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잡석이 보석되는 2008년 (전 10:10)

  • 잡초 잡초
  • 423
  • 0

첨부 1


잡석이 보석되는 2008년 (전 10:10)
 
이제 2008년도 신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단지 한 해가 바뀌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주변여건이나 내 자신이 달라진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워질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참 많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신년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다섯 가지 결의 사항을 결의하고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기도제목을 하나님 앞에 제출하였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이며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애절한 청구서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청구서를 드리면서 그 청구서를 드림에 합당한 우리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입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왜 이렇게 사는 게 힘겹고 피곤할까?’ 라고 느끼거나,
‘나는 수고하고 애는 쓰는데 아무런 결과가 없어. 왜 이렇게 나는 결과가 없는 것일까?’ 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한 번쯤 혹시 내 손에 든 철 연장 날이 무디어져서 나무를 베어도 잘 베어지지 않고 풀을 깎아도 잘 깎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실까?
또 시대와 역사 속에 나에게 더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나 자신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상황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내 손에 들고 있는 내 연장 날이 무디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한 파악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오늘 말씀은 ‘너 자신을 파악해라’ 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파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즉, 힘이 더 드니까 너희는 그 철 연장 날을 잘 갈고 다듬어서 그 일을 잘 이루어라 라는 뜻입니다.
즉, 약점을 파악하였을 때 약점과 부족한 점을 보완하라는 뜻입니다. 부족한 것의 파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을 말씀합니다.

세 번째는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즉, 어떤 일을 계획할 때 그 계획한 일을 이루기에 합당한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품성을 소유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이루는데 그 일을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계획, 그리고 성품, 능력, 접근방법, 이 모든 끈기와 집중력을 포함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여 소지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가 있을 겁니다.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라는 뜻일 수도 있고, 우리를 잘 세련되게 갈고 닦으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2008년을 우리는 어떻게 이루고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한 해를 맞이하면서 시작을 할 때마다 우리는 뭔가 새로움을 가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이러한 엉뚱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내 인생인데, 뭐 특별히 1년 사이에 그렇게 바뀌어 질것이 있나? 나는 이미 결정된 삶인데... 내 인생은 너무 많이 와 버렸어. 나는 이제까지 뭐라도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또한 해 봤지만 결국 흘러가 버리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아주 중요한 방향의 전환과 이제까지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일을 한 번 체험하여 이루게 되면 한 번 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이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방향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진 방향의 전환이 흐름을 가지고 유지되어져 갈 때 우리는 일정한 시간의 경과 후에 분명히 새로운 작품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올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올 1년이면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주보 칼럼에 제가 제목을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라고 썼는데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정말 일 년이면 우리 인생의 전환을 이룰 수 있고, 전기를 마련하고, 용기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사례를 가지고 또 힘을 차릴 논리적인 근거를 만드는데 충분합니다.
이 교회가 앞으로 이 민족과 역사와 사회에 분명히 저는 기여할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물을 키우기로 생각했기에 이 교회의 존재, 하나로 끝나지 않고 키운 인물들이 온 민족과 세계사회에 큰 기여를 이루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왜 일 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하면 우리 여기 계신 여러분은 우리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셔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이 다른 중보자 필요 없이 예수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하여 뜻을 이루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에서 교회 은혜의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이루어가게 하셨기에 우리는 이 교회가 우리 성도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 일 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면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짧은 역사지만 일 년 동안에 교회는 그 기틀을 마련한 것이 있습니다.

