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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교회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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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교회
본문: 로마서 12:1-2

오늘은 2008년을 시작하는 새해 첫 주일입니다.

옛 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 신년감사주일 단추를 잘 꿰어서 승리하는 2008년이 될 수 있도록 새롭게 결단하는 귀한 주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신년감사주일입니다.

순서에 따라 로마서 5장을 강해해야 맞지만 우리 교회의 2008년도 교회 표어를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교회’라는 슬로건을 걸었고 주제성구도 우리가 강의하는 로마서이기에 오늘은 순서를 조금 바꾸어서 본문 롬 12:1-2절을 중심으로 우리 교회의 2008년도의 표어를 제목으로 함께 은혜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 달 21일에 저의 신학교 동기생이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그 친구는 저와 함께 1987년에 신학교를 졸업했으니 만 20년 만에 목사 인수를 받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색깔 자체가 신학적인 측면에서 저하고는 정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친구입니다.
굳이 이렇게 구분을 한다는 것이 어패가 있지만 통상적인 이해를 한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 중심적인 목회를 했고, 친구는 교회 밖의 중심적인 목회를 했습니다.
저는 개인구원에 대한 부분에 치중을 많이 했다면, 친구는 사회구원의 부분에 더 많은 사역을 했습니다.

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목회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걸었다면, 친구는 사회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노력을 했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를 위하여 사역을 행했다면, 친구는 거리의 노숙자들을 돌보고 도시의 빈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번에 안수를 받는 친구와 저는 신학적인 색깔이나 목양의 틀 자체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교제해왔고 서로를 격려하며 응원히했고 이번에 친구가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참 가슴 깊은 곳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어떻게 색깔이 다른 데 교제를 해왔습니까? 를 묻는다면 조금 만 더 신학적인 부분에서 깊이 접근하면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IMF 시절에 한 번은 그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은 변화될 수 있는 존재인가? 에 대하여 고민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야기인 즉은 IMF가 터지고 많은 실직자들이 거리의 노숙자가 되고 심지어는 생명들을 스스로 끊던 시기에 섬기는 교회에서 노숙자들을 교회로 데리고 들어와 섬기고 자생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시에서 나오는 조그마한 보조를 갖고 그들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정말로 최선을 다하며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전도사가 그들에게 삶의 성실성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우유 배달을 같이 하기도 했습니다.
재활센터에서 노동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수입으로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물질이 생기면 그 물질을 갖고 술로 탕진하며 매일 인생을 탓하며 동료들과 싸움질을 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인간이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정말로 심각히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안수를 받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노숙자들, 부랑아들이 변하고 안변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친구의 사역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 중의 진정한 사역이 바로 고아와 과부와 객들을 섬기는 사역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한국교회의 밑바탕을 받치고 있는 힘이 바로 그 친구와 같은 사역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를 되 뇌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분명하게 이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복음주의적인 신학적인 기초를 통하여 개교회를 돌보고 사역하는 한 그룹과 친구의 사역처럼 개교회주의를 뛰어넘어 사회의 구조적인 악들과 싸우며 하나님의 의를 실천해 나아가는 진보적인 또 다른 그룹을 통하여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이 두 가지의 부류를 나누어서 누가 옳고 그르고를 말하는 것 자체는 어리석은 것이고 유치한 것임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의 위기 속에 있는 한국교회가 지금의 시점에서 눈을 돌려야 하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라는 영역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어제 전도사님 한 명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에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기독교 그룹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뉴스에 이런 글이 실렸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려면 안티기독교인들을 감동시켜라’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부분적으로 정말로 교회를 반대하는 영역에 까지도 한국교회가 낮아짐의 모습으로 섬겨야 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신년감사주일에 나오신 교우 여러분!
아주 근본주의적인 색깔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교회가 외쳤습니다.
이러한 외침이 한국교회의 초창기에는 복음을 공격적으로 전하는데 일익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외침은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극단의 위험성을 노출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분법적으로 정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세상이라는 영역은 절대로 정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는 영역을 이원화시켜서 흑백논리로 세상은 죄의 영역이고 교회는 선의 영역이라고 그 동안 잘못 가르친 한국교회의 방향성을 이제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분명한 때가 임박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의 영원한 복음인 요 3:16절은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헬라어 원어성경에는 ‘세상’으로 번역한 단어를 우리가 잘 아는 ‘kosmos’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단어 ‘코스모스’는 ‘세상’,‘우주’라는 단어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본문의 의미로 적용한다면 아주 중요한 단어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모든 인간, 혹은 세상의 헛된 모든 재산, 부, 이익, 즐거움’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 3:16절을 어떻게 적용하여 오늘 우리 교우들이 말씀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절대로 정죄하여 지옥에 갈 존재들로 낙인찍어 버리는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이토록’사랑하셨습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기억에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그 소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의 팔을 양쪽으로 쫙 벌리면서 “이만큼”하시면서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며 운명하셨다는 글이 생각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이렇게 이토록 사랑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도,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의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세상의 사람들과의 어떠한 관계성을 맺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선을 긋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인 면에서 똑같이 구원을 받았다는 그런 말이 아닌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혹은 세상을 향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하여야 할 태도가 무엇입니까?
2절 본문에 있는 말씀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입니다.
적어도 로마서 1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의 세속적인 가치와 이론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멘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품어야 하는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을 품고 섬기며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하심입니다.

