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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습관을 기르십시오! (엡 4: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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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습관을 기르십시오! (엡 4:17-32) 

<습관의 중요성>

지난주에 우연히「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섯 살 먹은 여자아이가 잠투정을 많이 했는데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오후 2시만 되면 낮잠이 몰려오는데 그 버릇이 대단했습니다.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침을 뱉고 주먹을 휘두르기 일쑤였습니다. 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울고불고 고함을 지르고 엄마 아빠를 때리고 그야말로 부모는 눈 한번 제대로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투정만 없으면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아이였습니다. 얼굴도 예쁘지 똑소리 나게 말도 잘하지 노래도 잘 부르지 그야말로 재롱동이요 똑순이였습니다. 그러나 잠이 몰려오기만 하면 순식간에 사납기 짝이 없는 떼쟁이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잠버릇이 얼마나 고약했던지 엄마는 몇 차례 유산까지 해야만 했습니다. 

유아 교육 전문가가 치료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아이에게 잠이 몰려올 때 무조건 잠을 재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였습니다.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들기 때문에 함께 더 놀아주라고 했습니다. 특히 행복한 수면을 위해서는 세라토닌과 멜라토닌 같은 뇌의 물질이 중요한데 낮잠을 자기 전에 밖에 데리고 나가 잠시 산책을 하라는 제안도 했습니다. 햇볕을 충분히 쬐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전문가의 지시를 따랐더니 1주일만에 아이가 확 변했습니다. 못된 잠버릇을 완전히 고쳤습니다. 잠투정 공주가 잠자는 공주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프로를 보면서 버릇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봤습니다. 사실 이 프로를 보기 전부터도 버릇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항상 고민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습관은 제 이의 천성"이라는 말도 있지요. 한번 습관을 잘못 들여놓으면 그 못된 습관이 일생동안 우리를 따라 붙어 때로 우리의 성격과 운명까지 망치고 맙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신앙생활도 버릇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것도 버릇이요, 주일성수를 비롯한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버릇의 문제가 아닙니까? 성경 보는 것도, 헌금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찬송 부르는 것도, 다 버릇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도 여전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남 흉보기 잘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도 다 버릇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버릇, 거룩한 습관을 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예 예수를 믿은 그 첫 출발부터 좋은 버릇, 거룩한 습관을 들여놓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초신자들은 대개 자기를 전도해준 사람을 따라 하기 쉽습니다. 자기를 교회로 인도해준 분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일 경우 그대로 닮습니다. 칼같이 주일성수를 하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나오면 그대로 따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도해준 분이 얼렁뚱땅 대충대충 신앙의 열정이 없으면 으레 예수 믿는 것이 이런가보다 하고 따라 합니다. 주일성수도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헌금생활도 정성 없이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좋은 버릇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목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선배에게 영향을 받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가방이나 들고 다니며 매일 정치판에 기웃거리는 선배에게 영향을 받으면 어깨 너머로 그것만 배웁니다. 기도하고 말씀 준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줄을 대기 위해 힘있는 사람들만 만나러 다닙니다. 이런저런 서클만 만들려고 합니다. 항상 자리에만 눈길이 갑니다. 운동 좋아하고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못된 것만 배워서 나쁜 버릇에 지배를 당하는 사람은 건강한 목회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늘은 아직 1월 둘째 주일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좋은 버릇, 거룩한 습관을 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를 보면서 아동 교육전문가들의 식견에 감탄합니다. 그 분들의 처방과 지시만 따르면 아이가 확 달라집니다. 정말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하는 것이지요. 저도 교인들이 신앙생활할 때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고민할 때마다 그 나쁜 버릇을 좋은 버릇으로 고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옛사람의 옛 습관 VS 새사람의 새 습관>