1991년 10월 5일에 설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상가의 한 귀퉁이에 30평정도의 교실을 한 칸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생각은 개척은 12개월 내로 끝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년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1,2,3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간계산을 해 보니까 어차피 여러 번 예배를 드려야 될 것 같아요. 교인은 하나도 없었는데 3부 예배를 처음부터 드렸습니다.
1부 예배를 드리는데 제 오른쪽에서-이렇게 두 줄 있었는데 오른 칸에서 두 번째 줄에 딱 한 분이 여자분 한 분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1년이 되니까 장년이 430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4부예배로.
그리고 13개월이 되어서 그 다음 11월이 되었을 때 지금의 이곳에 이곳이 종교부지인데 이러저러한 과정이 있어서 계약을 하고 예배당을 짓기로 했습니다. 1년 된 교인은 저 혼자밖에 없었죠. 물론.
저희 가정과 그리고 대부분 1,2,3개월 된 교인이겠지요.
그리고 겨울에 땅을 팔수가 없어서 이듬해 봄에 땅을 파고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22개월째 되는 8.15광복절 주일에 이곳의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차장에서 예배실을 마련해서.
그리고 2주년 되는 날에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공사가 늦어져서 26개월째 되는 성탄절에 올라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17년이 지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예배당에서 저희는 어른과 아이 합해서 요즘 매 주일마다 9000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고, 이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는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약 2만 명 정도가 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1년-13개월이었습니다. 즉, 13개월이었습니다.
1년 안에 모든 일의 기초가 이루어지고, 결정이 되고, 방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1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 한 번 합시다.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다시 한 번이요.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기 때문에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방향의 전환을 이루고 일 년 가운데 결과도 낼 수 있습니다. 온전한 결과는 아니지만 그 온전한 결과를 낼 수 있는 분명한 구조와 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2008년 한 해가 내게 있어서 어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이룰 수 있는 한 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주의 뜻을 이루셔야 합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또 한 해를 살아가시고, 또 한 해를 살아가셔야 합니다.

성도 자체가 곧 교회기 때문에 이제 이 교회가 17주년이 다가오고 있는데 3기 사역을 마치는 21주년이 되면 이 교회는 이 역사와 사회 앞에 분명히 제시할 바가 있다라고 저는 믿습니다. 가시적으로 우리 성도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구체적으로 그 한 가지 한 가지를 생활 속에서 확대해서 이루어 가시게 될 겁니다. 성도가 곧 교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매년 그래왔듯이 1월 첫 주 예배 때는 그 해의 표어를 말씀드렸고 표어에 대한 보충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표어를 주셨고 삶의 지침을 주셨으니 그것을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시고 이 표어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한해를 승리하여 일 년이면 충분히 이루는 결과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보통 한 해 후반기부터 그 다음해는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표어를 가지고 살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음의 세 가지를 주셨는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마음에 새기시고 2008년도에 이 표어에 맞는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소원 드립니다.

첫 번째 말씀드립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잡석이 보석되자.”
다시 한 번.
“잡석이 보석되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놀라운 은혜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계획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구원받은 백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각인에 대한 고유한 놀라운 은혜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고유한 계획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사명이라고 얘기합니다.

