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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삼상 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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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삼상 6:1~16)

1. 금쥐와 암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60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황금돼지해였던 지난해에 사두신 황금돼지저금통을 아직도 갖고 계신 분들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가 황금돼지해라는 것 때문에 사실 많은 사람들, 특히 상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많은 의미를 두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황금돼지해의 덕을 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제가 이런 말씀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지난주 주보에도 실었습니다만, 십이 간지(十二干支)에 따라 올해가 ‘쥐의 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쥐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성경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 눈이 번쩍 뜨인 부분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디겠습니까? 예, 바로 4절과 11절에 나오는 “금쥐”라는 것이었습니다. 황금돼지와 황금쥐, 뭔가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 황금으로 만든 쥐는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마리의 암소에 대한 것은 아주 널리 알려져 있고,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이 본문으로 명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쥐’를 가지고 설교하려다가 ‘소’를 가지고 설교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과 더불어 이 두 마리의 암소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교훈을 말씀하시고 있을까요?

2. 법궤 실은 수레를 끈 암소 두 마리

사사시대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주전(B.C.) 1075년 경, 당시의 제사장인 엘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상당히 해이해져 있었습니다. 그럴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는데요, 그 결과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단 하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측의 병사가 4천명이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전투를 준비하던 이스라엘 지휘부는 두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나가자고 했는데, 그러나 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은 참패를 당하여 무려 3만 명의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법궤>도 빼앗겼고,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전사했습니다. 그야말로 충격을 넘어선 참담한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둔 블레셋은 기고만장해졌습니다. 특히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상징인 <법궤>를 빼앗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이것을 자신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긴 것이라 여겨, 마치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 <언약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의 신당에 바쳤습니다.

당시 블레셋이 주신(主神)으로 섬기던 ‘다곤’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몸의 상반신은 수염이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왕관을 머리에 쓴 형상이며, 몸의 하반신은 물고기의 형상으로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 족속이 원래 그리스 지역의 사람들로서 바다를 건너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블레셋은 원래 해양 민족이라는 것과, 그러면서도 가나안에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곡식의 풍작을 위해 이런 이중적인 의미와 그 형상을 지닌 신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를 가지고 온 이후, 블레셋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언약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당에 둔 다음날 아침에 보니 다곤 신상이 땅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다시 일으켜 세운 후,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려져서는 몸뚱이만 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신당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스돗 지역에 전염성이 강하고 치명적인 피부병인 ‘독종’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사망의 환난(5:11)”을 당하거나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온 아스돗 지역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지도자들은 법궤를 가드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법궤가 가드로 옮겨지자 가드에서도 역시 독종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법궤를 에그론으로 옮겼는데, 에그론에서도 마찬가지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법궤가 블레셋에 머문 7개월 동안, 블레셋은 이 법궤로 인하여 신상이 파괴되거나, 또는 ‘독종’의 재앙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또 죽임을 당하는 혹독한 곤욕을 치렀던 것입니다.

블레셋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법궤를 빼앗아 온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으나, 그 기쁨도 잠시, 너무나도 큰 재앙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생하게 되자, 블레셋은 법궤 때문에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지도자들이 복술자와 제사장들을 불러 모으고 의논을 했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것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의 징벌이란 말인가?”
“더 이상 피해를 당하기 전에 이스라엘에게로 돌려보내야겠는데, 어떻게 돌려보낼 것인가?“

토론을 거듭한 끝에 블레셋 지도자들은 ‘금독종과 금쥐를 블레셋 다섯 지방 숫자만큼 만들어서 상자에다 담고, 언약궤와 함께 새 수레를 만들어 거기 실어서 보내되, 멍에 메지 않은 새끼 딸린 암소 둘을 택해서 수레를 끌고 가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해서 수레가 벧세메스로 바로 가면 이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요, 만약 소가 다른 데로 가거나 다시 돌아오면 이 재앙은 우연히 생긴 재난(6:9)’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하필 벧세메스로 보내려고 한 이유는 원래 언약궤가 있던 실로가 블레셋에 의하여 심하게 파괴되었고(4:10), 벧세메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동서로 난 골짜기 길에 있었으며, 무엇보다 언약궤로 인해 재앙을 겪은 마지막 지역인 에그론과 제일 가까운 성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벧세메스에는 언약궤를 관리할 수 있는 레위인 혹은 제사장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수 21:16).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암소 두 마리에게 수레를 끌고서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도록 출발을 시켰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향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 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오늘 본문은 그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3. 이스라엘 밖에서 짐승으로 교훈하시다

