 의무를 감당해야 할 친족이 감당하기를 싫어하면 억지로 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의무감당을 싫어하여 거부하면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영원히 신을 벗긴자” 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불리고 그 집을 “신을 벗기운자의 집”이라고 불리게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도 룻4:7-8절에서도 그 친족은 자신이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르는 일을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신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1세기의 역사가 요세프스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보아스가 룻으로 하여금 그 기업 무를 자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도록 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의무감당이 없으면 축복(권리)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당해야할 의무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도 의무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기본적으로 주일 성수하는 것과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전도를 하는 것은 성도의 3대 의무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받은 은혜는 계산하지 않고 아직 받지 못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의무 감당하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국가가 지워준 의무이든 어떤 단체나 회사에서 주워준 의무이든 그것들은 싫어도 해야하고 억지로라도 해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신 신앙적 의무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스스로 우러러 나오는 마음에서 감사함으로 해야합니다. 그럴 때 권리가 주어집니다.
복 받을 수 있는 권리 말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복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이미 부여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요1:12절 말씀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 자녀가 가질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그 권세를 행사하십시오 그것은 의무 감당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무명의 친족처럼 잠시 이세상의 것에 집착하여 영원하고 정말 귀중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놓치는 어리석음이 없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좀 어렵고 힘들어도 그리고 시간과 물질, 체면, 그리고 여러 가지 손해가 찾아올지라도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포기할 때 하늘의 진정한 상급과 축복이 주어집을 믿고 보아스와 같이 영원한 기업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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