작년에 우리는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가 되자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소원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한 내용은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의 내용을 잊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할 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보지 않은 곳 가보고, 해 보지 않은 일 하고, 우리의 영역 밖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우리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지경의 확장을 이뤄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기도한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한 사람이 천명을 돕기 위해서 우리는 잡석과 같은, 돌멩이와 같은, 원석과 같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 세련되고 정련되고 깎이고 다듬고 닦여져서 하나님 앞에 보석으로 빛나게 주의 손에 들려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갈고 닦고 연마하고 세련하여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보석과 같은 존재로 주님 앞에 손에 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잡석과 같은, 돌멩이와 같은, 세련되지 않은 원석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인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의인의 칭호를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깨끗해짐을 우리는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백성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던 가치가 이전과는 다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가치여야 하고 이제는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삶의 행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부를 때 그야말로 제자들은 잡석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돌멩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전혀 세련되지 않은 원석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진한한 과정을 거쳐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를 체험하며 그들은 보석처럼 빛나고 강해져 결국 주를 위해서 사용되다가 주님 앞에 아름다운 헌신의 역사를 이루고 주님 앞에 가게 된 것입니다.
잡석과 같은 우리가 보석으로 정련되기 위해서는 응당한 노력과 땀 흘림의 애씀의 대가가 필요합니다.
성경의 기본 원칙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심게 하시고 그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결국 정당한 수고와 애씀을 이루게 하셔서 그 백성이 결코 비굴하지 않은 은혜와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의 역사를 믿을진대, 작은 어려움이나 실패로 인해 조급히 판단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은혜를 기대하며 우리의 애씀을 지속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자기의 약점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며, 명하신 사명을 위해 갈고 닦여지는 과정을 기쁨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주님 앞에 사용되는 보석과 같은 존재들로 이미 되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손에 들려 쓰였던 물맷돌은 단순한 돌멩이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획을 가르는 보석과 같은 돌멩이였습니다.
모세의 손에 쥐어졌던 지팡이는 마른 막대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이는 귀한 주님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돌멩이라도, 마른 막대기에 불과해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일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정말 그들은 불림 받은 상태로 쓰인 것이 아니라 불림 받은 상태는 그야말로 잡석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만드시고 세련시키시고 성령의 은혜로 불 연단을 시키셔서 마침내 하나님 앞에 빛나게 하셔서 주님 앞에 사용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옵소서. 내 죄인의 모습 이대로, 나의 이 연약한 모습 이대로 받으시옵소서. 하고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초기 때입니다.
그러나 죄인 된 모습 그대로, 연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이 우리를 받아주셨지만 이제 우리는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은혜를 힘입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세련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능력으로 갈고 닦여져 마침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보석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져 주님 앞에 귀한 은혜의 쓰임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 여기 여러 성도님들 수십 년 전의 일을 한 번 회상하여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고등학생 때있지요. 그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때 학교에서 빛나는 학생들, 또 그리고 그때 사람들에게 정말 총애를 받던 학생들, 또 그렇지 못한 학생들, 이렇게 구별이 되어 있을 겁니다. 어느 시대든지.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가? 한 번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경과라는 것은 여러 투입되는 변화의 요소를 의미합니다.
항상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요소들이 투입되고, 또 다른 요소들이 투입되어서 결국은 사람이 사는 모든 모습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잡석과 같은 사람들이 보석과 같이 빛나고 있는 상태일수도 있고, 보석처럼 빛나던 사람들이 잡석처럼 희미하게 굴러다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상태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요소를 투입하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현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불림 받을 때 우리는 잡석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주님 앞에 사용될 때는 우리는 보석과 같은 모습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참는 것이 돼서는 안 됩니다. 참는 것은 오래 못합니다.
즐겁고 기쁘고 감사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잡석이 보석이 되려면 마음에 원함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아픔과 수고와 애씀과 땀과 눈물과 고통을 겪는 애씀들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무덤덤한 성도가 헌신자 되자.”
자, 다시 한 번 크게.
“무덤덤한 성도가 헌신자 되자.”
올해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이루어야 할 것은 무덤덤한 성도가 헌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17년 동안 이 강단에서 지내오면서 책에 나온 것 읽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제가 17년 동안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이 시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반드시 사람을 바꾸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시간의 흐름만이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이루는 요인이 있어야 바뀝니다.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은 사람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변화의 요인은 어떤 것일까요?
감동일 수 있습니다.
논리적인 깨달음일 수 있습니다.
의지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강한 충동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내가 변화되지 못하고 내가 진보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함께 하지 않았음이지 내 책임은 없다 하나님의 책임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하늘에서 비를 내리셔서 모두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비가 내리면 내에 콸콸 물이 흐르겠지요. 내 논에도, 내 밭에도, 물이 흘러들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내로부터 도랑을 파서 내 논과 밭에 물을 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농부의 몫입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서 땅에 홈이 패서 그 홈이 이어져서 내 밭에까지 물과 내 논에까지 물이 흘러들어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주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늘에서 비를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머지 일은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주신 것은 분명하되 내가 어떤 일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해야 될 일을 못한 것이지 하나님이 성령으로 나를 인도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오래된 믿음생활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됩니다.
똑같은 일을 10년에 이룬 것과 1년에 이룬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10년에 이룬 것은 더딘 만큼 견고합니다. 1년 사이에 이룬 것은 급작히 이룬 만큼 시간의 검증대 위에서 또다시 검증받고 연단 받는 시간이 있어서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이룬 것이 더 견고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0년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않는 것 보다는 1년에라도 그 일을 이루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특징은 믿음의 진보와 더불어 그 믿음이 우리 삶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시간이 가도 그 가슴에 무덤덤한 믿음 생활을 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성향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무덤덤한 삶. 무덤덤한 성격. 무덤덤한 성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성령의 은혜를 더 간구하며 애절함으로 채워야 할 것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회심이라는 것은 늘 일정한 충격이 변화를 향한 가속의 페달을 늘 반복하여 밟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했습니다. 은혜의 페달을 가속화하여 밟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으로 끝나면 안 되고 주기적으로 늘 그 일들이 지속되고 반복되어야 합니다.
늘 성령의 은혜란 심정적인 뜨거움에서 삶에 실질적인 변화로 이루어집니다.