이제 이런 맥락에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 믿고 교회 안에 들어왔으면 새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예전에 세상에서 하던 나쁜 버릇은 모조리 청산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지사 예수를 믿었으면 옛사람은 벗어 던지고 새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다 못된 버릇을 고치시고 좋은 버릇, 거룩한 습관으로 새출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7-24절에서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 다음 25-32절에서는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윤리적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벗고 새사람은 입고(17-24절)
먼저 17-24절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를 몰랐을 때의 예전의 삶과 예수를 안 지금의 삶이 달라져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의 삶은 아담 안에서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인류의 타락한 조상 아담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원죄와 자범죄의 지배를 받아온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전의 삶을 17-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세상에서 막 살았던 우리의 삶이 꼭 그랬습니다. 허망한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한 채 안다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무지와 고집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죄를 지어도 감각이 없었습니다. 무감각(insensitivity), 이 말이야말로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지난 날의 삶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입니다!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수치의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 우리의 몸을 방탕에 내맡긴 채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삶을 살았던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았습니다. 죽음 속에서 생명을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이제 아담 안에서 살았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22-24절에서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예전에 우리는 세상의 생활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썩어 없어질 것을 구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는 그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합니다. '옷을 벗고 입는다'는 비유는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항상 세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던지고 새사람을 입어야만 합니다.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새 자아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새사람의 새생활 습관에 대한 규범(25-32절)
그렇다면 새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만 합니까? 25-32절은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의 구체적인 규범(rules)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알기 전 예전의 삶이 나쁜 버릇의 지배를 받았다면 예수를 안 뒤 새로운 삶은 새로운 습관으로 변해야 합니다. 여기 25-32절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영역에 있어서 우리의 습관이 변해야 합니다. 언어와 감정과 행위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언어습관이 거룩한 것으로 변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인격을 비취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한 사람의 인품은 그가 쓰는 언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인격에서 악한 언어가 나올 수 없습니다. 악한 인격에서 선한 언어도 나올 수가 없지요. 세상에서 살 때 우리는 되는 대로 막 말을 내뱉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의 언어가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어도 습관의 문제입니다. 말하는 데에도 독특한 습관이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할 때마다 "마∼, 마∼"하는 말을 씁니다. 일본식 잔재이지요. 사람마다 독특한 어투가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언어습관을 바꾸자는 말은 이와 같이 독특한 어투를 바꾸자는 말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언어를 진실한 것으로 바꾸자는 말입니다!

25절과 29절을 보세요.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말을 하되 더러운 말, 나쁜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에게 덕을 세우고 은혜가 되는 말만 골라서 하라는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언어습관이 거룩하고 진실한 것으로 바꾸어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의 감정습관이 거룩한 것으로 변해야 합니다.
감정도 버릇입니다. 자꾸 부정적이고 슬픔 감정에 사로잡혀 되풀이 되다보면 저절로 그런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비가 올 때 우울해진 감정이 버릇으로 되풀이 되다보면 비가 오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우울해집니다. 우리의 생각이며 언어며 다 습관의 문제인데 감정 역시 습관의 지배를 받습니다.

어거스틴은「고백록」에서 어머니 모니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어머니 자신도 죽어서 더 좋은 곳인 천국으로 갔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어거스틴 역시 어머니가 천국에 들어갔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어거스틴은 슬픔을 자제했습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에는 슬픔이 하나의 발작처럼 엄습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이 습관의 힘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으레 그런 종류의 슬픔에 습관처럼 젖어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헤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의 감정은 천성적인 기질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 천성적인 무드가 우울한 사람이 있고 명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도 습관의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의 확고한 의지와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얼마든지 좋은 감정, 거룩한 감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26절과 31절을 보세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살다보면 화를 안내고 살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죄를 지을 정도로 화를 내거나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악한 감정들, 즉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을, 악의와 함께 버려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악한 감정을 선한 감정으로 바꾸십시오! 