1) 이스라엘 밖에서 짐승으로

첫째는 법궤를 돌려보내는 “블레셋 사람들이 의도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한 죄에 대한 사죄의 제물로 금독종과 금쥐를 만들어 상자에 따로 넣어서 한 번도 다른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는 새 수레를 만들어 거기에 법궤와 함께 실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암소 두 마리를 골라 이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블레셋이 이렇게 한 이유, 특히 그 가운데서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운반할 짐승으로 어린 송아지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 암소를 택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을 알면 블레셋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 블레셋 지도자들에게 있어 주된 관심사는 자신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어디서, 혹은 누구로 말미암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즉 그들은 지난 7개월 동안 자기들의 지역에서 일어난 재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부터 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지도자들은 이것을 분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웠는데요, 그것은 그들이 보내는 수레의 진행 방향이었습니다.

왜 수레의 진행 방향이 기준이 되는가 하면, 그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끌고 갈 짐승으로 그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새끼가 딸린 암소를 사용함으로서 그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의문에 답을 내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블레셋 사람들이 궤와 상자를 실은 수레를 쉬지 않고 힘차게 끌고 갈 수 있기 위해서는 힘 있는 짐승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수소, 즉 황소를 택해야 합니다. 또 거룩한 하나님의 법궤라는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그 궤를 끄는 것으로 흠 없고 티 없는 어린 송아지가 더 어울립니다. 그런데 블레셋 지도자들이 암소를 택한 이유는 소가 가지는 일반적인 귀소본능과 제 새끼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동물들은 거의 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저마다 자기가 처음에 살던 집이나 둥지로 회귀(回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만주에서 온 말은 언제나 북쪽 바람을 향해 서고, 남쪽에서 온 새는 나무에 앉아도 남쪽으로 향한 가지에 앉는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죽을 때 태어난 곳을 찾아가 죽고, 거북이도 천년을 살고도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서 죽는다고 합니다. 여우는 죽을 때 그 머리를 고향으로 두고, 연안 개천에 방류된 연어의 치어는 태평양 깊은 바다로 가서 성어가 되지만 알을 낳을 시기가 되면 수만 리를 헤엄쳐 다시 태어난 모천(母川)으로 돌아와 산란을 하고는 일생을 마칩니다. 어릴 적, 소 역시 산과 들에서 풀을 뜯다가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억지로 끌지 않아도 그것들은 본능적으로 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소가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새끼가 있는 암소라고 한다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그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이 암소가 자신의 본능과 다르게 움직인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라는 점을 블레셋 사람들은 판단의 기준으로 정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 돌려보내는 이 일로 하나님과 그가 하시는 일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러한 의도로 암소 두 마리에게 수레를 끌게 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 말씀처럼,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향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 하였고 ․․․ 벧세메스 ․․․까지” 갔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옳았던 것입니다. 지난 7개월 동안 자신들의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틀림없었고, 그것은 자신들이 자기 신이 여호와보다 낫다고 여긴 것에서부터 여호와를 무시한 결과로 징계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암소들을 통하여 당신의 살아계심과, 세상의 그 어떤 신보다 더 위에 계시고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시는 분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모든 역사와 우리 가운데 벌어지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한 사람이나, 어떤 특정한 집단이 이 시대와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거나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건 불신자와 불신 정신이 더 강한 이 세상이라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일을 통하여 깨달은 것입니다.