페르시아 왕궁에서 왕의 관원으로 있던 느헤미야에게 자기 조국 유다백성 예루살렘에 비보가 전해듭니다. 예루살렘 성이 황폐했고, 또 뿐만 아니라 성벽이 다 불타서 무너져버렸고, 백성들의 마음은 땅에 떨어졌고, 믿음도 땅에 떨어졌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느헤미야는 견딜 수 없어서 금식을 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민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왕에 가까이 있던 이런 권력층에 있었던 느헤미야가 당시에는 한직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총독으로 자원하여 부임합니다.

그는 준비를 갖춰서 자원하여 부임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모읍니다. 갖은 방해와 갖은 모함이 다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꿋꿋이 견디어가며 마침내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서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여 완성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여 완성되는 과정 속에 또 한 가지 얻은 소득이 있었으니 백성들의 마음의 합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드리며 그들은 예루살렘 수문 앞에 모여서 그 백성들의 합일된 마음으로 학사 에스라를 모셔다가 성경말씀 강해를 듣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다 회개하며 영적인 대 부흥의 역사를 이룹니다.

즉, 생활 속에 가시적인 역사를 통해서 영적인 부흥의 역사로 또 다시 옮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느헤미야는 이어서 사회개혁을 이뤄가게 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시작하여 실제화 된 가시적인 역사를 보이고, 그것을 통해서 전체의 영적 재 부흥을 이루고, 그것을 통해서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 속에 개혁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와 믿음의 역사인 것을 우리는 봅니다.
믿음의 진보는 항상 마음의 열정으로 이뤄집니다.
우리는 심정적인 갈등, 감동과 생활의 결단과 삶의 현장에서 성취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덤덤하게 예배를 드렸다면 단 한 시간 예배를 드릴 때 우리 삶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믿음이 무덤덤한 영향을 끼쳤다면 그 믿음이 우리 삶에 있어서는 뜨거운 감동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도, 내가 기분 좋아야 하는 이유도, 내가 무엇을 열심히 해야 되는 이유도, 내가 잘 안 되는 일을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용기를 가지고 달려가는 이유도 결국은 믿음에서 기인된 심정이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겪어도 우리 가슴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와 은총이 가슴에 일렁여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은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찌 선교지에 가서 선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기쁨으로 잘라서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인 이해관계, 이익의 유무만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너무 축소되어 나중에는 믿음이 자리할 위치조차 없어지는 겁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예수 믿는 사람이 좀 비교적 착하잖아요. 물론 난 안 착해요.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제가 보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비교적 착하고 어수룩합니다. 제가 보니까.
착하고 어수룩하더라고요.
그래서 좀 손해도 보고 어떤 때는 잘 안되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큰 승부에서는 반드시 승리하더라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작은 일에는 손해도 보고 질수도 있으나 큰 승부에서는 반드시 이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2008년 들어서서 우리 성도들은 이제 뜨거운 열정의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특별히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 때마다 가슴에 감동이 없다면,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면, 예배가 마치 내게 있어서 의무처럼 느껴진다면,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대하는 듯한 가슴에 갈급한 심정이 아니라 매끼 지나가는 단순한 식사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마음에 새로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 아시겠지만 몇 년 전에 비해서, 몇 년 전에 제가 체중을 10kg이상 감량을 했습니다. 