세상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변화시켜야 하는 섬김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것이 주님의 엄위하신 명령인데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탈레반에 납치된 형제들과 자매들의 일이 있을 때 주님을 위하여 순교한 형제들의 소식이 전하지자 안티 기독인들이 내뱉은 악플의 말들은 기독교가 사회의 영향력을 잃어버려서 기독교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나무라고 비판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탄의 철저한 영역으로 들어가 영적인 전쟁을 벌이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을 품고 그들을 섬기는 것은 그래서 말처럼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감당해야 하는 세상을 섬기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두 가지로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1. 축도 이전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축도 이전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본문의 첫 번째 개요를 바른 예배자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의 담임목사의 아주 보수적인 목회적인 철학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축도 이후가 아름다운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 바르게 드리는 예배자가 되는 것을 전제한다는 말입니다.

1절 본문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는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을 합니다.
① 1장-11장 :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말합니다.
② 12장-16장 :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를 질문합니다.

본문은 두 번째 단락의 첫 번째 구절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첫 번째의 말씀이 굉장히 도전적입니다.
무엇을 요구합니까?
영적인 예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분명히 영적인 예배라고 못을 박고 있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logikos’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원 뜻은 ‘영적’이라는 의미보다는 ‘합리적인’, ‘이성적인’ 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합리적인 예배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어에 가깝게 번역한 다른 성경의 번역은 도움이 됩니다.
공동번역 롬 12: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표준 새번역 롬 12:1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의 예배는 ‘진정한 예배',‘합당한 예배’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왜 엉망진창인 삶을 삽니까?
분명한 사실인데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지 못했든지, 아니면 그 기름 부으심에 전혀 관심이 없든지 입니다.
두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런 정답이 나옵니다.
‘예배를 실패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참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증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수종을 드는 역할을 레위지파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역을 분깃으로 맡은 지파였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초창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국가체제를 구축하는데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점차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중재자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성직자들이 아닌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변질시켜 나아갔고 그래서 결국 이들은 유다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주원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서에서 이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에스겔 44:12-13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죄악에 거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로 그 죄악을 담당하여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욕과 그 행한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레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레위지파가 우상을 섬깁니까?
물론 이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인들이 범한 결정적인 우상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사역 자체가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도전과 은혜를 공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성전의 일 자체를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은 뒤로 물러나 있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똑같은 레위지파의 계보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일 자체를 섬기는 우상에 빠지지 않은 제사장 지파가 있었습니다.
사독의 자손들이었습니다.

에스겔 44:15-16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무슨 말입니까?
사독의 후손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집중했다는 말입니다.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 들어” 라는 말이 참 도전이 됩니다.
왜 우리가 주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까?
주님이 바로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 땅을 진정으로 질사는 방법을 말씀을 통하여 제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배를 건성으로 드리는 자들은 합당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가끔 목도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기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다든지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든지, 껌을 씹으며 예배를 드린다든지, 신문을 보는 사람들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주의 영의 기름 부으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자로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여고에 다니는 엄마를 통하여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고의 심화반에 자기의 딸이 다니는데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연필을 떨어뜨리면 일제히 그 떨어뜨린 아이를 쳐다보며 비난의 눈길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을 이렇게 했습니다.
‘살벌한 여고 3학년’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세상의 아이들도 이렇게 집중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을 사는 동안 살아가야 할 영적인 방법을 내려 받는 예배 시간이야말로 주님의 은혜를 공급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자꾸만 기대하시는 기대가 커서 두렵고 떨려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에게서 두 가지의 은혜를 주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① 성령의 소리를 예배를 통하여 들을 수 있는 영적 조명의 은혜
② 하나님께서 그 자매에게 기대하시는 축복의 은혜

저는 그는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 날 새벽예배에 나와서 그 자매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자매에게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더 선명하게 듣게 하시고 주님의 기대하심은 마음껏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 축도 이전이 아름다워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됨을 육비에 새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축도 이후는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2절 본문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접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과연 이 한 구절을 성도들에게 적절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없을까 하다가 생각한 단어가 바로 ‘삶의 예배’라는 단어였습니다.

