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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후 심판의 비유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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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심판의 비유 (마 25:31-46)

최후 심판 때 일어날 일들

오늘 본문은 “최후 심판의 비유”라는 제목이 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까? 아니면 최후심판 때 실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을 비유의 형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13절은 기름을 예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그렇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은 1절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이렇게 시작합니다. “~와 같으니”라 하여 신랑이 밤중에 오는 것처럼 마지막 때는 갑자기 오고, 이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비유 말씀입니다.

14-30절은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말씀 또한 14절에서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이렇게 시작합니다. “~와 같으니”라 하여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할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지 않기 위하여 현재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할 것을 교훈하는 비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최후심판 비유’는 비유라고 하기에는 적절치 않게 31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천군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모습이며, 예수님이 심판자로서 영광의 보좌 위에 앉아 실제 행하게 될 심판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게 비유입니까? 아닙니다. 실제 있을 일들이고 교회에서는 재림과 심판의 교리로 확정된 것입니다.

물론 32절과 33절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하여 비유의 냄새를 풍기고 있지만 이는 지엽적입니다. 목자가 낮에는 양과 염소를 같이 한 무리로 해서 풀을 먹게 하지만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나눕니다. 양은 보다 시원한 곳을 좋아하고 밤의 한기에 약한 염소는 따뜻하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처럼 마지막 심판 때 의인과 악인, 둘 중에 하나로 분명히 나눌 것이라는 비유지만 이는 분별하는 행위에만 국한된 비유이지 전체 말씀을 설명하는 비유는 아닙니다. 전체가 비유가 되려면 심판 하는 임금과 같다라고 하여 임금이 비유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임금은 영광의 보좌에 앉은 실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최후심판의 말씀은 좀 더 심각해집니다. 비유가 아니라 마지막 때에 실제 일어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양과 염소가 섞여있듯이 한 곳에서 풀을 뜯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는 분명히 갈라질 것입니다. 이는 알곡과 가라지가 한데 얽혀 자라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에는 어중간한 선은 없습니다. 의인으로 분류되는 양의 무리에 속하든지, 악인으로 분류되는 염소의 무리에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오른편 양의 무리에게는 창세로부터 예비된 축복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왼편 염소의 무리에게는 영영한 지옥불이라는 저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제대로 믿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둘 일이지 세상과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는 모습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기준은 40절과 45절에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결정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으로 대접한 자들에게는 34절의 영생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지극히 작은 자들을 외면한 자들에게는 41절의 영벌의 형벌에 처해집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작은 자들의 정체는 35절과 39절 사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 나그네 된 자들, 헐벗은 자들, 병든 자들, 옥에 갇힌 자들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전혀 무기력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들 한 사람에게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결정됩니다.

최후의 심판 때 주님은 여러분이 어떤 교파에 있었는지 어떤 교리를 붙잡고 있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고 또 얼마나 심오한 성령체험을 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어떤 큰 일을 하고 또 내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이념을 가지고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한 사람에 대한 태도만 묻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만난 이름도 없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에 따라 우리 영원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큰 것에 있지 않습니다.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이웃들에게 내가 긍휼을 베풀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상투적으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는 것은 예수 믿고 안 믿고의 신앙이 아닙니까? 예수 믿는 자는 천국, 믿지 않는 자는 지옥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 나를 믿었니?” 라고 전혀 묻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잘못되었나요?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우리 교리가 잘못되었나요? 예수님이 잘못되었던지 우리 믿음 교리가 잘못되었던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 교리대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둘 다를 살리고 싶습니다. 둘을 구지 조화시킨다면 저는 이렇게 엮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다. 실제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엄청난 은혜를 맛본 자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의 아픔을 무시한다면 그는 자기가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는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뿌리라면 그 열매는 이웃 사랑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16-18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의 뿌리도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요한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그의 행위에 의하여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그래서 오늘 말씀을 우리는 심각히 대해야 합니다. 자기가 양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염소로 판명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이는 이미 믿고 있는 신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내게 한 것이니라