허리가 9.5cm줄어들었어요. 제가 전에 입던 바지를 보면 너무너무 커요. 이만큼 커요. 내가 어떻게 여기 들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 9.5cm, 10cm씩 허리가 주니까 바지가 커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몇 년 동안 체중을 유지를 하고 있는데요, 그 체중유지를 쭉 하다보니까 먹는 음식의 양이 적어지더라고요. 한 끼는 생식하고, 한 끼는 아주 적게 먹고, 한 끼는 큰 식사도 할 수 있고, 정상적인 식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양이 전보다 한참 적어진 겁니다. 제가 전에는 굉장히 많이 먹고 잘 먹었거든요.
요새도 제가 제 방에 먹는 것은 다 치우라고 얘기합니다. 저도 먹고 싶어요. 그래서 치우라고 얘기하는데요, 목사가 하는 일중에 하나가 방문을 해서 식사도 같이 하면서 얘기도 하고 같이 위로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하는 이런 일이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세 번씩 정해놨다고 하면, 한 번은 생식하고 한 끼는 아주 간단히 하고 한 끼는 식사를 잘 한다 생각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점심도 약속이 되어있고 저녁에도 약속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참 어렵습니다. 전처럼 제가 많이 먹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초대를 받아서 갔을 때 말씀도 은혜로워야 되지만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은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가 바꿔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초대했을 때 그 분이 그래도 음식도 맛있게 들고 하면 기분이 좀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 한 번 보세요. 어쩌다 목사님을 한 번 초청하면 5년 만에 한 번 초청하는 것도 있고, 10년 만에 한 번 초청하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매일 만나는 일이라도 우리 성도들은 10년 만에, 아니면 이 교회 15년 다녀도 평생 한 번 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서 "저는 요새 속이 좀 안 좋아서 음식 많이 안 먹어요." 이러면 그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되고 은혜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이 먹어야 된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점심도 식사를 할 경우가 있는데 저녁도 그러면 정말 문제입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냐면 제가 준비를 합니다. 점심 먹자마자 소화제 먹고, 저녁 먹으러 가지전에 또 소화제 먹고, 소화제 두 번 씩 먹어요. 시간 없으면 할 수 없지만 시간 있으면 러닝머신 열심히 운동도 하고 그리고 많이 먹을 준비를 하고 갑니다. 저한테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목사도 이렇게 노력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배당에 오실 때 그러셔야 됩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러 오실 때 그러셔야 돼요.
여러분 예배드리러 오실 때 정말 내가 초청된 식사에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내가 그런 준비를 하고 오셔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겁니다. 내 마음이 갈급해서 내가 찬송 한 장만 불러도 가슴에 정말 절절한 눈물이 흐르고, 내가 한 마디 기도할 때 정말 애절한 기도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마다 그 말씀이 내 가슴에 새겨지는 은혜가 있기 위해서 내 가슴이 절절한 은혜를 갈구하는 심정이 되어서 예배당에 오셔야 됩니다. 그 때 그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절실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배의 헌신과 예배의 열정, 예배의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결코 우리의 믿음에 뜨거운 진보를 이룰 수 없습니다. 늘 무덤덤한 상태가 되어서 그냥 예배드리고 가는 게 됩니다. 그저 평상시에 밥 한 끼 먹는 것처럼 예배 한 번 드리고 가면 안 됩니다.

