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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먼저 봉사 합시다 (롬 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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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봉사 합시다 (롬 12:10-11)

  영국의 화가 윌리엄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가 한번은 그의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 해지는 광경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어깨 너머로 캔버스를 보며 그림을 지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언던 위에 있는 낡은 창고의 지붕을 꼼꼼히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헌트는 그 학생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얘, 낡은 창고 지붕에다 시간을 그렇게 많이 들이면 저 석양은 언제 그리겠니?” 해지는 광경을 그리러 왔으니 해지기 전에 빨리 그려야 하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자기 업무의 우선순위를 깨닫는 것입니다.

  미국에 구두로 돈을 엄청나게 벌은 브라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구두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제 성공의 비결은 우선순위가 분명하였습니다. 저는 매사에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그리고 셋째는 구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여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 종종 게임을 하러 친구 집을 방문하곤 했던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기억하기로 친구의 집은 굉장했으나 거실만은 어쩐지 알 수 없었다합니다. 그 까닭은 그곳은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만약 그곳에 놀도록 내버려 준다면 온통 거실을 어지럽혀 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인 것 같았다합니다. 그래서 그 방은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 채, 또 늘 빈 채로 있었다합니다. 어느 날 오후 친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만약에 엄마가 집의 청결에 관하여 그토록 신경만 쓰지 않으셔도 엄마와 나는 좀더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을 텐데.”  우선순위라는 낱말을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날 그 낱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았는데 친구의 어머님은 청결에 우선순위를 설정해 놓고 그것에 온갖 열의를 기울여 가족들의 안락함을 감독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되 성령으로 봉사하되 먼저 봉사하는 달에 우리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가정에서 먼저입니다.

딤전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많은 과부들이 자녀를 두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손자까지도 함께 생활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바울은 교회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교훈하는 바, 자식들은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과부 된 어머니를 먼저 가정에서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들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러한 일들의 실제적 실천을 위하여 자녀들을 권면함으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풍토가 조성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정말로 책임져야 할 자들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자식들로 하여금 사회의 질책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당연한 이치이기에 앞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자기를 판 형들도 버샇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눅 2:51) 었으며 '고르반'(막 7:10-13)을 예화로 말씀하시면서 부모에게 효를 행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녀로 하여금 부모에게 효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의무임을 깨달아 바르게 교훈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나아가 영혼 문제도 관심 가지고 함께 해야 합니다. 욥은 자녀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어떤 여인이 한번은 불이 난 자기 집에서 그녀의 그림들과 가장 애지중지하는 가구들을 바쁘게 끌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수고했으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 자기 자녀 중 하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 아이를 불타는 집 속에 두고 나온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황급히 다시 방안으로 돌진해 들어갔을 때 이미 그 방은 불이 활활 타고 있었고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비통한 나머지 양손을 비틀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통곡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기가 꺼낸 모든 가구들을 저주하는 것 같았으며 차라리 그것을 꺼내지 못했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잘것없는 것들을 구하려다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호기심 있는 지식 부스러기와 묘한 금언 그리고 심오한 교리 등을 불 가운데서 끄집어낸다 해도 만일 사람의 영혼을 패망시킨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양심을 고소할 뿐입니다. 귀한 영혼들이 사랑의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난제를 끄집어내어 수십 가지의 토론을 하면서 50주일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것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런 문제는 그대로 두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무한히 낫습니다.

  이웃과 사회에서도 먼저입니다.

마 5:24,25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수님은 이웃과 화목할 것을 가르치며 고발(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하십니다(마5:25절)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마 6:12) 합니다. 용서를 해주되 끝까지 해주되 지금 즉시 하라십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르가와 백부장도 선행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지혜로운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덕망이 높아 마을 사람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노인에게 자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노인은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 마을에 두 사람이 동시에 이사를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이 노인을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나직한 어조로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당신이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마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까?' '예, 참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친절하고 다정했으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 마을에서도 역시 똑 같은 좋은 사람과 다정한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노인에게 똑같이 물었다. 노인도 똑같은 질문으로 반문했습니다. '예,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 헐뜯고 다투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서로 욕하고 비평만 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이 마을에서도 똑같은 나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뿌린 대로 거두리라.' '먼저 주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라는 말뜻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이 노인의 얘기에 모두 공감하나 여기서도 의문은 있습니다. '내가 좋게 대하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에게 좋게 대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도 계속 그에게 양보만 하고 좋게 대해야만 하는가?'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 답은 '그렇다!' 라고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좋게 대한다는 뜻에는 간단히 몇 번만 잘해 준다는 것이 아니고 무한대로 잘해 주어서 끝까지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비운다는 뜻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기대 심리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값진 일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먼저 자기 자신을 바꾸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바꾸어야 원하는 대로 세상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목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화목제가 되셨습니다. 이웃과의 화목은 우리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우리의 이웃과 화목하지 아니하고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우리는 이웃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화목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양보해야 합니다.

