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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 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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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 10:9-23)
   
    요즘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소위 안티 기독교 문화라는 것이 상당히 발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 섬뜩한 표현이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그냥 교회를 안 다니겠다는 게 아니고 기독교를 거부하고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안티 기독교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그 중에 핵심된 것만 모아서 생각해 보면 첫째는 요즘 대형교회의 세습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교회에서 받은 상처, 또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반감, 그리고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모순에 대한 실망, 이런 것들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첫째, 세습입니다. 이것은 사실 도덕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서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도 세습합니다. 부시의 가문이 대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 국민이 없습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아들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직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말할지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편의 뒤를 이어서 아내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힐러리가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닙니까. 목회자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가 그 후계자가 되었지요. 오럴 로버츠 목사의 아들 리차드 로버츠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또 로버트 슐러 목사의 아들 로버트 A 슐러가 그 뒤를 이어 수정교회를 목회하고 있고 그리고 긍정의 힘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조엘 오스틴 목사는 자기 아버지 존 오스틴 목사님이 세운 교회에서 두 번째 목사로 뒤를 이어 목회를 하고 있는데 불평하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교인 수가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민주주의 나라라는 미국에도 자식이 부모의 뒤를 잇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정서상의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등이라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데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교회에서 받은 상처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디선들 상처를 받지 않습니까? 사람은 어디서든지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또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상처를 받을 수 있고 가정에서도 상처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떠나지 않고 가정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인데 왜 상처받는 일이 없겠습니까. 없으면 좋지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신앙 자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약간 유아적인 생각이고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믿느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그렇다면 설사 환경이 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가 적응을 해야지요. 내가 직장에 적응해야 되는 것처럼, 군대 문화에 적응해야 되는 것처럼 내가 적응을 해야지, 남들이 내게 적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은 비현실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외에는 나에게 적응해 주는 사람 없습니다. 배우자도 나에게 적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부 다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이해해주고 또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가 적응하는 것이 더 쉽고 더 합리적이고 그것이 더 단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겸손한 것입니다. 내가 적응을 하면 됩니다. 군대를 갔으면 군대 문화에, 직장에서는 직장 문화에, 교회에서는 교회에 내가 적응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려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어렵지 않고 할 만 합니다.

  누가 적응을 잘 하느냐? 결국은 온유한 사람, 또 긍정적인 사람, 이런 사람들이 적응을 잘 합니다. 왜 성경에 하나님이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느냐? 다 그게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뭔가 극복하고 넘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내 자신이에요. 내 자신의 편견, 편벽함, 내 자신의 어두움, 불신, 이런 것을 극복하기가 어려워서 은혜를 못 받는 것이지 은혜를 못 받는 이유가 어떤 외적인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자기를 낮출 줄 알고 때로는 인내하고 작은 불편함,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신속하게 임하고 오히려 평강을 얻고 마음이 더 편해지고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고, 그리고 이전에는 힘들어 보였던 담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반감입니다. 이것도 관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컵에 물이 반쯤 차 있을 때 그것을 ‘아,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말할 수 있지요?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 의롭지 못하다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나무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복음,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야지, 그게 아니고 왜 사람을 정죄하느냐, 죄인이라고 하느냐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왜곡하는 것이고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인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사람이 그러므로 나쁘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요.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결론이라면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인, 또 전적인 타락을 규정하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의롭지 못하고,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히려 기쁜 소식이고 하나님의 은혜, 사랑, 너그러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왜곡해서 거꾸로 생각하니까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으로 들리고 그리고 불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안 믿는 사람들은 지옥 간다는 얘기냐?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이냐? 하나님이 불공평하지 않느냐? 왜 이렇게 잔혹하냐?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을 오히려 정죄에서 건지기 위한 것인데 그 의도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의 하나님을 마치 잔혹한 하나님인 것처럼 치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오히려 하나님의 미움인 것처럼 왜곡하게 되면 그때는 도리가 없지요. 그런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하면 이것을 이해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우편 강도가 ‘주여 주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 사건을 사람들이 봤을 때 ‘아,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회개하고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시는구나. 참 고맙다. 참 은혜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럼 좌편 강도는 어떻게 되느냐? 