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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을 잉태하고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 (요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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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잉태하고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 (요 10:10)

세상 사람들이 외모가 각각 다른 것처럼 살아가는 방법도 다릅니다. 같은 돈 만원을 같고서도 풍성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항상 불평하며 꾀죄죄한 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생이 즐겁게 사는 것이요 풍성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연물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모두들 행복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것,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심정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이 풍성하게 부유하게 사는 것을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도 인생들의 풍성한 삶을 원하십니다. 고생하며 가난하며 질고로 고통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역시도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람이 행복하게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는 왜곡된 하나님상(像)을 만들어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동산 모든 실과는 먹으라"고 했습니다. 풍성한 하나님입니다. 그 중에 단 하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100중 1%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생으로 하여금 가장 아름다운 배필을 짝하게 하시고 동산의 모든 과실을 마음껏 누리며 행복하게 풍성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마음이시며 소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풍성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이 들어와서 아담을 유혹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하시더냐"(창3:1). 인색한 하나님, 부정한 하나님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뭔가 규제에 묶이고 간섭하시는 하나님! 그것이 바로 사단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허상입니다. 사단의 질문에 하와가 자기의 생각을 말합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절) 만지지도 말라? 이것이 바로 왜곡된 하나님상입니다. 하나님을 인색하신 분으로, 금기의 하나님으로, 무정한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는 이 잘못된 생각은 결국 인생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했습니다. 모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죄는 멀어지게 합니다. 그때부터 인생의 풍성함은 시들해지고 사람은 빈곤해졌습니다.

사람은 왜 풍성하지 못합니까? 사람은 왜 `세상이 고생이다' 하고 사는 게 지겹고 어떤 이들에게는 지긋지긋하다고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기하시는 하나님, 무조건 절제하시는 하나님, 간섭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때문입니다. 사단은 인생이 행복하게 사는 꼴을 못 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풍성하게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 되는 꼴을 못 봅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꾀죄하게 사는 것을 원합니다.

인색하고 사납고 남에 대해 심술궂고 그래서 자기도 힘들고 남들도 피곤하게 만들고... 이것이 사단이 원하는 바입니다. 사단은 이런 인간을 만들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게 세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 행복에 취하게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다 쏟아 붓고 결국에는 허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이것이 진정한 행복과 풍성함을 빼앗아 갑니다.

(예화)페르시아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잘 생긴 노예를 골라 3일 동안 왕으로 삼고 하고 싶은 일을 다하도록 해줍니다. 밑바닥 생활하다 왕이 된 노예들은 인간으로 구가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추구합니다.  성적 쾌락, 좋은 음식, 권력 남용 등 그런 다음 3일 후에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합니다. 정신적인 것들을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습니다. 육체가 영양을 공급하지 못하면 피곤하고 힘들고 의욕이 없어집니다.

기운을 쓸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공급받지 못하면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가치관이 잘못되고, 판단력과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참 행복을 모릅니다. 잘못된 종교도 인간의 풍성을 저해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풍성한 삶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셨고 여호와 종교를 주셨습니다. 그 종교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종교조차도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613가지의 항목으로 인간을 옭조였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날개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의 자유스런 삶을 위해 도움이 되어야 하는 데 오히려 종교는 인간을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종교들입니다. 종교인들의 신비주의, 독선, 비판, 지나치게 꼬장꼬장한 성격. 이것은 자신의 삶을 빈약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자원하는 즐거움과 웃음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병든 믿음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신앙은 즐거워야 합니다.

신앙은 풍성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코 금욕이나 지나친 자기 억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을 지나치게 얽어매는 것도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스탕달은 죽음 직전

"열심히 살았다. 마음껏 썼다. 열렬히 사랑했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항상 행복하게, 삶을 근사하게, 매력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성을 주시려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바른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종교의 티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분은 무소유였지만 풍성한 삶을 살다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풍성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적인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너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의 눈들을 크게 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나 종교를 출입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 속으로 날마다 출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꼴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꼴은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으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고 자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풍성함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의 자기 증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나 “나는 ~이다.”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십니다. “나는 ……이다.”란 말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만이 “나는 스스로 있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는 ……이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는 아니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시 사람들이 “당신이 오실 그입니까?”라고 했을 때 여러 번 반복하여 “나는 아니다.”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선구자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곱 번의 자기 증명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나는 참포도 나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증명 가운데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생명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공급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자기 증명은 이 땅에 오실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는 역시 생명입니다. 탈 이데올로기 사회에 산다고 하지만 인간의 이데올로기는 절대로 종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사고와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시대정신을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뇌리에 남게 됩니다. 현대인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건강과 장수입니다. 텔레비전을 켜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건강에 대한 프로를 반드시 발견하게 됩니다. 비타민 C가 좋다고 한 때는 약국에서 싹쓸이 했습니다. 토마토가 좋다고 방송에서 한 번 얘기하면 토마토를 살 수가 없습니다. 어디 좋은 물이 있다고 하면 구하려고 야단들입니다. 공해가 없고 깨끗한 식품이 있다면 애써 구하려고 하는 것이 현대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관심 가지는 말이 ‘웰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생명의 과제들입니다. 인간이 참 건강과 장수, 그리고 생명의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좋은 물과 공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물을 마시고 좋은 공기를 호흡하려고 산에 오르던 사람이 실족사고로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무공해 식품만 먹고 건강보조식품을 쌓아놓고 먹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순식간에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거는 생명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급하신 십자가에 우리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그 생명을 풍성하게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생명을 잉태하고 공급하는 주의 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는 생명을 잉태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십니다.