정말 우리는 준비된 마음으로 준비된 식사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정말 우리의 감동적인 예배를 드려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헌신의 열정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 교회 몇 년 다니셨습니까? 예수 믿으신지 몇 년 되셨습니까?
3년, 5년, 10년, 15년, 20년.... 그런데 아직 십일조도(하기야 마음에 부담이 되죠.)
아직 십일조 생활조차 못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무덤덤한 삶을 사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어도,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찬송을 해도, 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감동을 시키고 내 마음속에 이렇게 감동적인 역사가 없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왜 내 가슴에 이렇게 무덤덤한 삶으로 내가 믿음 생활하고 있는가? 이제 뜨거운 헌신과 열정이 내 삶을 움직여야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약 2만 명의 성도들이 재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약 2천 명 정도의 자원봉사자들이 각양의 책임을 맡아 있습니다. 10%의 사람이 90%를 섬기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가?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교회 몇 년 다녔는가? 1년 다녔는가? 2년 다녔는가? 10년 다녔는가? 15년 다녀도 나는 주일날 예배만 참석하는가? 이제는 이와 같은 생각과 생활을 조금은 정돈하셔야 합니다. 정말 무덤덤한 삶에서 ‘오늘도 예배드렸구나! 내가 예배드리고 갔다.’ 이런 무덤덤한 상태에서 무엇인가 내 가슴에 뜨거움이 있는, 열정이 있는, 하나님께 대한 감동과 감격이 있는 삶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연말이 되면 자원봉사자의 밤을 갖는데 내 명단도 거기 있어야 됩니다. 내가 하다보면 정 시간이 없으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아니면 한 달에 한번이라도 사회복지 위원회에서 정말 우리교회 사랑을 찾아가서 나누어 전달해 주는 일을 한 번이라도 내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뭔가 한 가지라도 봉사하는 가슴 뜨거운 열정의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꼭 하리라는 마음의 각오조차 없다면 우리는 가슴에 뜨거운 은혜의 불을 지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무덤덤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 다닌 지 15년 됐는데, 예수 믿은 지 10년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 앞에 늘 의식적인 삶이 돼버리면 우리는 잘못하면 관례적인, 관성적인 믿음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삶의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냥 우리가 인간적인 열심을 품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 삶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명자가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돈을 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돈을 벌어야 될 명분과 이유와 논리와 용도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왜 돈을 벌어야 되는가? 하는 분명한 명분과 이유와 논리와 용도와 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내가 이만큼 물질이 있으니까 이렇게 써야 된다.’ 이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으니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되는 겁니다.
내게 일용할 양식이 무엇일까?
하나님 내게 일용할 양식은 이것입니다.
‘내가 지낼 것, 내가 사용할 것, 내가 활동할 것, 내가 주를 위해 나눠야 할 것, 내게 이것이 필요하니 하나님 이렇게 주십시오.’ 라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의 자세라는 말입니다.
분명한 삶의 논리, 명분, 목적,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는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란 가변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 자비의 눈길로 임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인격과 성품, 그리고 사랑과 은혜의 실천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저 무덤덤히 ‘내가 예수 믿는구나!’ 하고 이렇게 지나면 안 됩니다.
정말 내 삶의 인격에 있어서, 내 삶의 심정에 있어서도 주님 앞에 뜨거운 헌신자의 열정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을 보는데 이해의 관점을 보고 수용의 관점을 가지고 봐야 됩니다.
판단의 관점을 가지고 보면 절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대해 점수를 매기면 절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관점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있고 수용의 관점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우리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언제나 반대의 논리를 세우기 전에 그 모습과 평가에 대해서 일단 수용의 관점을 가지고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 사람은 내 말과 행동에 대해 그런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가운데 무엇인가 하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제가 제 자신에 대해서 문제를 좀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제가 너무 심각하다는 겁니다. 목사는 대부분 보수적인 겁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래도 진보적인 성향과 낭만적인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보수적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고답적이고 잘 맞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제가 가끔 예배시간에 조크도 하지만 제가 너무 보수적이고 굉장히 고답적인 사람 같아서, 특별히 제가 집에서 있을 때 그것을 느끼는데 저희 집에 애들이 세 명 있는데 그 애들을 보면 그 애들이 그래도 아빠를 좀 좋아합니다. 믿어주세요.
그런데 재미없어 해요. 문제가 뭐냐 하면 제가 집에서 텔레비전을 안봅니다. 제가 언젠가 텔레비전을 봤더니 (죄송합니다.) 우리 아내가 저보고 뭐라고 하냐면 "당신 그래도 좀 사람 같다." 이러더라고요. (그럼 내가 사람 같지 않다는 얘긴가?)
문제는 뭐냐 하면 텔레비전을 쭉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텔레비전을 안 보니까 (애들하고 대화를 하면 공유점이 있어야 하잖아요.) 텔레비전을 같이 보는데 아이들은 막 웃는데 나는 하나도 안 우스운 겁니다. 애들은 막 웃고 나는 안 우스우니까 애들이 재미가 없어요. 나도 같이 막 웃어줘야 얘기가 되는데, 재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얘기하다가 제가 가면 좀 심각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판단하면 제가 무슨 생각하겠습니까? 애들은 너무 가벼워. 이렇게 생각하면 그 관계는 끝입니다. 애들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제가 너무 무거울 수도 있는 겁니다.

