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바울의 목표의 삶 (빌3:10-14)

  • 잡초 잡초
  • 413
  • 0

첨부 1


바울의 목표의 삶 (빌3:10-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인사를 기분 좋게 받으십시오. 말에는 상당한 힘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축복은 안 이루어져도 저주는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희망과 소망과 덕담을 많이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도바울의 복된 삶의 비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개종 후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전도자의 삶으로 많은 결실을 얻었고 인생을 결산할 때 바울은 만족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고백한 내용과 유사한 만족감을 표현한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아간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적 겸손을 본받아 서로 섬기며 살아가라고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유대주의자들이 집요하게 바울을 따라다니며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으로 재무장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자신의 간증을 들어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의 향상하고 전진하고 발전하는 신앙인의 진정한 삶의 덕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삶

12절에서 사도바울은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아주 분명한 비전이 있었고 뜻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목표와 뜻이 있어야 하고 분명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목표가 내 정신에 각인되고 내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전 축구감독 히딩크라는 분은 경기에서 이기고서도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소감을 표현하였습니다. 내게는 아직도 분명한 목표가 있다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만한 표현 같지만 그에게 그런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복싱 경기를 할 때 심판이 경기직전에 양선수를 불러놓고 주의를 줍니다. 그 순간이 싸움에 절반을 이기는 순간입니다. 양선수가 주의를 듣는 순간 눈싸움으로 서로 먼저 상대방의 기를 꺾는 선수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 때 기에 약한 선수는 상대방의 눈을 못 쳐다봅니다. 그 모습이 이미 반은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선수는 눈으로 먼저 상대방의 기를 제압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게 분명한 목표가 있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고 용기를 갖게 하고 땀을 흘리게 만듭니다.

미국의 한 의사가 남자 환자 15,321명에게 발병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대부분의 환자는 인생의 가치관이나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에게 목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발병하고 쉽게 늙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역동적으로 살아가고 항상 젊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흐려지고 인생의 가치관이 흐려질 때 병은 쉽게 발생한다고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소련과 인공위성 경쟁에서 미국이 뒤쳐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1960년 후반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이제 시작하면 앞으로 25년 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때 케네디는 그 계획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15년이나 단축하여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표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쫒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이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지칠 줄 모르고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새해 분명한 목표를 가지십시오. 우리교회의 새해 목표는 교회건축입니다. 이 일이 우리교회로서는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또 우리 국가적으로는 새해 목표가 경제회생에 두고 있으니까 그것도 이루어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지도자가 강력한 뜻을 천명하면 국민은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은 협조하고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나 국민은 좋은 지도자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여러분 개개인의 한해의 삶은 여러분들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의 운영자는 나 자신입니다. 

적극적 자세

본문 12절을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자세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복을 받는 사람은 긍정의 생각을 하고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진하고 발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생각이 전향적이고 긍정적입니다. 그러니까 발전하고 향상하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패자는 언제나 부정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뒤를 돌아다봅니다. 불평을 하고 탓과 원망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자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마음이나 처신은 자꾸만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뒤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니까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이 고백은 아직도 목표를 향하여 뛰어갈 길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쉬거나 잠자거나 태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구하라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대를 주는 암시가 들어 있는 메시지입니까. 우리는 올해도 찾을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찾으면 찾아집니다. 얻어집니다. 문이 열려집니다. 그것은 성경의 약속입니다. 한해 부지런히 찾으십시오. 구하십시오. 그리고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열릴 줄 믿습니다. 산삼을 캐러가는 사람들은 오늘 좋은 산삼을 캘 줄 믿고 목욕재개하고 신선한 마음과 환한 마음으로 산을 향해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넓은 선중에서 바늘 찾듯이 산삼을 캐내는 것입니다.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또 긍정의 말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긍정의 생각이 나 자신에게 상당한 암시를 주게 됩니다. 그 암시는 자신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자신감은 희망이고 약속입니다. 미국인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보고도 “베리 굿”이라고 말합니다. “원더풀”이라고 응답합니다. 비오는 날도 “굿 모닝” 합니다. 말이 좋고 생각이 좋 참 좋습니다. 그 말을 듣는 너도 좋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긍정의 말과 생각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리고 긍정의 생각과 긍정의 감정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말로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탓하다 보면 누구보다도 내 자신의 감정이 상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너와의 감정이나 관계도 상하거나 악화되고 그 생활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낙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좋은 기분으로 살아갑니다. 늘 웃으며 감사하며 타인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미국 미시간대학 사회연구소 심리학자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는 423쌍의 장수 노인들이 “왜 장수하는가, 생활에 무슨 특징이 있는가”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장수노인들은 한결같이 친구, 이웃, 친척들의 가사, 육아, 심부름 등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생활을 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류의 기본 나이는 120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원인이 세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폭식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절제이고 세 번째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 없이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인색하고 남에게도 인색한 삶은 삶을 폐쇄적으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어느 날 인색하게 살던 사람이 죽어 심판대에 섰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그의 일생의 기록을 보니까 누구를 도와준 기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굴 도와준 적이 없느냐고 물으니 오기 며칠 전 거리에서 동전 500원짜리를 거지에게 한번 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길을 가는데 거지가 빤히 쳐다보기에 주고 왔으니 나도 천국 갈 자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곁에 앉아있는 미카엘 천사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미카엘이 “동전 500원 주고 지옥 보냅시다”하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삭막하고 차갑고 메마르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얼마나 적극적인 태도입니까. 그 생각 속에 다부진 의지와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나 자신에게도 강력한 의식을 심어 주지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정신을 전염시키고 파급시킵니다. 그래서 그런 친구를 옆에 두고 살면 그 친구까지도 그런 의지를 가지게 만듭니다. 바울은 그 정신을 예수께로부터 전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도 3년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바울도 종말을 앞에 두고 고백하기를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만족함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달려가는 삶

