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한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교회 (눅 15:3-7)

  • 잡초 잡초
  • 401
  • 0

첨부 1


한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교회 (눅 15:3-7)

(눅 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여러분은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중요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소중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귀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소중한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에 의해 정말 그렇게 대접받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도 고귀하게 여기고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우리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구성원입니다.  어떤 분은 '에이 나같은 사람은 있으나 마나지, 뭐가 소중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믿음도 별로인데 사라져 주는게 도와주는 게 아닐까?'  '나는 교회에 헌금도 별로 안 하는데..' '나는 교회를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 가치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를 보고 가치를 결정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를 보고 가치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영혼을 보고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군중속에 묻고 그 중에 하나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전체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일대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에 집중하셔서 나 한 사람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리중의 한 사람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개인적으로 반응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믿지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믿지 못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믿지만 나를 일대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잘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신앙고백에 묻어서 가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예배에 묻어서 가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배의 흉내만 내고, 형식만 취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이 너무나 고귀해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예배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는 마치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같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3년여의 짧은 공생애 동안에도, 바쁘다는 이유로 어떤 한 개인에게 소홀히 하신 적이 결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군중에게 강론하고, 갈릴리 바닷가에 모인 5,000명을 먹이며, 가버나움에 모인 큰 무리를 대상으로 사역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한 영혼일지라도 그 가치를 결코 등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느 날 밤 니고데모라 하는 한 청년과 나눈 깊은 대화의 장면을 요한복음 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가장 고귀한 말씀을 수 만명이 모인 자리에서 하지 않으시고 단 한 사람 니고데모를 앞에 놓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지방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으려고 먼 길로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사는 한 여인, 그것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한 여인을 구원하시려고 일부러 그 동네를 찾아 들어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는 뽕나무에 올라가 주님을 더 잘 보려 했던 삭개오라는 이름의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개인적인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분명히 온몸에 사무치는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거라사지방에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아다니는 한 남자를 구원하려고 찾아 가시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라사지방에서는 다른 사역은 전혀 안하시고 오직 귀신들린 한 사람만을 회복시키시고 떠나십니다. 전날 밤에 갈릴리 호수를 배를 타고서 무서운 광풍을 지나 오셨는데 군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른 병든자들을 치료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귀신들린 한 사람만을 만나시고 귀신을 쫓아 정상인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 눅 15:7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죄인 아흔 아홉보다 의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하늘에서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무리 양보를 해도 그 까짓 죄인 한 사람보다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실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죄인은 하나님앞에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같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도 골치거리로밖에 여기시지 않겠지?' 라는 생각에 움츠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너는 소중한 존재야, 너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하늘에서는 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아버지께서 천사들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고 계셔.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걸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네가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을 드렸어. 너는 결코 시시한 존재가 아니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믿어집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의인은 별로 관심이 없나보다.'라고 생각하면 성경을 잘못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 한 사람을 얼마나 애타게 찾으시는지 모릅니다. 소돔성이 의인 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 멸망당한 사실을 아십니까?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나님은 의인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온 세상을 샅샅이 찾으십니다.  능력을 베풀어 주시려고 찾으십니다. 그렇게 의인을 귀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더 큰 기쁨으로 맞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의인이건 죄인이건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사실 백 마리중에 하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양 백마리중에서 한 마리 없어져도 표도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말썽장이라면 "에이 귀찮은 녀석 사라져서 잘 되었군."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습니다. 본문의 잃은 양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죄인입니다. 의인이 아니고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찾고 또 찾으십니다.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시는지 없어지면 없어진 사실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레서 기어코 찾아 내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맹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까지 목숨을 걸고 찾아 나섭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죄인이라 할지라도 귀중히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보며 길을 잃고 방황하면 부지런히 다가가십니다.  곤경에 처하면 구해주려고 찾아 가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큰 공로가 있어야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이 교회를 위하여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거야!'  '나같은 말썽꾸러기는  하나님도 나를 귀찮게 여기실거야!'  '내가 성경말슴대로 살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기도생활도 하지 못하는데 목사님도 별 관심이 없고, 교인들도 사랑하지 않겠지!' 

  교회는 의롭고 성자같은 사람만 중요하게 여기고 죄 가운데 살며 세상의 때가 가득 묻은 사람은 업신여기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은 잃은 양을 찾기위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태초부터 지금까지 달려오시는 분이십니다. 집념의 하나님, 열심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분들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 교회에 별로 필요없는 존재로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자책이 많이 됩니다. '내가 목자로써 사랑을 더 쏟아부어주지 못해서 교회를 떠나는구나!'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돈을 잘 벌어오는 가족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을 많이 하고 모든 어려운 것을 잘 처리하는 사람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젖먹이도 중요하고, 사고뭉치도 중요하고, 돈을 벌기는 커녕 쓰기만 잘하는 청소년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믿은 중직자들도 중요하지만 이제 믿은 새 가족도 중요합니다.  말씀대로 순종잘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신앙의 기복이 심하고 자주 넘어지는 연약한 사람도 소중합니다.  헌금 많이하고  궂은 일에 몸 사리지 않고 앞장서서 다 감당하는 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활기차고 잘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에도 소극적이고 교회봉사에도 소극적인 교인도 그에 못지 않게 귀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가족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시려고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세 가지 비유는 같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한 사람도 하나님은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세 가지 비유 또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양 일 백 마리 중에 한 마리 잃어버렸다가 찾은 것이, 동전 한 개 잃어버린 여인이 그것을 찾는 것이,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실패한 아들이라도 돌아왔을 때,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안고 행복해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의미입니다. 열 개 중의 한 개 동전을 찾는 것이 뭐가 즐겁냐고 말하겠지만 주위의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과 잔치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양 일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찾았다고 잔치를 베풀며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공동체에도 잃어버린 많은 자들이 있습니다. 어깨에 메고 데려와야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두 번째 동전의 이야기처럼 우리 교회 내에서 잃어버려서 우리 내부를 정돈하고 등불을 켜서 우리 주위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세 번째 잃어버린 아들처럼 그냥 하염없이 간절함으로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양하게 잃어버렸기에 다양하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으러 나선 목자의 심정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은화를 찾는 여인의 마음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나간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왜 그처럼 우리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별로 중요한 존재 같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크게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은데도 왜 그처럼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쉰들러는 2차대전중에 유태인 600만 명의 학살 현장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해낸 위대한 인물입니다. 쉰들러가 전쟁이 끝나고 초청을 받아서 이스라엘에 가게됩니다. 쉰들러는 예루살렘에 가서 유태인 학살 기념관 가서 기념식수도 하고요, 이분이 유태인들의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텔아비브 영웅의 공원에는 이 사람을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귀의 마지막에는 이 오스카 쉰들러를 추억하면서 유태인들이 이런 말은 새겨 놓았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소중히 여기시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한 변화가 온 세상에 큰 파장을 불러 올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해질 때 온 세상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을 때 온 세상에 구원이 확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5) "고 말씀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