제가 작년 연말쯤 해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게 성탄절 가까운 연말의 시간이었는데 (죄송합니다.) 여러분 ‘텔미’라는 노래를 아세요?
모르는 분이 있으면 문제입니다. 저보다도 몰라요? 저는 아직까지도 ‘텔미’라는 노래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텔미’라는 노래가 유명하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노래가 유명하다는 것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음악으로 들어야 될 것을 문자로 보니 굉장히 심각하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문을 보는데 이번에 대통령 선거하는데 각 진영마다 로고송으로 이 ‘텔미’라는 것을 사용하리라고 다 기대를 했대요. 그런데 그것 사용을 아무데도 사용을 못했다고 하네요. 아마 그 작곡가가 그 노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허락을 안 했나 봐요.

그래서 제가 이 ‘텔미’라는 노래가 유명하구나! 그러면 내가 이런 거 정도는 알아야지. 그래서 제가 ‘텔미’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명한 노래라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거기에 그 춤이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고 있는데 집에 제가 연말에 들어가는데 저도 저의 아이들하고 친해지고 싶거든요. 좋은 아빠가 아니라 친한 아빠가 좀 되고 싶은데 참 잘 안되더군요. 애들은 제가 너무 바른 얘기만 하니까 재미는 없어 해요. 들어가는데 애들이 재미있게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때는 이때다. 라고 생각해서 제가 애들에게 얘기했습니다.

“얘들아, 오늘 아빠에게 ‘텔미’ 춤을 가르쳐주지 않겠니?”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면서 이유를 말해줬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배워서 청년부에 가서 한 번 하려고 한다.” 제가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랄 이변이 벌어졌습니다. 걔네 세 명이 달려들어서 저에게 춤을 가르쳐줬어요. 한 번 해 볼까요? 제가 확실하게 배웠는데.
제가 이제까지 그 아이들하고 대하면서 그 아이들의 아빠에 대한 충성도가 그렇게 깊은 것은 처음 봤습니다. 이 세 명이 다 달려들어서 여러분 ‘텔미’ 춤 아시죠? 어깨 흔드는 것, 그 다음에 팔 흔드는 것, 그리고 스텝 있는 것. 제가 그 아이들이 그렇게 아빠에 대하여 열정을 가지고 달려들어서 아빠를 도와주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왜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을 띄고 이 땅에 오셨는가? 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왜 사람의 비천한 모습을 띄고 이 땅에 오셨는가?