2) “너희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설교의 시작 부분에서 말씀드렸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거의 없었고, 제사장은 무능했고, 그 아들들은 성소에서 사악한 죄를 저지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영적으로 너무나 어두워져 계시의 말씀조차도 희박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 법궤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전해 들으면서 이스라엘 가운데는 어떤 반응이 일어났겠습니까?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다보니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하나님의 권능이 사라지고, 그 말씀마저도 없어진 시대라고 생각을 했는데, 자신들이 아닌 외부, 즉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그것도 사람이 아닌 짐승들을 통하여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 그 권능이 변함없이 스스로 그 권능을 펼쳐 보이시는 하나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방세계까지도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무시하던 이방인인 블레셋마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한낱 미물에 불과한 짐승인 암소마저 여호와께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실상을 깨달은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절대주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다른 신은 만들어진 신이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 참으로 그가 생존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팔계’라는 법명으로 18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믿은 분의 간증을 읽었습니다. 본명이 ‘정진훈’인 이 분은 1960년 충남 보령시 천복면 하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 가서 구두닦이 하면 돈 많이 번다더라”는 친구의 말에 현혹 되어 육성회비 1500원을 가지고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밤 8시에 영등포역에 내려서 대합실에서 자려다가 승려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대뜸 “정진훈! 너 육성회비 1500원 가지고 서울 왔지?”라고 하는 바람에 그에게 이끌려 사찰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승려가 되기 위하여 3년을 배웠는데도, 한자 하나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자 승려들이 모두 가르치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여자의 걸음걸이를 보고 한 눈에 과부라는 것을 알아맞히자, 그때부터 그 승려의 제자가 되어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팔계’라는 법명을 받던 날부터 12시만 되면 그를 찾아오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 신은 그에게 다음날 시주하러 가서 만나게 될 수 백 명의 이름과, 그 사람들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의 액수, 그리고 과거의 일들을 낱낱이 말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길가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저절로 떠오르기까지 했습니다. 거기다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중국어, 일본어, 영어, 러시아어, 인도어까지 5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대단히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승려가 된지 6년째인 21살 때부터는 여러 대학교에서 동양 철학과 심리학을 강의하는 명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승려 생활 7년째 되던 어느 날, 신이 평소와는 다른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일 고향 친구 아무개를 만날 텐데 절대로 아는 체 하지 마라!’ 다른 때는 만나라는 말만 하던 신이 왜 이번에는 만나지 말라는 건지 궁금해서 진짜로 다음날 고향 친구를 만나자 자신이 먼저 아는 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바로 자기 아버지를 전도한 목사님의 아들이자 초등학교 친구였습니다. 당시 신학교 2학년이었던 친구는 승복차림의 그를 보고 안타까이 여겨 다음날부터 오전 11시만 되면 그가 있던 사찰로 찾아와 성경을 읽어주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타이르고 심지어 때리기도 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그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그 친구가 사찰로 그를 찾은 지 10년이 되자, 그만 그 정성에 감동을 받아, ‘도대체 성경에 무엇이 있기에 친구가 그럴까?’ 해서 몇 해 전에 친구가 준 성경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무심코 펼친 곳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기도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구절을 읽은 그의 마음이 갑자기 울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 믿는 어머니와 아버지 생각도 났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믿는 예수님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픈 마음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그리고 죄 없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 사형을 당해서 죄를 사해주시고 사망과 저주에서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어머니 아버지가 믿는 예수님을 믿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주지에게 그 마음을 알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주지승은 예수님을 믿겠다는 그를 어쩔 수 없다며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를 힘들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그 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방해였습니다. 그 귀신은 그의 배신에 화가 난 듯이 자신의 입을 통해 ‘예수 믿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괴성을 지르게 했고, 그의 손을 끌어다가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팔순의 어머니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그러면 모든 것이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길로 2년 동안 의식을 잃고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귀신은 의식 없는 그의 손을 끌어다가 목을 조르고 주사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몸을 뻣뻣이 굳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그를 늙으신 어머니는 교회로 데려가 교회 바닥에 눕혀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로 인하여 2년 만에 깨어나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깨어나자 동네에서는 잔치가 벌어졌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인근의 많은 박수무당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며, 고향교회는 500여 명의 교인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그의 간증문의 제목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거대한 종교의 힘과 악한 영들의 힘과 무지와 편견을 깨뜨린 강력한 힘을 가지신 우리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이 주도하고, 암소 두 마리가 주연을 한 법궤 사건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알리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는 살아있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이나 이것을 확신하고 자신의 삶에서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살아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한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그 하나님을 바로 믿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가진 역설은 이런 중요한 교훈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주체가 암소라는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역설이냐? 믿지 않는 자가 확인하고, 짐승이 증명하는 이러한 진리라면 얼마나 확실하고 영원불변한 것이냐는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과 그 권능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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