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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의 본 (살전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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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본 (살전 1:5~10)

겨울은 겨울다워야 합니다. 물론 서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래도 따뜻한 날씨가 훨씬 좋은 것입니다만 겨울이 겨울다울 때 다음 해 농사에도 좋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계절을 타는 장사도 그만큼 활성화가 되어 실상은 모두가 더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매서운 추위가 온 나라를 감쌌습니다. 덕분에 모두가 한껏 움츠러들었습니다만 다시금 추위가 풀려서 어깨가 조금은 펴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 무엇답다는 말들을 합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그만큼 무엇답다는 말은 바른 자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성도는 성도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하다면 이건 큰 낭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성도답다고 할 때 그 성도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들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에 사는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신앙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참된 성도다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도 본이 되는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일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고난 중에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는 믿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들이 처음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전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과 큰 믿음 가운데서 전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우리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와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저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과 큰 믿음 가운데서 전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그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다 보고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과 큰 믿음을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것이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생활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 사도와 그 일행의 삶은 바로 주님을 모델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요 그런 자기들의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고 지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주님을 본받는 자의 모습인가 하면 고난을 받는 중에도 성령이 주는 기쁨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성도의 삶이란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성령의 주시는 기쁨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 닥친다고 해도 기쁘게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기들을 택하사 자녀로 붙러주신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된 것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으로 된 것임을 그들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던 그 주님의 고난을 나도 지고 가야한다는 것을 그들은 분명히 믿었습니다. 오직 생명은 생명으로만이 구원할 수 있음을 그들은 알았기에 오히려 고난당하는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가 있었고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예수는 구주시라고 증거하기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그들은 분명히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설사 죽음이 닥친다고 해도 다시 살 것을 믿기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힘든 것은 왜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힘들기만 하냐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다고 치고 믿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전혀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나보다도 훨씬 더 잘 사는 모습을 볼 때 정말 힘들어 집니다.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살기에도 급급할 정도로 힘들게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의 삶의 모습인가? 생각할수록 더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러면서도 내가 살아야 하는지 이러면서도 내가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온갖 의문이 다 생깁니다. 그냥 단순히 내 한 몸만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자녀들을 생각할 때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부르실 때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또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어째서 내 삶은 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처럼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아니 내가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할수록 더 세상은 나를 힘들게만 만듭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잘못은 자기들이 해 놓고도 거꾸로 큰 소리를 칩니다. 내가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할 것 같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너무 이악스럽다고 합니다. 아니 이악스러운 것은 누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왜 거꾸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까지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들, 상처가 되는 일들,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이로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주님이 먼저 이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고난 당할만한 일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상처받은 자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불러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새 삶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비난 받을만한 일이었던 가요? 그것이 죽어야 할 이유였던 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기꺼이 그 길을 가신 것은 그 길만이 생명을 건져 구원할 수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복된 삶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되고 참을 수 있기에 계속되는 연단 가운데서도 오히려 소망을 이루게 된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게 하는 밑바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바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고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고난 중에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결국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바로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때는 언제냐 하면 우리가 오직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입니다. 이를 바꿔서 말하면 고난이 있다고 해서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힘들지만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요 바로 그 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 때문에 내가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요 그 성령의 능력이 내게 함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도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랑 역시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까? 내가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누가 나를 힘들게 하면 당연히 그에게 나도 대들고 마주 싸워야 함이 당연한데 오히려 그가 불쌍한 마음이 들고 오히려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오니 그 힘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내 마음에 그 어떤 좌절과 분노도 시비하고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다 온유함으로 바꾸고 사랑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을 본받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오히려 용서를 베풀었던 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사랑을 계속해서 펼치셨던 주님의 마음으로 고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더 서로를 축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주의 사자를 잘 대해주며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본이 되는 믿음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여러분을 방문했을 때 여러분이 우리에게 잘 대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잘 대해주는 것이 또한 본이 되는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를 잘 섬기는 것은 곧 보낸 나를 잘 섬기는 것이요 이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는 자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 말씀을 전하도록 세움을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말씀을 배우는 여러분들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을 배우는 자들은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 즉 잘 대우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유익하니 심는 그대로 거둘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것이 단순히 말씀을 전하는 자를 잘 대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잘 대우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섬기던 우상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는 곧 지금까지 살아오던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은 내게 잘 하는 자에게 나도 잘 하고 내게 못하는 자는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삶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입니다. 물론 우리도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누구 하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단지 그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세상의 방법과 우리가 다를 뿐입니다. 세상은 남을 희생해서라도 나만 잘 살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단순히 더불어 행복도 아닙니다.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한 섬김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내가 잘 될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헤아리지 말고 주라는 것입니다. 따지지 말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섬김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지지 말고 베풀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내가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장은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남아도 보통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100배로 받으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더 이상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방식으로가 아닙니다. 누구는 난 참 바보처럼 살았다고 노래하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으로 말하면 바로처럼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가장 똑똑하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왜요? 지금은 손해 같으나 오히려 그게 100배나 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눈동자처럼 살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데 주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왜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본받는 믿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원수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면 내가 사랑을 넘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도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잘 대우하는 것도 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지극히 작은 자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라고 해도 그렇게 섬김을 받으면 물론 그들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내가 좋게 되는 비결이란 말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마음이 편해지니 몸도 편해집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워하면 내 마음이 먼저 불편해집니다. 마음이 불편하니 몸도 불편하고 하는 일들도 불편한 마음으로 하다 보니 자꾸만 헝클어지더란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 또한 굳게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이 세상으로서 끝나고 만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헛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헛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 끝이 아님을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데 가서 너희 있을 곳을 준비하겠다. 그러고 나서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름 타시고 하늘로 올리우실 때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우리는 또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 그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노여운 심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된 삶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 모든 것을 심판할 날이 분명히 옵니다.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수고에 대해 귀한 면류관과 상급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들을 손가락질하고 비웃던 모든 사람들이 다 슬퍼하며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 나중에 음부에 떨어져 아무리 후회한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하나 우리는 이미 주님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 친지가 있고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겨 있지만 죽음의 문턱에 있는 그들을 볼 때 우리는 아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누구의 노래처럼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여야 됩니다.

얼마 전 이천에서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만 그곳에서 죽어간 자식을 놓고 울부짖는 어머니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친지가 우리의 이웃이 그보다 더한 지옥 불속에 떨어져 울부짖는 모습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가슴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 뿌려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은 바로 생명을 건져 구원하기 위해서 울부짖는 믿음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로 인해 정말 찢어질 듯이 아픈 마음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눈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그것이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애통하며 부르짖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런 믿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나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가 애통하며 부르짖는 모두가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온 지방으로 퍼졌고, 여러분의 믿음도 그 모든 지역에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의 믿음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믿음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이것보다 더 귀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바로 이래야 되겠습니다. 우리 향남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화성시 온 지방으로 퍼지고 우리의 믿음이 모든 지역에 퍼져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는 귀한 역사가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너희들의 믿음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주님의 입에서 너희 믿음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씀이 나오도록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며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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