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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사랑 지수를 점검하라 (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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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지수를 점검하라 (요 13:1~11)

200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일이면 마지막 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립니다. 모든 날이 다 중요하지만 이 날이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날]이란 말에 영적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해가 바뀐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망년회로 넘길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낮과 밤이 계속 반복되고. 1년 춘하추동 4계절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인생과 세월, 역사가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운명론도 나오고, 윤회 사상이 나온 것입니다. ‘세상 자연 이치를 보니까 그렇게 도는구나!’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진리인 말씀을 알지 못하니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똑같은 마지막 날을 계속 주시는가? 그것은 영원한 마지막 날 인생도 역사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마지막 날이 오게 되는데 그 날은 준비없이 맞으면 안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인생에도 역사에도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오고.. 봄이 있으면 반드시 겨울이 온다는 것입니다. 곧 역사는 시작이 있고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연말을 주시는 것은 1년의 마지막 정도가 아니라 정말 역사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인생도 역사도 하나님RP서 허락하신 마지막 날 우리는 1년 동안 매우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한 해의 마지막 주일, 마지막 날이 왔습니다. 이 날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인생 마지막 순간도 이렇게 오겠구나! 역사의 마지막 날도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연말은 마지막 날을 바라 보며 인생의 중간결산을 해 보라는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인 것입니다.

  알프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13일간 방황하다가 구출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일 12시간씩 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길을 잃은 장소를 중심으로 불과 6km 안에서만 왔다 갔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을 가리면 똑바로 걷지 못합니다. 20m를 걸으면 약 4m 정도 간격이 생기며 100m를 가게 되면 결국 원을 그리면서 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윤형방황(輸形彷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눈을 가리고 똑바로 걸으려면 약 30보 걸어간 후 잠깐 멈추었다가 새 출발하는 기분으로 또 30보를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말을 주신 것입니다. 한 해를 살고는 반드시 나는 바로 살고 있는지 마지막 날에 후회없는 삶을 살고 있는 점검해 보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연말을 맞아 우리는 무엇을 점검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가 마지막 날을 위하여 반드시 점검하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날을 보내신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이 주일에 이 말씀을 맞추려고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말씀을 읽어내려가면서 설교하는 중에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날을 보내는 기사를 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지막 날 무엇을 하셨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나는 얼마나 더 사랑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인생길에 무엇을 점검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오늘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이 사랑지수!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 폭이 또는 사랑하는 능력이 자랐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마지막 날을 맞으신 것이지요! 그 때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점검할 일은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제자들이 아주 사랑스러운 존재였다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셨겠지. 그러니까 이제 마지막 날이니까 더 사랑하셨겠구나.’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같이 잘 풀어가시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표현을 쓰신 교훈을 꼭 붙드셔야합니다. 절대로 사랑스러운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하신 일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성찬을 베푸신 것이고. 또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식사 전에 정결 의식으로 발을 씻기신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제자들에게 주실 교훈이 있어서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당황하였으나 누구도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발을 내어놓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절대로 자기의 발을 씻으실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곧 마음을 바꾸어서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한 것은 더러운 발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이 더러워서 씻어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제자가 그 중에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질 만큼 무서운 죄를 지은 제자가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제자 때문에 다른 제자들의 발도 다 씻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씻기려 하신 것은 더러운 발이 아니라 죄를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가룟유다 때문에 예수님이 다른 제자 발을 다 씻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회개하라!” 하시던지 아니면 유다가 문제라면 유다의 발만 씻기시면 되지 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의 발을 씻기셨느냐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셨지만, 다른 제자들이 알도록 공개적으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가룟유다를 보호하시려고 애쓰셨습니다. “유다야, 네게 마귀가 들어가고 있어. 너 나를 팔려고 하지? 내가 다 안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룟유다만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시려고 단지 가룟유다만 알아듣도록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허물을 보았다면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일어나셔서 대야에 물을 떠서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을 팔려는 죄는 가룟유다가 짓지만, 이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겠지만 그것이 다른 제자들의 죄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발도 안드레도 발도 씻으셔야 했습니다.

