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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소금같은 빛같은 교회되게 하소서 (사 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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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같은 빛같은 교회되게 하소서 (사 60:1-9)

2008년 무자(戊子)년 새해를 맞으신 성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에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년 우리교회의 표어는 ‘소금같은 빛같은 교회되게 하소서’입니다. 이 한 해 동안 기도할 때마다 잊지 않고 기도하시고, 모일 때마다, 행동할 때마다 기억하고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금년 우리교회 달력에 매월 말씀이 있는데 1월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입니다. 우리에게 새삼 영감을 주시는 강력한 말씀으로 성도여러분, 마태복음 5장 13절 이하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한 해 동안 우리교회가 소금같은 빛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소금같은 빛같은 성도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회에서 각종 부정적인 사건이 터지면 꼭 그 안에 소위 그리스도인이 끼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빛 된 존재로써 이 땅의 어두움을 밝혀야 할 교회가 오히려 어두움 가운데서 갈 방향을 잃어버린 채 우왕좌왕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큰 교회들은 마치 다국적 기업을 하듯이 이곳저곳에 소위 지성전을 세워서 위성방송을 하면서 지역의 조그마한 교회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큰 교회는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을 하면서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마치 목사 개인의 소유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리더쉽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소위 파워게임이 벌어져 교인이 둘로 나뉘어져 서로 싸우는 모습이 언론에 여과 없이 보도되어, 오늘의 한국 교회가 이 사회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교회가 이 땅의 어두움을 밝히고, 썩어져가는 사회를 썩지 않게 막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오늘 주시는 말씀 앞에서 우리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며, 새로운 결단으로 2008년의 신앙생활을 출발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새해 첫 번째 주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 일어나라(1절)하십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은 주저 앉아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의 삶은 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참고 인내하여 천신만고 끝에 그 순간을 극복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는 절망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절망은 도무지 다시금 일어설 수도 없는 상태로 이끌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들의 영혼은 이 처럼 쇠약해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해 지금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주저 앉아있지는 않습니까? 무능력한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소망도 기대도 없고 그저 안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이런 영적 침체 가운데 빠져 있습니까? 고난이 극심했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더디어서 그렇습니까? 그래서 도무지 소망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저앉아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내 영혼을 번쩍 깨우는 천둥같은 소리로 오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 침체는 내가 내 삶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과 기대를 가지고 추구하다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역사도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나를 위하시며, 또한 더불어 세상을 사랑하시는 주권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시며, 더불어 그들을 힘들게 한 이방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사, 그들도 구원코자 합력하여 역사의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제 나를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코자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 분을 믿는 가운데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침체된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빛을 비추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스라엘은 빛을 발할 수도 없고, 빛을 발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는 발광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빛을 비추는 것 뿐입니다. 빛을 비추어내는 반사체일 뿐입니다. 1절에 ‘이는’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빛을 비추어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즉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위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빛을 비추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빛이 이미 그들에게 와 있기 때문에 그저 우리는 그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는 빛의 통로입니다. 빛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빛은 만민을 구원하는 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빠진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나오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이루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의 역사에 함께 하자고 불러주시고, 같이 하자고 동참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이 과정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어떤 존재로 불림을 받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가름하는 것이지, 내가 어떤 존재이며, 내가 어떤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다만 빛을 비추는 존재일 뿐입니다.

내 안에 빛 되신 주님을 모실 때, 그 빛은 내 어두운 안을 비추어 밝게 할 것입니다. 내 안이 어두울진대 내 밖은 얼마나 더 어둡겠습니까? 빛 되신 주님으로 내 안이 밝아지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생명인지 분간 못할 어두움에 싸인 세상이 마침내 밝아져 바른 길을 드러낼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 빛 된 길로 걸어가는 삶은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삶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참 가치 있는 인생인지 그들은 우리를 통해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더 축복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땅의 암울한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무지 몽매한 백성들이 하나 둘 참 빛을 통해 진리를 깨우치기 시작하였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풍전등화 같은 민족의 운명 속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고, 그 불길은 교회뿐만 아니라 민족을 변화시키며,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하는 밝은 빛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사명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여, 이땅의 모든 교회여! 주님이 내게 비춰주신 그 빛을 세상에 제대로 비추는 빛같은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4절을 통하여 ‘눈을 들어 보아라’ 하십니다.

소금같은, 빛같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눈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지금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미래의 일이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미래가 현재입니다. 미래이지만 그 역사를 주장하시며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자이시기에 미래는 더 이상 막연한 미래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있다면, 현재가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현재를 이기는 힘은 미래에 있습니다. 미래적 소망과 가치가 현재를 바꿀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약속과 성취의 역사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그 일들을 이루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의 회복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그 회복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믿음으로 소망해야 합니다. 바라는 것이 구체적이지 못하면 믿음이 타락하고 미신이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미래에 대한 믿음만이 이런 소망을 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펼쳐 주시는 비전에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미래의 삶을 오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소금같은, 빛같은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을 살아가지만, 현실의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적 가치를 가지고 미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소금같은, 빛간은 삶의 모습입니다. 썩지않고 맛이 달라질 것과, 어두움이 물러나고 밝은 가치가 들어날 그늘을 바라보며 나를 녹이고 나를 불태우는 것입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현재에,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고,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재에 미래를 비추어야 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이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오늘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소금같은, 빛같은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도무지 꿈꿀 수 없는 칠흑같은 어두움의 때에 내 안을 비추던 빛이 스며나와 주변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썩을 대로 썩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회에, 나를 살맛나게 하셨던 주님이 주신 소금의 짠 맛이 세상에 흘러가서 그들도 주안에서 살맛나게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것은 이런 확신입니다. 지금 세상은 우리 기독교에 대해 폄하하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그들도 어두움을 깨닫고,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길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그들은 마침내 우리에게로 몰려 올 것입니다. 이것까지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비전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미래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소금과 빛입니다. 성도는 아무리 부족하여도 하나님이 선택하여 불러 모으신 빛과 소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어두운 세상을 빛과 소금인 교회를 통하여 밝히시고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교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 빛을 교회가 반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는 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빛과 구원의 능력을 땅끝까지 전파하시기 원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해서 나타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뜻을 이루어 드릴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두워져 가며 점점 혼탁해져 가는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이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에 의하면 교회는 땅 끝까지 구원의 빛을 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다시스’는 오늘날의 스페인을 상징하는데, 그 당시 스페인은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서바나에까지 가서 전하려고 하였는데(롬 15:23-28), 이는 그가 서바나를 그 당시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행 1:8)에 따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한다(9절)’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는 세상 끝에 거하는 사람들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 끝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보기만 하면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는 다시스로 상징되는 먼 곳, 땅끝까지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주어진, 우리 교회에 주어진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의

‘다시스’는 어디입니까? 거리는 가깝지만 멀고도 험한 ‘평양’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평양까지 복음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성도여러분, ‘소금같은 빛같은 교회되게 하소서’기도하며, 일어서십시오. 빛을 비추십시오. 눈을 들어 보십시오. 이 한해에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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