  뉴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난로가에 앉아서 책을 읽던 뉴턴이 갑자기 큰 소리로 하녀를 부르더니 “난로불이 너무 뜨거우니 불 좀 낮추라”고 말합니다. 그 난로는 장작을 사용해서 불을 지피는 것이므로 당장 줄이기는 힘듭니다. 요즘의 전깃불이나 가스불처럼 쉽게 조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어떻게 낮춥니까? 하녀는 잠시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께서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시면 되지 않겠어요?” 불을 낮추는 것과 의자를 뒤로 물리는 것, 어느 편이 더 쉽겠습니까? 지금 뉴턴은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느라고 의자를 뒤로 물리면 된다는 사소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한 왕이 그 날의 모든 학자들과 현인들을 불러 놓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최선의 봉사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베풀 최적의 때는 언제인가?' 그러나 왕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하였다. 하루는 왕이 자기의 대적자들을 추적하다가 깊은 숲속에 혼자 남게되었다. 그는 자기 부하들을 잃고 나서 길을 찾느라고 몹시 지쳤다. 장시간 말을 달려 기운을 잃었을 뿐 아니라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견뎌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오두막집에 당도했다. 이 오두막에는 한 수도사가 살고 있었는데 그 늙은 수도사는 지친 왕을 따뜻이 맞아 주었다. 시원한 물도 마시게 해 주었다. 수도사의 침대에서 얼마를 쉬고 난 왕은 그 수도사에게 다시 물었다. '무엇이 최상의 봉사인가?' '목마른 자에게 한 잔의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베풀 최적의 시기는 언제인가?' '나그네가 먼 길을 홀로 와, 어딘가 쉴 곳을 찾을 때, 바로 그 때입니다.

  영적인 일도 관심 가져야 합니다

죠셉 스크리븐이라는 청년이 결혼식을 앞두고 약혼녀가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비극을 당하고 아주 자포자기에 빠지며 불평하며 누구에게 싸움을 거는 비뚤어진 인간으로 변했다. 그는 고향 아일랜드를 등지고 혼자 캐나다로 건너갔습니다. 새 땅에서 교회에 나가던 중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스크리븐 자신의 말에 의하면 자기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느낄 때 그동안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아무렇게나 취급해온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깊이 들어간 스크리븐은 본래 가졌던 문학의 재질을 살려 찬송가를 쓰기 시작했는데 유명한 "죄짐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도 이 사람의 작품입니다.  3절에는 이렇게  사되고 있습니 "세상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낄 때 자기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고 자기를 진실로 사랑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은혜로운 노래 가사를 짓는 넓은 사랑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영육간에 먼저 봉사 합시다.

  교회에서도 먼저입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르다와 마리아의 봉사를 생각하며 먼저 봉사해야 합니다.

  주일학교 봉사도 먼저입니다.
시골 교회에 다니다가 도시로 이사한 분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예전에 다니던 시골 교회 목사님과 오랜만에 만나게 됐습니다. 목사님이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요즈음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 직업은 교회 주일학교 부장입니다. 그리고 부업으로 시청에 다니고 있죠.” 목사님은 그분의 고백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십자가 지는 일도  먼저입니다.
  사랑 받는 자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주님이 더 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에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달라고 다시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카리우스가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 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모이는 일도 먼저입니다
  어떤 청년이 신경통으로 아무런 일도 못하고 허송세월 하던 중 교회서 부흥회 하는데 참석하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 받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물론 온 교인과 목사님이 너무 기뻐서 다음 주일 예배 시간에 참석할 것을 부탁하고, 주일 예배 시간에 참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보이지 않았음으로 찾아가서 연유를 물으니, 청년은 말하기를 '병 낳은 것이 너무 기뻐서 동무들과 같이 도봉산에 등산 갔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먼저입니다
  914-1918년에 있었던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어떤 참모 회의가 이제 막 시작할 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참석했는데 단 한 사람, 최고 사령관인 마샬 포크가 불참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를 잘 아는 한 장교가 “그가 있을 만한 장소를 알 것 같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총사령부 바로 옆에 있는 폐허가 된 교회당으로 그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파괴된 제단 앞에서 훌륭한 군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대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 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도 먼저입니다
  한 일선 부대의 부대장은 장로님이었는데, 군목님은 그 분을 고넬료와 같은 장로님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그들과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 간증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 1월 1일은 주일이었는데 그 부대 사단장님이 모든 지휘관들에게 신년 하례회를 주일 예배 드리는 그 시간에 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아니하고 사단장께 가서 하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예배를 드릴 것인가?'하고 고민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하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생각 끝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상관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좋고 진급이 안 돼도 좋다는 각오로 교회의 맨 앞자리에 나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 말씀을 듣고 헌금을 하고 슬그머니 빠져 나올 수도 있었지만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도중에 옆에서 부인이 이젠 그만 가자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끝 순서인 목사님의 축복 기도까지 다 받고 난 후 신년 하례장으로 가면서 '장로로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왔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겠다는 각오로 도착해 보니 신년하례회가 늦어져 아직 몇 분이 줄을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으로 사단장께 인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전도도 먼저 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금세기에 위대한 크리스천 평신도였던 C.S. 루이스가 캠브리지 채플에서 한번은 ‘예수의 구주 되심’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어떤 한 학생이 C. S. 루이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오늘 선생님께서 예수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모두는 선생님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예수는 구세주이다’라는 케케묵은 기독교의 교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C. S. 루이스는 그 청년에게 이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정말 예수가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 이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지요.” “그러면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자네가 완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청년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완전하게 따라갈 수는 없겠지요!” “아, 그러면 자네도 도덕적 실패를 인정하는군. 그렇다면 자네의 삶 속에서 실수가 있었고,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아, 인정하지요”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모델로서의 예수가 아니네. 자네의 도덕적인 실패와 죄에서부터 자네를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이신 예수가 먼저 필요하다네. 죄인에게는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예수가 필요하다네.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자네에게 도덕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다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되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먼저 봉사 하되 가정에서 이웃과 사회에서 교회에서 먼저 봉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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