오늘 말씀에서 더 놀라운 것은 35절과 36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의인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 이에 대해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40절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은 곧 주님께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였던 터툴리안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너희가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볼 때 그것은 주님을 보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교회사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성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구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성인들의 체험담과 예화들을 같이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1) 4세기에 성인으로 불렸던 성 마틴이 있습니다. 성 마틴은 젊은 시절에는 군인이었습니다. 아미앵에서 지내던 337년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거지를 보았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은데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칼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한 쪽을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틴은 잠을 자다 꿈속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거지에게 주었던 그 반쪽 망토를 걸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틴은 예수님이 천사들과 대화하며 “마틴이 나에게 준 것일세.”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때 마틴은 큰 감동을 받고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후에 성자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11월 11일에 성 마틴을 기념하는 등불 행진을 합니다. 추운 겨울에 따스한 사랑을 나누어 주었던 마틴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아이들이 등불을 들고 동네를 행진합니다.

(2)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성자 중에 성 프란치스코가 있습니다. 그분도 유사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말을 타고 가는데 맞은편에서 문둥병자가 절룩절룩 하며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던 것이 그런 문둥병자였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서 말머리를 돌려서 도망치려 하다가 비겁한 자신을 뉘우치고 프란체스코는 말에서 내려 문둥병자를 포옹하고 그 입에다 입을 맞췄습니다. 그 순간 그 문둥병자는 그리스도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란 책에는 프란치스코가 냄새가 나고 전염성의 위험이 있는 문둥병자의 몸을 자기 손으로 씻어주는 장면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그가 문둥병자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3)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이 구절에서 감동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적선을 원하며 다가왔습니다. 자기 호주머니를 뒤져 도와주려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거지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았지만 나를 지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저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질을 주고 물질을 받아서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고 또 마음을 주는 받을 때 큰 감격과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썼던 책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 『구두장이 마틴』이란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성자 마틴을 연상시키는 소설입니다. 마틴은 낮에는 그의 지하 방에서 열심히 구두수선을 하고 밤이면 성경을 읽는 가난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든 사이에 “내가 내일 너를 찾아 갈 것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다음날 마틴은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날도 열심히 구두 수선을 하고 있는데 지하 창문 밖으로 늙고 가난한 청소부가 추위에 떨면서 거리를 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틴은 불쌍히 여겨 그를 자기 지하방으로 데려와 몸을 녹이게 하고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청소부가 돌아간 후 마틴은 이번에는 창 밖에서 아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마틴은 그녀를 데려와 따뜻한 수프를 대접하고, 자신의 낡은 외투로 아기와 엄마를 감싸주었고, 여기에 더하여 우유 값까지 조금 주었습니다. 여인이 떠나간 후 이웃에서 갑자기 악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작은 소년 하나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사과 하나를 훔친 것을 두고 가게 할머니가 무섭게 소년을 다그치는 소리였습니다. 마틴은 조용히 다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과 하나를 훔쳤다고 그렇게 심하게 벌을 준다면 우리가 지은 죄는 도대체 얼마나 큰 벌을 받아야 할까요?”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소년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주님은 여전히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마틴은 구두 수선 일을 마치고 다시 성경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 때 갑자기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만났던 청소부, 여인, 소년과 할머니가 차례로 나타납니다. 그러더니 그들의 배후에서 한 목소리가 마틴에게 들려옵니다. “바로 나 였네.”어제 밤 꿈속에서 들었던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마틴을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그때 마틴이 읽고 있었던 성경은 바로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이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4) 오늘 최후 심판 비유 말씀과 관련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인도 콜카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입니다. 테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선행에 대한 교훈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테레사에게 “얘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라고 말하며 선행을 격려하곤 하였습니다. 수녀가 되어 오직 주님께 헌신하던 테레사 수녀가 ‘제2의 부르심’이라 부르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마더 테레사는 인도에서 삼등 열차를 타고 다르질링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더 테레사는 어떤 신비적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심코 마태복음 25장을 펼치고 읽고 있었는데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시선이 고정되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테레사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그 성서 말씀이 폐부 깊숙이 꿰뚫는 것 같았습니다. 거룩한 말씀의 광채 앞에서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처럼 멈추어 서서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테레사의 나이 서른여섯이었습니다.

