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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성도 (행 16:6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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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행 16 : 6 - 15
제 목 :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성도

우리가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 자주 쓰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을 한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고, 또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모른 채, 자기 중심적인 일을 할 때가 참 많다는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합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몇 분이시지요?  하나님 한 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이상하게도 다양하게 다른 형태로, 몇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하나의 일을 행하는데, 어떻게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 한 가지 외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잖습니까? 
하나님의 뜻인 한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모순이 아닐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할 때는, 대단히 신중한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예요. 
함부로 하나님의 뜻, 운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뜻이 이처럼 다르게 나타날 때는, 저마다 자기 주장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것 중단하고, 자기 주장 내려놓고, 교회가 합심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각 자의 마음에  나타날 수 있도록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들을 보면 어때요?  이런 합력하는 기도가 없어서 문제가 생기고, 또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어느 문제 있는 성도들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문제없이 보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나타나고 있는 신앙의 모습이라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크기가 다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일에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래도 결과는 있던데요?”  여러분, 결과는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결과가 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과와 열매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열매라고 말 할 때는, 우리가 만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좋은 결과라고 할지라도, 그 결과로 인해 다툼이 있고,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결과는, 일회성일 수밖에 없어요.  잠시 인간의 만족은 있을 수 있겠으나, 그 이후에 이어지는 선한 역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맡고 있습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교회의 일들, 곧 하나님의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을 맡은 우리가, 과연 어떠한 자세로 감당해야 하겠는가? 
이에 대해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함께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제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바울이 좀처럼 갈 바를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2차 선교를 가는데, 좀처럼 선교의 문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는 겁니다.
바울이 어디로 갈지를 모릅니다.  헷갈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6절, 7절의 말씀을 보세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했습니다. 

1차 선교지였던 안디옥에서 드로아까지 가는데, 6개월 정도가 걸립니다. 
6개월 동안 걸려서 갔는데, 거기에서 다시금 아시아로 가려고 하는데, 그 이상을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영이, 다시 말해 성령이, 허락지 아니했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의 선교의 길을, 막으셨다는 것이지요. 
당시 바울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로서는, 대단히 위로를 받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귀중한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늘의 환상을 본 바울도, 3층천까지 올라갔던 바울도,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이렇게 막힐 때가 있었다면, 하물며 오늘 보통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막힘이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이 되어져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갈길 모를 때가 있지 않습니까?  헷갈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 과연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내가 어떤 신앙으로 대처해야,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막힘이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일들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이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나는데, 왜 하나님이 막으셨던 것일까요?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의 일을 하는데, 왜 하나님은 바울을 막으셨던 것일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앞 장인 15장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앞 장인 15장을 보면, 제 1차 선교여행이 끝난 다음에, 2차 여행을 떠날 때에 마가가 도망을 치지 않았습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가는 더 이상 선교여행에 동참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보이며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2차 선교 여행 때에, 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칼 같은 사람이기에 “싹수가 노란 놈을 왜 데리고 가나?  절대 데려갈 수 없다.” 하고, 이 일로 인해 서로 간에  크게 다툼이 일어났다는 거지요. 

두 사역자들 간의 충돌, 의견이 절대적으로 대립된 상태, 어떻게 보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무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이라고  볼 수 없는 행태라고까지 말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되지 않았습니까?  인간적인 시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상황입니다. 

존 칼빈은 이 일을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이 다툼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교 팀을 두 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이 아니냐?”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다툼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다툼을 통해서 바울의 마음도 상했던 것 같고, 바나바의 마음도 상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영적 지도자들이 아닙니까? 선교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 교회들을 돌봐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툼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채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사역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존 칼빈의 주장대로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인간에서의 신앙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그르친 일을 수습하는 뒤치닥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데,    그 어머니가 어떤 일로 인해 화가 났거나, 마음이 상해 있을 때 모유를 먹이면, 그 모유를 먹는 아이가 체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상황이 그러했다는 겁니다.  바나바나 바울이 선교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을 줄 압니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염려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교하는 이 두 사람이 아니라, 선교지에 있는 일반 성도들이었다는 겁니다. 

바나바나 바울 자신도, 전에와 같은 영적 컨디션은 분명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다툼으로 인해, 그들의 영력도 많은 부분 손상을 입게 되었을 겁니다.
그들의 영성도 흐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정상적인 상태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그들의 선교의 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영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다툼으로 인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새롭게 선교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살펴보아야 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속에 혹여 이러한 분노가 없는가?  이러한 것을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서로 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있은 후 표면적  으로는 다 화해가 됩니다.  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은혜스럽게 일해야지 하며 화해합니다.

그런데 분명 겉으로는 이렇게 좋은 모습으로 해결되었는데, 실제 그 마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 한 두고 보자.  지가 얼마나 일을 잘하나 한번 두고 보자.”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가 일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나 원참 기가 막혀서.”

그런데 여러분, 진짜 기가 막힌 게 뭔지 아십니까?  성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진짜 기가 막힌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결코 나와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남이 나보다 일을 잘하면, 시기할 것이 아니라,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잘 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때는 또 내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 그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믿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구르는 돌이 하는 것이예요.  가만히 박혀 있는 돌이 하나님의 일 하는 것 아닙니다.  만약 굴러온 돌이, 가만히 박혀 있는 내 돌을 빼냈으면, 감사할 일이지 그게 어디 시기할 입니까?  빼 내지 않았으면, 아직도 복지부동, 요지부동 아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절대 독기 가지고, 혈기 가지고  일하면 안 됩니다.  잘 들으세요.  서로 간에 주장이 달라 다툴 수는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다투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그 분노심 가라앉히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어떤 것을 분노심을 가지고 하려고 하면  하나도 되는 것이 없어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 일이 잘 되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성도들간에 날마다 칼을 갈지 않겠습니까?  무슨 칼요?  복수의 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칼은, 세상을 대적하는 말씀의 칼, 좌우에 날 선 성령의 검, 그것 하나 뿐인 줄로 믿습니다.