문의 역할은 들어가고 나오게 하는 통로입니다. 들어오게 하고 나가게 하는 것이 문의 역할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들어가며 나오며”라고 하는데 이런 성경적 의미로 볼 때에 출입구라고 하는 우리의 말이 더 정확한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분명하여 들어가는 쪽에서는 입구(entrance), 나오는 쪽에서는 출구(exit)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왔다 다시 들어가는 의미로 양쪽을 ‘출입구’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들어갈 때는 입구, 나올 때는 출구의 기능이지만 우리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출입구의 통합적 기능을 합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는 것은 꼴을 얻기 위함입니다. 생명을 공급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장의 하루는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아침에 목자가 양을 불러내고, 양이 목자를 신뢰하여 그 음성을 듣고 따라 나섭니다. 목자와 양과의 삶을 묘사한 목장의 삶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앙생활, 교회 생활을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목장 생활의 요소는 첫째 안전, 둘째 자유, 셋째 보급 즉 먹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전과 자유와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목장에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원문의 뜻은 예수님은 양을 위한 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환영합니다.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양들만의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양은 문으로 들어가지만 이리는 아무 데로나 들어갑니다. 이 문이 양들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양은 그 문으로 들어가고, 보호받고, 소유가 됩니다.

양의 문인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문이신 것은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말미암아”라는 말은 “통하여”(through)라는 말입니다.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통하여 들어가야 구원을 받지, 비껴가거나 넘어가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이라는 뜻입니다. 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문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고, 예수님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꼴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다.”라고 하신 많은 말씀 가운데 첫째가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것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떡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물며 양에게도 말할 필요 없이 꼴이 제일 중요합니다. 문 안에는 끝없는 초장이 펼쳐집니다. 양들이 좋아하는 온갖 푸른 풀이 있습니다. 양들이 마실 수 있는 맑은 시냇물이 있습니다. 그 문 안에는 이리가 없는 안전지대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꼴이 얼마나 풍성한지 보세요.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문이 되신 이유입니다. 꼴은 생명의 풍성을 줍니다. 문 안의 꼴은 풍성한 생명을 주는 꼴입니다. 빈약한 꼴이 아닙니다. 풍성한 꼴을 주시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 꼴은 부족함이 없는 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계셔서 꼴을 만드시고, 공급하시고, 먹이십니다. 예수님이 문이 되시는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주시려는 풍성한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공급하고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둘째, 교회의 모든 사역은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문입니다. 세상을 하늘로 통하게 하는 문입니다. 세상의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문입니다. 세상에 하늘의 생명을 공급하는 문입니다. 교회가 문일 수 있고, 문이어야 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문이라면 교회도 세상에 대하여 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이라면 교회도 세상에 대하여 생명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하려 하신다면 교회도 세상에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명을 잉태하고 공급하고 풍성하게 하는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새 생명을 얻는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생명이어야 하고, 생명을 잉태해야 하고, 생명을 공급하는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세상에서 사회적 기관이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합니다. 세상 왕의 지배하에 종노릇하던 백성들이 구원받아 살던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교회의 모형입니다. 스데반은 그의 고별 설교에서 광야교회란 말을 사용합니다. 광야는 교회의 원형입니다. 물이 날 곳이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물이 없어 불평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치게 하셔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반석이십니다. 물이 나는 반석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물이 솟습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의 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가 생명이 흐르는 샘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생명을 잉태하고 공급하는 원천이어야 합니다.