그 부르심 이후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자들이 있는 콜카타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평생을 헌신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병환자들을 도울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만지듯 부드럽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만지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예수님을 섬기십시오.” 테레사와 함께 했던 수녀들 또한 지극히작은 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봉사가 곧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손가락 다섯 개를 차례대로 하나씩 구부리는 손짓을 서로 피곤할 때마다 인사처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그 의미는“You/ did/ it/ to/ me”의 다섯 개의 단어로, 마태복음 25장 40절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은)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5) 이런 일이 다른 나라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란 책으로 유명한 김진홍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70년대 청계천 뚝방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건강도 연약해지고, 아무리 도와받자 좋은 결과도 나오지 않자 낙담하여 빈민 목회를 그만 접기로 하였습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떤 집에서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 가보니 세 아이가 기진 해 누운 채 힘없이 울고 있더랍니다. 그들에게 왜 우느냐고 물으니까, 그 중 큰 애가 힘없이 “배고파요”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행상을 하는 어머니가 단속에 걸려 유치장에 구류되는 바람에 아이들이 사흘 동안 굶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 막내 아이가 김진홍 목사님을 바라보며 배고파요 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 아이의 눈에서 순간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 장면을 김 목사님은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세살배기 막내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계속 엄마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 살짜리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았다.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눈물 흘리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불과 2, 3초였지만 분명히 예수님 얼굴이 그 아이의 얼굴에 포개져 나타나 나를 깊은 눈으로 보시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향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한 예화들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예화들은 더 많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주님을 보려면 우리는 낮은 자의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강한 곳, 수가 많은 곳, 부유한 곳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증언하는 이런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자꾸 주님이 계시지 않은 높은 곳만을 향하여 나가려 합니다. 육신은 부해지지만 영혼은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는 강남 한 복판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곳도 연말이 되면 가난한 이웃 돕기 행사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들 강남 지역에 살다보니 어느 정도 수준은 됩니다. 그러니 그 중에서 가난한 사람을 고르기가 영 고역이었습니다. 괜히 도와주었다가 “나를 뭘로 보는거야.”하며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되어서였습니다. 부자동네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불행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좁아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저곳으로 설교를 하러 가는데 가장 설교가 잘 되는 곳은 가난한 자 앞에 섰을 때입니다. 아마 최근 경험으로는 외국인 노동자 병원에서 설교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불쌍해 보여서 그랬는지 설교가 막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곳에서 설교하고 나면 제 가슴도 다 후련해집니다. 교회의 생명은 끊임없이 가난한 자를 찾고 낮은 곳을 향하여 나아갈 때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점은 의인으로 불린 사람이나 악인으로 불린 사람이나 모두 자기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의인이라 불린 이들은 실상 자기가 구원받게 된 이유를 모릅니다. 자기들은 작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작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대단하거나 위대한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는 착한 마음을 원할 뿐입니다. 도움의 손길이 올 때 외면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 의인들은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처럼 이름도 없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악인으로 판명된 사람들 또한 자기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44절입니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된 것은 눈앞에 있는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것이 이토록 큰 잘못이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작은 자를 돕는 것은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큰 일만을 꿈꾸었던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 눈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충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악을 행해서 영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살아서는 주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많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주셨고, 여러 가지 달란트와 기회들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많이 주셨기 때문에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했던 열매가 나오지 않고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그것을 땅에 묻어 버리면 주님께서는 실망하실 것입니다. 이런 실망감 때문에 주님은 더 강경하게 염소의 무리로 분별된 자들에게 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 앞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그 때가 닥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도적처럼 언제 갑자기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때에 주님으로부터 칭찬받고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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