셋째로, 우리의 행위습관이 거룩한 것으로 변해야 합니다.
습관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 때문에 시작됩니다. 예컨대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이것을 해소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한 쪽에서는 잠을 자서 풀자, 다른 쪽에서는 운동을 해서 풀자, 또 다른 쪽에서는 술을 마셔서 풀자, 몇 개의 생각들을 내놓습니다. 이제 이 생각은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 쪽으로 넘어갑니다. 괴로운 일이 생겼을 때 이것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잠을 자는 것, 운동하는 것, 술을 마시는 것, 세 가지를 생각해냈을 때 술을 마시자는 의지가 워낙 세어서 다른 두 의지들을 꺾게 될 때 술을 마시게 됩니다. 문제는 기분 나쁠 때 이것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해서 그 의지를 도무지 다른 의지들이 대항할 수 없게 될 때 계속해서 되풀이합니다. 그리하여 기분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술을 마시게 되어 이것이 하나의 습관으로써 고착될 때 결국 나중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습관의 마지막은 중독증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습관은 하나의 사이클, 순환고리를 만듭니다.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격을 낳고, 성격은 마침내 우리의 운명을 낳습니다. 그런데 나쁜 습관은 반드시 우리의 왜곡된 의지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기분이 안 좋을 때 잠을 자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술을 마셔서 해소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생각은 압니다. 그러나 의지가 육욕과 죄악으로 뒤틀려 왜곡되어서 더 건전한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더 불건전한 것은 하도록 만듭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왜곡된 의지와 나쁜 습관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서 우리를 습관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는 항상 육욕과 죄악된 쪽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왜곡된 의지부터 거룩한 것으로 고쳐야만 합니다. 이제 예수 안에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악한 의지를 제압하셔서 거룩한 의지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전에 우리가 우울하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의 나쁜 옛 의지가 음란한 것이나 술과 도박 등으로 해소하도록 우리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안 뒤 좋고 거룩한 새 의지가 우리를 사로잡아 기도하거나 찬송하거나 경건 서적을 읽는 등의 거룩한 방법으로 해소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여러분, 28절과 32절을 보세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기 우리 행위의 습관이 어떻게 변화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듭니다. 도둑질하는 습관과 용서 못하는 습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아주 작은 것부터 조심해서 항상 제 손으로 수고하여 떳떳하게 벌이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 안에서의 새롭고 거룩한 습관은 두 가지의 경계로써 요약될 것입니다. 27절 말씀처럼 마귀에게 틈을 주는 버릇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3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만드는 버릇 역시 피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습관을 쫓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습관의 폭력을 벗어나려면>

어거스틴은「고백록」에서 자기의 제자 알리피우스의 나쁜 버릇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는 착하고 학식도 있고 덕성도 좋은 젊은이였으나 원형극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 경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이 강의를 할 때 투사 경기에 미친 사람들을 비웃는 말을 했을 때 알리피우스가 깨닫고 나쁜 버릇을 뉘우쳤습니다. 즉시 이와 같은 투기적 오락경기를 떨쳐내고 다시는 원형극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알리피우스가 로마로 유학을 갔을 때 또 다시 투사 경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친구들이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그는 친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큰 소리를 쳤습니다. "너희들이 내 몸을 거기에 끌고 간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과 내 눈을 결단코 그 경기로 향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알리피우스는 두 눈을 딱 감고 초연해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한 선수가 칼에 찔려 넘어져 우레와 같은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 때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습니다. 그러고서는 그 피 흘리며 쓰러진 검투사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군중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이지요. 그 때부터 옛날 습관이 다시 도져서 이제는 자기가 친구들을 충동질해서 앞장 서 이끌고 원형경기장으로 갔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실화를 소개하면서 못된 습관을 끊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습관의 폭력'이라는 말까지 쓰고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 거기에서부터 우리를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하나의 노예처럼 얽어매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거스틴은 알리피우스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참 중요한 말을 하나 던집니다. 비록 친구들의 강요로 경기장까지 끌려왔던 알리피우스가 자기는 절대로 검투사 경기에 흥분하거나 그 어떤 동요도 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어이없이 실패한 이유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옛날의 나쁜 습관을 끊고 새롭고 거룩한 습관을 기르는 일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는 나쁜 옛 습관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그런 뒤 하나님께 기도해보세요. "하나님, 좋은 습관을 주세요. 거룩한 새 습관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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