좌편 강도는 왜 내버려 뒀느냐? 그 사람은 지옥 가라는 얘기냐?’ 이렇게 말을 한다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예수님은 좌편 강도가 당신을 저주하고 욕하지만 침묵하셨습니다. 좌편 강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우편 강도가 ‘주님,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했을 때 그에게 낙원을,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좌편 강도에 대해서는 섣불리 말씀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하나님이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말하는 것은 그것은 사람이 자기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 섣불리 하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오만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말 할 자격이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의구심들이 저절로 해결됩니다. ‘이것은 나의 권한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모든 것이 우리의 승인을 거쳐야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납득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가 납득해야 되고 내가 동의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알고 이해하도록 하셨는데 그것도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해하지 못하면서 우리의 권한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은 그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고, 이미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안에서도 일평생 공부해도 다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해서 너무 서두르면 안됩니다. 때로는 기다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겸손과 온유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인 결함에 대한 실망, 여기에서 우리의 모순을 볼 수 있는데 남들이 나를 죄인 취급하는 것은 극도로 싫어하면서 왜 남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을 죄로 규정하는 것은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남의 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쉽게 판단을 내리고 실망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정죄하려면 자기가 의롭던가, 아니면 자기도 허물이 있다면 남의 허물을 이해하려고 하든가 둘 중의 하나여야지요. 그게 아니고 남에게 꾸지람 받는 것은 싫어하면서 왜 남 탓하는 것은 그렇게 잘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외가 없이 허물이 많고 연약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인류를 버리지 않고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미 우리의 많은 의문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시면서도 실망하지 않으신다, 인생을 버리지 않으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실망하지 않는데 우리가 실망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시지만 실망하지 않는데 우리가 실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까다로운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쓰시기 위해서는 먼저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가 갖고 있는 편견을 극복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환상을 보는데 이 초자연적인 현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어떤 환상이나 은사를 주실 때 초자연적인 것을 허락하실 때 그것은 뭔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그 구경거리가 되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본능적인 차원에 갖고 있는 불신이라든가 편견이라든가 무지를 풀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하늘에서 큰 그릇이 내려오는데 보자기가 네 귀퉁이가 들려서 땅으로 내려온 것을 봤습니다. 넷이라는 숫자는 땅의 숫자입니다. 이 보자기 안에 여러 짐승들, 네 발 달린 짐승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그때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No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부정한 것을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그때 음성이 들리기를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속되다고 하지 말라’ 아주 유명한 말씀이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누가 인간을 속되다고 하느냐? 누가 인간을 오해하느냐? 누가 인간에 대해서 각박하냐?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각박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속되다고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인간을 속되다고 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각박하게 대합니다. 마치 여자가 여자를 차별하는 것처럼, 또 피식민지 사람들이 서로에게 못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탓하는 게 아니고 사람끼리 서로 탓하고 서로 속되다고 하고 서로 정죄하고 차별하고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편견을 깨뜨리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이 편견을 벗어버리기 전까지는 이방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자는 교인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한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일을 하는 분들은 늘 유념해야 되는 것입니다. 양들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 양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설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러나올 것이고 이론적으로는 옳은 말이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먹으면 체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먹으면 상처를 입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기억해야 되는 면이 그것입니다. 개혁을 하더라도 비판적으로 하는 것과 사랑으로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이방인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방인을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됩니다. 이방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고넬료에게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기 전에 먼저 세 번이나 이런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신학적인 이슈가 제기됩니다. 고넬료는 아직 복음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그들의 집에 찾아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여기서 ‘하나님이 깨끗케 하셨다’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깨끗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깨끗하게 되는 것이냐?’ 왜냐하면 고넬료가 아직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도 이전에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에 대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은혜를 받느냐 아니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느냐? 어느 것이 먼저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성령을 받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받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둘 다입니다. 이것은 상호보완적으로 함께 역사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믿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가면 하나님도 더 가까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예수님도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다가가고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천국의 기쁨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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