잠 16 : 32절 말씀을 보세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결국 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분노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으로 하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혹 여러분 마음에 아직까지도 서로 간에 마음이 맞지 않아, 불편한 감정들이  남아 있다면, 이 예배 시간 이후에 기도하는 가운데 다 태워버리시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바라보며, 성도들 간에 합력하여 남은 시간 하나님의 일들,  잘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막힘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신앙의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막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불평하며 원망하며, 그 일을 중단하고 멈추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즉시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그 때, 하나님은 바울에게 당신의 뜻을 나타내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세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바울이 어디로 가기를 원하셨습니까?  마게도냐로 가기를 원하셨다는 겁니다. 

아시아로 가고자 했던 것이 바울의 원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바울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받습니다.  자기의 원래 계획과는 다른 내용이지요.  그 때 바울은 무엇을 따랐습니까?  성령이 지시하시는 마게도냐로, 유럽으로  그 선교의 발걸음을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이,  갖추어야 될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합니까?  (질문)  내가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아니 그러면 직접 하시면 되지?  물론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원하십니까?  바로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그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구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종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어떤 일을,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든, 세상 적인 일이든, 계획한대로 진행되지 않고 막힘이 있다면, 그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막으시는 일, 안되는 일,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러다 일을  그르치지 마시고, 바울처럼 그 즉시로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엎드려 기도할 때에, 하나님 우리에게도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일을 해 나가야 할지도,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주장, 내 고집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는 가운데, 바울과 같은 환상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비전,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망을 가지고, 바울과 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신 사명 충성되어 잘 감당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막힘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신앙의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바울이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0절, 11절에 보면,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라고 했습니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후에,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 마음에 갈등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배를 떠나 직행했다고 했습니다.  괜히 빙빙 돌지 않고 직행으로 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명확히 무엇인지를 알면, 그 다음부터 머뭇거림 없이, 주저함 없이 막 뛰어 다니는 것이, 사도 바울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모습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사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두가 다 선하고 옳은 것인데, 어찌  하나님의 믿는 백성이 그 뜻을 순종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즉시로 순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지만, 우리가 행할 때에,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즉시 순종입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할렐루야!!!  곧 따랐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함에, 혹 작정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 내용이 무엇이냐고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잘 아실 줄로 압니다.  그것을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즉시 순종입니다.  미루지 말고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뜻대로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괜히 작정해 가지고 이 고생을 하네.” “그 때는 뭣에 꼬인 것 같았다.” 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뭔가 꼬인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환상을 본 것입니다.  작정한 것, 내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허왕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미리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서원하게 된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바울과 같이 스스로가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즉각적인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머뭇거림이 있으면 안 됩니다. 순종의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하나님이 가라하신 대로 떠나가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떠나갑니까?  직행하시길 합니다.  다이렉트로, 멈춤이 없이 계속해서  진행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섰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공급해 주셔서, 우리가 능력 있게 승리하는 모습으로 사역을 하게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여러분의 신앙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러한 변명이 없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막힘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신앙의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예배로 먼저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3절 말씀을 보시면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강가에 모인 자들에게 말하더니”  무엇입니까?  예배라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의 들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도 귀하고, 나가서 헌신하는 일도 귀하지만, 그 보다 앞서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칫 기도에만 집중하게 되면, 혼동될 때가 있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의외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때가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뭐든지 세상일이든,  영적인 일이든 치우쳐서 좋을 건 하나도 없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부작용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직접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예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시는 분들은, 더 더욱 예배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보면, 너무 일에 열심인 나머지 피곤에 지쳐 기도하지 않고, 예배드리지도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기도 안 하십니까?”  “왜 예배 안 드립니까?”  “이때까지 교회에서 일했는데  뭘 또 기도합니까?  뭘 또 예배드립니까?”  우리는 이런 대화를 참 많이 나누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는 옳지 않는 일입니다.

기도와 예배가 없이, 그저 교회의 일에 분주한 것,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무슨 말입니까?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겁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망각했다는 겁니다.  성전을 바라볼 때 그 중심에 예배와 기도의  열망이 뜨겁게 타올라야 하는데, 오히려 외부적인 성전의 화려함을 자랑하며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책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떤 경우에라도, 기도와 말씀, 곧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일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예배드리는 일을 빠지거나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바울을 보십시오.  빌립보를 전도하기 위해서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강가에 앉아서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모여서 말씀 전하는 일, 곧 예배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사역의 원천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이 있다고 하면, 우리의 모든 하나님의  사역에 승리가 있고, 열매가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14절, 15절을 보니까,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선교사역에, 하나님은 선교의 동역자를 붙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동역자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루디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바로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실 때에는, 신발까지 주신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짐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짐 질 수 있도록 두꺼운 어깨도 주신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짐만 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어깨도 주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런 신앙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고, 그 분이 명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와 같이 되어질 때에,  우리의 사역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수많은 기적과, 수많은 열매들을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한 그 2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신앙의 모습이 있게 되어질 때에, 특별히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전도의 사역에 열심일 때에, 여러분의 그 수고와 헌신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많은 생명을 열매가 나타나고, 그 열매를 통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듯이, 제 2 성천 교회, 제 3 성천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비젼을 가지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며 충성  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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