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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무화과 나무를 심은 뜻은 (눅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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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를 심은 뜻은 (눅 13:1-9)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1-9)

1. 태양은 초속 240km의 속도로 우주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 태양으로부터 1억 4천 9백 60만 km(빛의 속도로? 8분 30초 거리) 떨어진 지구는 태양 주위를 시속 107,245Km(1초에 약 30Km)로 달리고 있습니다. 2초 만에 서울에서 부산에 도착하는 속도로 달리고 있는 태양 주위를 지구가 16초 만에 서울에서 부산에 도착하는 속도로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도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왔습니다. 365일(정확히는 365.2422일), 1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지구에 탑승하여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무사하게 그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한 해를 보내면서 가장 지혜롭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어울려 망년회(忘年會)를 통해 한 해 동안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는 것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들과 함께 ‘해맞이’하며 소원을 빌어보는 것이겠습니까? 지나 온 삶의 흔적들을 잊어버리자고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해맞이’ 치성(致誠)을 통해 소원이 성취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온 지난날은 죄의 흔적밖에 없습니다. 해와 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며, 그 앞에 부르짖어 회개하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시145:19)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죄는 스스로 잊어버린다고 해서 잊혀지거나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하므로 잊혀지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시37:0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장 지혜롭게 한 해를 보내고 새해에 여러분을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수 있도록”(시107:30) 회개의 열매를 맺는 연말연시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유대 기득권층의 죄악상을 신랄하게 드러내며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의 기득권층, 즉 바리새인들과 지도자들의 죄악은 누가복음 11:37-54까지에 언급된 것으로, 위선(僞善), 허세와 교만, 자신의 부정부패를 교묘히 은폐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려는 악독, 그리고 진실과 진리를 왜곡하고 매장하려는 사악함 등입니다. 지도자들의 이러한 죄악들은 ‘누룩’(눅12:1)과 같이 전염성이 강해 사회 전반을 심각한 파멸로 몰아가는 것들이어서 그들에게 화(禍)를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지도자들은 화를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예수를 없애고자 여러 가지 함정이 깔린 복합적이고 교활한 질문공세를 시도합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걸어 넘기려는 완악한 질문이 본문 1절,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당국에 의해 성전에서 피살된 사건의 책임 소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빌라도 총독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과격한 무장 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첩보를 가지고 빌라도가 성전을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성전 안에서 갈릴리 사람들을 대량 학살해버렸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렇게 성전에서 학살당하는 규모가 3천명이 될 때도 있었고, 많을 때는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을 예수께 고하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만약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정치적으로 로마 당국을 반역하는 행위로 예수를 로마 당국에 고발하여 넘길 구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학살당한 그들의 죽음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에 따라 마땅히 죄의 보응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결국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자들과 그들의 율법 개념을 지지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딜레마에 빠뜨리려는 사악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들의 교활한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절입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니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니라.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간악한 생각과 의도를 예수께서 훤히 꿰뚫어 보시고, 그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사는 길,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회개밖에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정치적 문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간교한 정치적 함정이 깔린 질문공세에 맞대응하여 변론하고자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항상 원하시는 바는 죄를 회개하고 변화되어 구원받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거듭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불의의 학살을 당하는 불행이나, 실로암 망대가 붕괴되어 압사(壓死)당한 사건 등은 당사자의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그러한 불행을 당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인양 생각했던 것입니다. 숱한 재앙과 재난, 사건 사고 가운데 자신이 무사했다는 것을 자신들이 죄가 없었기 때문으로 여겼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그 불행의 원인을 따지는 일에 집착하는 한편, 자신들의 죄악을 합리화시키려는 아주 불순하고 사악한 생각들을 가졌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아직 불의의 재난과 재앙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안심하지 말라, 세상에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은 재난과 재앙을 당해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3. “회개”란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잘못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변화를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하며 자신도 하나님 앞에 그들과 똑같이 죄인임을 깨달아 회개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를 향한 정죄가 아니라 형제의 모습을 통해 도리어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하여 열매를 맺는 변화된 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6-9절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을, ‘열매’는 참된 회개를, ‘주인’은 하나님을, ‘과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장식용이나 땔감용, 또는 목재용으로 심지 않습니다.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열매를 맺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 이유는 딱 한 가지, 열매 맺는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첫 해에는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2년이나 3년째가 되어야 그 열매를 구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과원지기’의 부단한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3년 동안 무화과 열매를 하나도 얻지 못해서 “이 나무를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그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징계하는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 최후의 심판이 가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주인’의 엄중한 명령에 ‘과원지기’가 부탁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이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위해 다시 한 번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도록 금년 한 해만 기다려 주시라는 부탁입니다. ‘무화과나무’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라는 간청입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이나 ‘과원지기’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인 것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찍어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마3:10)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는데 그간 성령의 열매를 얼마나 맺으셨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갈5:22-23)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빛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얼마나 빛의 열매를 맺으셨습니까?

빛의 열매는 “(엡5:9)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땅에 묻어 두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에게 맡기신 물질과 재능, 시간과 능력으로 한 해 동안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인류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고 ‘주인’에게 간청하는 것은 우리에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서 자리만 차지하여 그 땅만 버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없습니까? 가정에서 부모의 자리만 차지하고 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꼬박꼬박 봉급만 따먹고 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도자라고 해서 높은 자리만 꿰 차고 앉아서 고액 연봉만 빼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서 거룩한 직분을 받았으면서도 자리만 차지하고 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변화된 삶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성도(요15:11)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2008년 새해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기회가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고 여러분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 한 해 끝자락에서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며 열매를 맺지 못한 삶을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다짐하는 마지막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각종 재앙과 재난, 사건 사고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하리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어느 곳에 한 양치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을 하러 나가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마당에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활짝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코 끝에 스며드는 향기며 난생 처음 보는 꽃 같아 이 꽃들을 보면서 하루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지만, ‘오늘은 양털을 깎아야 하니 빨리 털을 깎고 와서 이 꽃들을 보며 즐겨야지...’ 그러나 그가 양털을 깎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꽃들은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아름다운 새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새 소리이었습니다. ‘지금은 우유를 짜야 하는 시간이니까, 일을 마친 후 저 새 소리를 들어야지...’ 그러나 양치기가 우유를 짜고 와 보니 이미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양치기는 집 밖에서 들려오는 말울음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창문을 열어보니 아주 잘 생긴 백마 한 마리가 자신의 몸매를 자랑이나 하듯이 천천히 울타리를 돌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말을 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지금은 울타리를 고쳐야 하니까 빨리 고치고 와서 저 말을 타 봐야겠다...’ 그러나 그가 급히 일을 마치고 왔을 때는 이미 백마는 그 곳에 없었습니다. 양치기는 그처럼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뒤로 미루는 바람에 하나도 자기의 소원을 성취해보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바로 이 양치기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회개할 기회를 놓치면 내일이 없습니다. 전쟁 깜도 안되는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수7:13)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지 못하면 내일이 없습니다. 금 그릇과 은그릇이라도 더러우면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도 깨끗하면 귀하고 거룩한 일에 쓰임받게 됩니다.(딤후2:20-21)

성도 여러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8-9) 예수 그리스도께서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삭개오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고 회개했습니다.

이같이 회개의 열매를 맺고자 한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며 아브라함의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눅19:1-9) 무화과나무를 심은 뜻은 회개하여 변화된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활의 묵은 땅을 갈아엎는 회개를 통해 소망의 새해를 준비하시고, 풍성한 열매를 기약하는 지혜롭고 복된 내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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