인간들은 신에 대해서는 너무 심오해서 몰라요.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배고프면 배고파하시고, 피곤하면 피곤해 하시고, 슬프면 눈물 흘리시고, 마음 괴로우면 쓸쓸하게 “정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려주셨던 겁니다.
그 생각을 하니까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그들과 같아지지 않으면 절대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아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판단의 관점에서 보면 안 되고 이해의 관점과 수용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너와 내가 같다고 생각해야지 나는 너보다 좀 나은 위치에 있어서 내가 너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되는 것이더라고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이라도 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몰라요.
늘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니까 그 일을 모르게 느끼는 겁니다.
어떤 일을 한 번 선한 일을 했는데 너무너무 감격했어요.
어떤 사람 보면 좀 좋은 일하면 “내가 전에 이런 일을 했는데...” 하고 막 얘기해요.
그 사람은 처음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는 칭찬도 하고 좀 격려도 해줘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일을 한 번 하고, 두 번하고, 세 번, 열 번, 백 번 하다보면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르고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가 좋은 일을 했는지 기억도 못해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기억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른다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다보니까.
그러니까 내가 어떤 좋은 일을 하는데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 때이고.
내가 어떤 좋은 일을 하는데 당연한 일로 느껴져서 그 일을 생각조차 못하는 수준이 돼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믿음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의연한 성도들이 또한 돼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그냥 무덤덤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헌신자의 심정으로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됩니다.
이때가 되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칭찬해도 의연하고 비난해도 의연해 질 수 있습니다.
칭찬해도 휩쓸려가지 않고 비난해도 마음이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자 따라서 합시다.
“열정과 노력으로 재능을 넘어서자.”
자, 다시 한 번.
“열정과 노력으로 재능을 넘어서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재능과 그 재능을 컨트롤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의지와 열정과 노력을 주셨습니다.
한 편으로는 재능을 주셨고, 한 편으로는 재능을 관리할 수 있는 의지와 열정과 노력을 주셨습니다. 두 개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재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저희 집에 아이들 셋이 있는데 한 번은 한 애가 미술학원에 몇 달 갔습니다. 데생 배우잖아요. 그림을 배우는데 손을 그려요. 다른 애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 같아서 제가 둘 다 오라고 했습니다. 더 작은 앤데 둘이 같이 손을 그려봐라 했는데 미술학원에 한 번도 다닌 적이 없는 애가 손을 더 잘 그리는 것 같아요. 제 눈으로 보기에는.
"아, 사람마다 재능의 차이는 있구나! 연습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번도 학원가서 배운 적도 없는데 그 애가 저는 더 잘 그리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는 재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재능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을 우리는 키워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 줘야 됩니다. 재능을 발견해서 그것을 키워서 그것을 꽃피우게 해 주는 것도 큰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재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대신 다른 아이가 못하는 다른 것을 잘하는 탁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사람은 키가 커요. 어떤 사람은 키가 작아요.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지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재능이 전부가 아닌 겁니다. 사람마다 재능을 100%활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의 10%, 20%, 30%, 몇 %를 사용할 뿐입니다.

내가 비록 작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내 열정과 뜨거운 노력과 그리고 내 마음의 의지를 가지고 그 재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큰 작품, 좋은 작품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어진 재능으로 모든 인생이 결정된다고 한다면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재능이 있을 때 그 재능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있는 최종적인 결과는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떤 사람은 한 번에 그 일을 척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척 보고 그 자리에서 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못해내요. 한 번 해보고, 두 번 해보고, 실패하고 열 번 해야 그 일을 해 내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러면 보자마자 한 번에 척 해내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열 번 해야 겨우 그 일을 하면 이것은 상대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럼 나는 가망이 없는 겁니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번 하는 사람은 그 한 번 조차도 그 일을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여건에 의해서 나는 열 번 해요. 정말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더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자며 내가 더 부지런히 어떤 일을 열 번해서 그 일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한 번에 할 수 있는데 그 한 번 조차도 못할 때가 있다니까요. 나는 열 번해서 그 일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처음에는 열 번이 걸리지만 다음에는 아홉 번, 여덟 번, 일곱 번, 세 번, 두 번으로 줄어든단 말입니다.

반복되면 우리의 노력과 그리고 우리의 열정과 우리의 수고와 의지가 재능을 능가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보다는 내 의지와 열정과 노력이 내 재능을 능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은혜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와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 가지고 가슴 아파하지 말고, 지나간 일 가지고 가슴 아파하지 말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 재능을 능가하는 열정과 노력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을 대할 때, 혹은 기도할 때, 마음이 뜨거운 것 같습니다. 물론 목사니까 한 영혼, 영혼들이 위로받고 힘을 얻고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영혼의 안식을 누리도록 저는 제 목사의 위치에서 애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흔들어서 깨워서라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밥만 먹고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밥만 먹고 살다가 이 세상 떠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야 됩니다.
자기 자식이 훌륭하다고 생각된다지만 저는 저희 성도들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성도들을 볼 때마다 이 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이룰 것인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문득 하나님께서 성령의 뜨거운 은혜를 부어주시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준비했던 모든 것이 폭발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도행전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데 사용되는 보석과 같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제 2008년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주의 영광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겁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고 또 우리 성도들도 서로를 기대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잡석과 같은 존재라도, 돌멩이와 같은 존재라도, 원석과 같은 세련되지 않은 존재라도 하나님 앞에 반드시 정련되고 세련되어서 보석과 같이 사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잡석이 보석되자.”
“무덤덤한 성도가 헌신자되자.”
“열정과 노력으로 재능을 넘어서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