베드로가 한사코 발을 내어 놓지 않으려고 할 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파는 죄는 베드로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있는 가룟유다의 죄를 씻겨 주시지 않으시면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좀 황당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 의미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7절에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교우의 죄를 볼 때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도우려 하지만, 죄지은 사람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가족 친척이나 교인과 같이 가까이 있는 사람의 죄에 대하여는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척들 관계가 쉽게 무너지고 교우들 사이의 관계가 아주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됐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교인들 서로의 관계에 대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전에 먼저 성찬을 베푸셨습니다.
왜 이 마지막 식사를 구별해서 성찬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 식사 시간에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 떡은 내 몸이니…"(마 26:27) 하셨고, 포도주를 주시면서는 "이 잔은 내 피니…"(마 26:28) 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엄청난 내용으로 그 날 먹는 떡과 잔에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에 이 축복된 떡과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곧 이 축복된 잔과 축복된 떡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영원히 하나되었음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그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제자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배반처럼 무서운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들이 무서워 나를 버리고 갈지라도 나는 절대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너희와 나는 이미 한 몸이 되었으니, 내가 너희를 어찌 버릴 수 있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너희들이 다 나를 배신하고 다 도망가고 베드로는 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하게 될지라도 나는 너희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 나는 절대 너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주님이 이 떡은 내 몸이고 이 포도주는 내 피라고 제자들과 한 몸이 되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한 몸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더 이상 버릴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한 몸으로 분명하게 해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성찬을 받으실 때 성찬의 축복이 무엇인지 알고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한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성찬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성찬에 또 한 가지 큰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찬을 받는 사람들도 서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는 성찬을 통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죄나 허물로 인해 주님이 버리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미 나와 성찬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성찬 때 받습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된 것처럼 성찬을 받은 성도들끼리도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성찬을 받는 자는 그 축복된 떡 때문에 예수님과 한 몸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두 한 떡에서 떼어 먹었기 때문에 성도들도 모두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 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사람에게 잘난 것이 있다면 모두가 잘난 것이요, 어떤 사람에게 허물이 있다면 모두의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을 함께 받았다는 말은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을 비판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한 성찬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제 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교회 교인이 되었다는 말은 그저 이 교회를 다닌다는 말이 아니고, 성찬을 같이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교인들은 영적으로는 한 몸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서로 하나인 것입니다.

성찬을 같이 받고 나면 그 사람의 허물이 여러분의 허물이 됩니다. 죄도 함께 져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유다의 죄로 인하여 베드로와 안드레와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죄를 함께 지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약삭빠른 분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찬 받을 때 조심해야겠구나!’ ‘ 그래서 성찬 받을 때 함께 성찬 받는 사람을 두루 살펴보고 용서하기 싫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과는 함께 성찬받지 말아야지!’ 이런 사람의 믿음이 아무 생각없이 성찬받는 사람보다 더 낫습니다. 성찬의 의미를 알기는 아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좋은 사람과만 성찬을 받겠다면 그것이 성찬이 되겠습니까? 성찬의 진짜 의미는 예수님 배반하고 도망갈 제자들을 절대 버리지 않으려고 주님이 그 제자들과 한 몸이 되어주신 것이 성찬인데, 그런 성찬의 은혜를 받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나는 성도들을 싫다, 좋다 이렇게 구분해서 성찬을 받으려고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 다른 성도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서 부담감으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은혜를 먼저 받았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하여 허물 많은 그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주님께서 허물많은 나와 하나가 되어 주셨다는 은혜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사람이 한 몸이 되는 원리를 두 경우에 적용하셨습니다.
하나는 부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하셨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는 말은 아내는 남편의 허물이 곧 자기 허물로, 남편은 아내의 잘못을 곧 자기 잘못으로 받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는 서로 흉보는 것도 아니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도 없이 하나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부입니다.