사도바울은 “나는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달려가되 반드시 “앞으로, 미래로, 주께로,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전진이고 발전이고 상이 있습니다. 달려가되 과거로 달려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추억만 되씹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너무 추억만 되씹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난날의 추억은 묻어두고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의 죄를 자꾸 회상하고 되씹고 기억하면 스스로 발목이 잡힙니다. 우리는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었어도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오면 다 씻김 받습니다. 그렇다고 내 양심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기억마저 지워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만 과거 때문에 마음이 어둡고 표정이 어둡고 떳떳해 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씻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다 묻어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다 짊어지고 우울하게 어둡게 살아간다고 “양심적이다”하고 상주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십니다. 

또 과거의 성공도 잊어야 합니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 사람이 교만해지고 말이 많아집니다. 문제는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앞으로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미래로 달려가십시오. 그리고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달려가서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입으십시오. 그것이 신앙인의 가장 건전한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삶

인간은 늘 부족한 존재입니다. 달려가면 다 되는 것 같지만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조금 달려가다 보면 곧 지칩니다. 실망도 합니다. 낙오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혼자 길을 가고 뛰어가다 보면 반드시 넘어지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도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그 보호자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실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환경을 개선하시고 우리의 처지도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리의 운명까지도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경배의 생활 즉 예배생활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고 여기까지 인도받아 살아오게 된 것을 경배하는 삶, 그 삶이 예배의 삶입니다. 그 예배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이고 찬양과 감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입니다.  로마서8장28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헌신하고 11조를 드려 예배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에 철저해 보십시오. 하나는 진정한 예배생활이고 또 하나는 11조 생활입니다. 이 두 가지 원칙에 충실하고 그리고 한번 기다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어떤 형태로 나타나시고 나를 이끄시고 나를 활용하시는 가를 아주 예민하게 살펴보십시오. 록펠러는 수십 년간을 세계 최고 재벌로 살아간 비결을 후대 사람들이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3가지 유산을 아주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1조 하는 것과 모든 예배 때에는 맨 앞줄에 앉는 일과 교회봉사입니다. 록펠러는 철저하게 예배생활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후에 평생 3가지 생활에 철저했다고 합니다. 11조 드리는 일과 선교사 후원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건강한 예배생활입니다. 

11조의 삶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의 척도입니다. 아무나 11조 드릴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매달 11조를 낼 때 나의 믿음이 시험받습니다. 수입에서 10/1을 떼어 낼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미국인이 하나님께 “10만 불만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십분의 일을 11조로 1만 불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자 “저를 못 믿으시면 미리 11조 만 불을 떼고 주시면 되잖아요”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서12장1절을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라고 했습니다. 진정 신앙인은 예배의 삶을 통해서 나를 보여드려야 합니다. 봉헌과 헌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 드리고 내 신앙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11조 삶을 통해서 나의 믿음의 척도를 확인하고 보여드리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신앙의 표현을 그냥 잊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저 자신을 철저하게 복종시켜 헌신하고 봉헌하고 11조 드리고 훈련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의 운명, 인생, 내일, 미래, 진로, 죽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삶의 동기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에서 기인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그런 심정을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얼마나 자신 있는 신앙고백입니까. 신앙인의 삶에는 적어도 그런 분명한 삶의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새해 그런 신앙고백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