현대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은 인간 지식의 오만은 생명에 대한 경계가 침범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종래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 생명공학은 포스트모던 과학의 꽃이라고 합니다. 이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릴 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줄기세포와 냉동배아 등을 이용한 장기 생산과 질병치료 등 첨단 생명공학이 과연 생명보존과 생명연장을 가능하게 할까요? 아니면 이런 과학이 또다른 생명파괴로 이끌어 갈까요? 질병치료라는 현실적 명분과 생명 불가침이라는 신학과 도덕원칙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생명공학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건강하겠다는 것은 도둑질하여 부자가 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인간이 환경을 잘 보존하고 개인이 도덕적 삶을 살고 신앙적 사고로 오래 살아야지 정상이지요. 그렇지 않고 실컷 파괴하고 죽을 만큼 황폐하게 해 놓고 생명을 파괴하면서 내 생명을 연장하겠다는 것은 도둑이나 강도의 심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생명공학에 대한 신학적이며 도덕적인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반대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체줄기세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도록 교회가 배후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도와줘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복지와 봉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생명을 잉태하는 한 방편입니다. 목회신학에서는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지향이 있다고 합니다. 상향과 내향과 외향입니다. 상향은 예배를 통하여 성취 가능합니다. 내향은 교육과 훈계를 통하여 성취 가능합니다. 그리고 외향은 섬김을 통하여 성취 가능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교회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은 생명을 잉태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제 복지와 봉사에 눈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현대의 사회 문화는 생명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정신에서 생명을 빼앗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퇴폐적이고 파괴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할 만큼 문화는 중요한 자원인데 우리 문화는 생명을 상실하고 감각적인 즐거움만 남아 있는 문화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만 가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사회에 건강한 문화를 심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문화가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문화의 변혁자가 될 수 있도록 복음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또 교회의 또 다른 생명 운동입니다.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유기체란 생명력을 가진 유기적 관계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실체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하며 지켜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힘에 대하여는 생명을 바쳐 대응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립학교법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응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복음을 훼손하는 어떤 불순한 힘에 대해서도 교회는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생명을 보존하고 잉태하게 하는 교회가 되게 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지키는 데도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적 기관이며, 사회가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 기관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절대로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은 질서를 좋아하십니다. 교회는 질서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이 땅이 생명으로 가득한 질서의 나라가 되는 것을 교회는 기대하고 힘써야 합니다.

장수학의 권위자인 마이클 로이젠 박사가 제시하는 젊어지는 비법이 있습니다. 운동이나 소식이나 웃음 등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젊음 유지 비법이 많다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으면 8년을 더 삽니다. 혈압을 조절하면 25년은 더 삽니다. 스트레스를 줄이면 32년을 더 삽니다. 양치질만 부지런히 해도 6.4년은 더 삽니다. 자동차 벨트를 매는 것만 가지고도 3.4년은 젊어집니다. 매일 웃으면 8년을 더 오래 삽니다. 그런데 예수 잘 믿으면 이 모두가 다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영육간의 생명을 얻는 가장 좋은 그리고 유일한 길입니다. 장수가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이 시대에 교회가 생명을 잉태하고 공급하여 많은 생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생명을 잉태합니다. 죽어 가는 자를 살려야 합니다. 무기력한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땅에 떨어진 도덕 윤리를 다시 회생하게 해야 합니다. 타락한 대중문화를 건강하게 살려야 합니다. 사회의 전반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가 받은 십계명은 모두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은 그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것은 이 날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부모를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혼인 서약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웃에게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모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공급하여 세상이 생명이 있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새 생명이 흐르는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인 어느 전쟁터에서 한 종군기자가 참호 속에 들어가 있던 병사에게 이 순간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어려운 환경에서도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을 확신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100년 전 우리나라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삶의 소망마저 끊어지는 참담함 속에서 교회는 희망의 등불이 되어 주었습니다. 교회는 애국자들을 배출하였고, 교회를 통해서 한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을 양성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이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살아나는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미래를 향한 소망을 갖고 준비하며 나가는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역동성과 생명력을 품은 공동체가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샤랴 여러 지방으로 전도하러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엘리야, 선지자라고 하나이다. 예수님이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생각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예수님을 주로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 세례요한, 엘리야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신앙고백 위에 주님은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주님의 기쁨입니다. 무슨 신앙고백인가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음은 교회의 할 일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들은 주님께서 이어서 바로 하신 말씀이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십자가는 왜 지어야 합니까?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토론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할 일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향한 희망을 품는 교육입니다. 세상과 사회, 그리고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 시대에 필요한 가치로서 출세와 돈, 성공, 일류학교 등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의 기도를 할 때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는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가치를, 먼저 우리가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교회성장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에는 교회성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와 함께 교회가 성장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성장시키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회성장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일을 하시고, 그 일을 감당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열매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달란트를 남기지 않은 자’를 심판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효과적인 충성을 해야 합니다.

최근에 한국교회는 침체기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세계사상 유례없는 폭발적인 교회성장의 역사가 80년대 초까지 일어난 반면, 80년대 후반부터 교회의 개척이 어렵고 성장이 멈추고 있다는 연구보고도 있습니다. 심지어 감소추세까지 나타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역설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가장 어려운 때에 가장 큰 하나님의 역사의 가능성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어려운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자세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가 문제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성장하는 교회는 다음 세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준비하는 교육에 베푸는 일에 후한 교회임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현실의 조건이 어렵다 해도 재정의 50% 이상을 교육비로 과감하게 투자하고도 성장하는 교회의 실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그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라고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구약의 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백성으로 삼으셨고,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를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제자들을 선택하시었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백성들을 모으고자 하심으로 몸 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즉, 교회는 생명체로서 세포분열을 통하여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곧 정체하고 퇴보하여 심지어 소멸되고 말 뿐입니다. 생산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과감하게 준비하는 교회에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로 채워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복을 나누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생명을 갖고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본질의 의미를 상실하고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에서 더욱 교회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 관한 고찰이 절실한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교회 개혁운동의 작은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뿌려진 씨앗은 이제 한국교회의 미래를 잉태하는 생명으로 심기어져서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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