이 한 몸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또 하나가 교회입니다.
교인이 누구입니까? 성찬을 함께 나누는 관계입니다.
부모형제라도 함께 집안에서 같이 살지 않으면 1년에 몇 번 만나기도 어려운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교인은 적어도 한 주일에 두 번은 만납니다. 속회 때 만나고 주일예배 때 만납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회에 나오고 수요 예배에 나오고 철야예배에 나오면 거의 매일 만나는 관계입니다. 부모형제보다도 더 가까이 만나는 관계가 교인 관계입니다. 이 만남의 기적이 우리 속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교인으로 만나게 하셨는데 그것은 성찬을 통해서 한 몸이 된 관계입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 몸인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은 교회 교인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내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로 시험 들지 말게 마옵시고” 그러니까 다른 교인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을 ‘당신 죄’ 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내 죄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이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나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도 자기 죄로 여기고 회개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개인 기도가 아니라 교인으로서의 기도입니다. 죄는 김집사가, 박권사가 지었지만 회개는 나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연말에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죄’도 함께 질 정도로 교인들을 사랑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어령교수가 세례 받은 후 아는 사람들이 “왜 교회에 다니느냐?”는 질문을 한답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 까지는 내가 이해하겠는데, 믿으려면 혼자서 성경 보고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예수 믿으면 되지, 왜 문제 많은 교회에 굳이 나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교인들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께서 혼자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되는데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과 나만의 관계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 사이의 관계가 없이는 우리는 결코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못합니다. 문제 없는 교인하고만 관계를 맺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문제 있는 사람들 과의 연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성도들과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부담스럽게 여기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토록 남의 허물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싫습니까? 그러나 우리도 언제가 다른 사람의 사랑의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허물이 덮여지고, 죄가 가리워지고 온 성도들이 재판관이 아니라 죄를 함께 책임져주는 교회” 이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성찬의 은혜를 깨닫기 전에는 성찬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없이 다른 성도들에게 비판적이었습니다. 싫은 사람은 싫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스스로 놀랄 정도로 사람에 대하여 엄격하였습니다. 교회 현실에 대하여도 나라에 대하여도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에 눈이 뜨인 후, 그것이 바뀌었습니다. 성찬을 받을 때마다 저는 무너집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반하고 도망갈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주니을 배반하고 도망갈 그 제자들과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성찬을 받으면서 참회 기도를 하는데, 마음에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성찬을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때 주님의 성찬 떡을 받아 먹으면서 ‘나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주님께는 얼마나 큰 고통이 될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저는 울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내가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날 성찬식 후, 저는 문제가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렇구나! 내가 그렇지.’ 하고 주님께 나아가 회개하게 됩니다. 저는 성찬을 통해서 허물 많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허물 많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성찬의 은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이 허물도 같이 나누고 서로의 죄도 함께 회개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교회로 모아주신 것입니다.
“과연 이런 교회가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노아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홍수 심판 때,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구원할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산 위에 배를 건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려 137m에 달하는 거대한 배입니다. 노아는 이 배를 100년이 넘게 지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멀쩡한 대낮에 산 위에서 그 엄청난 배를 짓는 노아를 보고 사람들은 조롱했을지 모릅니다. 불가능하다고 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방주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방주를 완성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교인들이 한 몸된 교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고비는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하나 제대로 하면 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성찬을 받지 않고 성찬 하나 제대로 받으면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가십니다.

연말에 우리가 무엇을 점검해야 합니까? 성공했나?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나? 얼마나 건강했나?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구름잡는 것입니다. 정말 확인해야 할 것은 얼마나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진짜 예수님의 사랑을 내가 하게 되었는가? 그것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우리에게 얻고 싶으신 것은 사랑 하나입니다. 사랑 하나에 다 들어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했습니다.

이제 우리 기도하실텐데 여러분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세요.
주님 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점검해 보고 싶습니다.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를 맞는데 이렇게 살다 보면 마지막 날이 오는 것입니다. 언제가 마지막 날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면 그 때는 정말 두려운 날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성도의 허물을 보고 비판만 했지 대신하여 회개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시다.
혼자 되는 마음, 까다로운 마음, 정죄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을 회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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