1절에서 말하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산제사의 그리스도인들이 되라는 권면은 우리가 축도 전 행위로 드리는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2절의 말씀은 예배의 행위가 끝난 축도 이후의 지속적 예배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자는 교회에 나와서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또 한 가지 우리들의 삶의 양식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삶의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위력은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됩니까?
교회 안에서 외칠 때 이루어집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교회의 위력과 그리스도인의 위력은 축도 후에 시작되는 우리들의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가? 에서부터 발휘되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산상수훈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5:13-16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 사람도 이 구절을 아니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 말씀이 왜곡되어 전해졌습니다.
어떻게 왜곡되었습니까?
자꾸만 이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
그래서 이렇게 해석된 말씀은 항상 _ING 이기에 조금 그리스도인들이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넘어갑니다.
눈감고 넘어 갑니다.
정말로 _ING 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마태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세상을 비추어야 하는 빛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부패에서 해방시켜야 할 소금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상태임을 주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세상을 위하여 녹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어두움을 비취는 빛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삶의 예배이며 축도 이후의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기독교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냥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을 찾고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삶의 예배를 우리 성도들이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받은 은혜와 도전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어져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져서 주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고 사회에 그 영향력을 제시해야 하고 방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미 상투적으로 판에 박혀 있기 때문에 감각이 사라졌다면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하여 성령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가 되기 위한 삶을 말하려면 상당히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2008년을 시작하는 신년감사 첫 주일에 단 한 가지로 선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정말로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정답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사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하기가 정말로 어려운 것을 주문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다시 살고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품고 사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들이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는 없습니다.

멘토 목사님의 책 중에서 “인간의 일생”이라는 책에서 읽은 것이 기억에 있습니다.
전문을 찾아서 여러 교우들에게 그대로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2002년 12월 인도 코친의 유대인 회당을 찾았다가 배낭여행 중인 젊은 한국 여성을 만났다. 그 전해에 대학을 졸업한 청년은 그 해 9월 서울을 출발하여 중국 대륙을 횡단, 히말라야 산맥을 돌아 인도 서쪽의 코친에 이르기까지 15개월이 소요되었으며, 한국엔 이듬해 그러니까 2003년 4월경에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장장 19개월에 걸친 대장정의 막바지에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걷고 싶으면 걷고, 어느 곳이든 마음 끌리는 곳에 배낭을 풀고 잠자기를 19개월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도 낭만적인 일인가? 그러나 그 긴 낭만을 즐기기 위해서는 필요 경비가 만만찮을 터였다. 여행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는지를 묻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건축사 자격시험에 합격, 취득한 자신의 자격증을 설계사무소에 대여해 주었다. 그 대가로 설계사무소가 매달 일정액을 자기 통장에 입금해 주면, 자신은 필요 경비를 신용카드로 직접 결제하거나 현금으로 인출해 사용한다고 했다. 돈을 받고 자격증을 대여해 주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으냐고 묻자, 그녀는 “불법이긴 하지요”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뭘 그런 걸 따지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날 마음이 얼마나 씁쓸했는지 모른다.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의 건축사 자격증을 돈으로 빌리지 않고서는 존립조차 할 수 없는 설계사무소라면 정상적인 업체일 수 없다. 한마디로 불법 설계사무소다. 그런 엉터리 사무소에서 과연 제대로 된 설계도면이 나올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부실공사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그 도를 넘었다.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인명피해마저 막심하다. 부실공사란 부당한 이득을 위해 관련 법규를 무시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법을 어기고 행해지는 부실공사란 ‘살인행위’와 다름없다. 그동안 이 땅에서 부실공사의 피해자로 목숨을 잃은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여성 역시 자신의 해외여행 경비를 조달키 위해 불법으로 건축사 자격증을 대여, 결과적으로 ‘살인행위’에 가담하고서도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법 경시 풍조는 절대로 기성세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 역시 남녀를 불문하고 아예 법 준수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이 지경을 누가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까?
이 비정직의 판을 누가 갈아 업어야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까?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살면서 정직해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교회, 성도, 세상까지도 축도 이후의 삶이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결론)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또 한 해의 52주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힘차게 달려갈 것입니다.
내 힘으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축도 이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은혜를 공급 받으십시오.
더불어 축도 이후의 삶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말씀대로 사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2008년 하나님의 위대하신 승리를 기대해 보십시다.
2008년 축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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