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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10) : 장애물 9 : 권태↔정열 (삼하 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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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이르는 길(10) : 장애물 9 : 권태↔정열 (삼하 11:1-15)

<현대인의 公敵 권태>
그동안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해오다가 잠시 중단했었습니다. 연말연시에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야만 했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다시 모색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오늘 주제와 포함해서 세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아홉 번째 장애물은 '권태'입니다. 권태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열정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삶에 열정을 잃어버리고 아무 재미도 없이, 그저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듯이 판에 박힌 대로 사는 것, 권태야말로 현대인의 무서운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다 정확히 국어 사전은 '권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싫증이나 게으름." 여기 보면 권태는 두 가지가 시들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는 일이 시들해집니다. 그 다음에 어떤 상태, 즉 관계가 시들해집니다. 부부관계나 친구관계가 알콩달콩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권태란 하는 일도 재미가 없어지고 부부관계를 비롯한 이웃관계도 시들해져서 싫증이 나고 게을러지는 상태입니다. 

알베르 카뮤의 소설「이방인」에 보면 주인공 뫼르소가 살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섯 발의 총알을 발사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법정에서 왜 살인을 했느냐는 추궁을 당하자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죽였다고 대답합니다. 뜨거운 햇빛이 싫어서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태를 못 이겨 살인을 했다는 말입니다. 카뮤는 현대인이 직면하고 있는 권태의 문제를 예리하게 분석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생활, 해가 지면 잠자고 해가 뜨면 아침 먹고 직장에 가서 일하고 뭔가 엑사이팅한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일탈(逸脫)을 꿈꾸게 되지요.

<권태에 직면한 다윗의 치명적인 일탈>
이제 중요한 것은 권태를 어떻게 처리하고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건전하고 신앙적인 방법으로 권태를 이겨야지 그릇된 방법으로 일탈을 꿈꾸었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마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경우가 권태를 잘못된 방법으로 처리한 대표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권태를 이기지 못한 다윗이 간음, 거짓말, 살인이라는 삼중의 죄악에 빠져든 것입니다.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일탈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는 너무나 치명적이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욕정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둘도 없는 충신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딱 한번 동침을 했는데 밧세바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 당시 왕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도 그냥 한 때의 불장난으로 그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기에 얼마든지 왕권으로 덮을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밧세바가 다윗의 씨를 잉태했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버지가 누구냐가 큰 시빗거리가 될 것이 뻔했지요. 밧세바가 다윗과 동침한 후 몇 주가 지난 뒤 사람을 보냈습니다. 자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내 배 안에 자라고 있는 생명은 당신의 씨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던 것이지요. 그 때부터 천하를 호령하던 다윗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합니다. 일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다윗이 이 말 한 마디에 사정없이 흔들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배 지나간 뒤 물결 자국은 쉬 사라집니다. 뱀 지나간 뒤 바윗돌에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다윗과 밧세바만 아는 불장난, 아이만 생기지 않았어도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쉽게 잊혀질 수 있는 한 때의 일탈이지요. 그런데 불륜의 증거인 아이가 생겼습니다! 이것을 밧세바가 다윗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제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는 조항이 있습니다(레 20: 10). 이것은 왕이나 일반 백성에게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윗과 밧세바는 꼼짝없이 함께 죽게 생겼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밧세바를 유혹했을까요? 아니면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을까요? 아니면 둘 다 공모자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철저히 침묵합니다. 2-4절을 보세요.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기에 보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그 어떤 대화나 애정이나 친밀감을 암시하는 말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즉흥적으로 즉각 즉각 일어납니다. 다윗이 목욕하는 아리따운 여인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둘도 없는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욕심을 내어서 안 될 여인임을 확실히 안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람을 또 보내어서 밧세바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밧세바와 정을 통했습니다. 밧세바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서 자기의 임신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행동은 모두 짤막짤막한 동사로 묘사되었습니다. 그 어떤 깊은 숙고나 성찰도 없이 모든 일이 즉흥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권태를 이기지 못한 다윗이 무모한 일탈을 감행했던 것이지요!

성경이 자세한 내막을 밝히지 않지만 여러모로 추측은 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다윗이 순간적인 정욕을 참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하필 다윗이 왕궁의 옥상을 거닐 때 밧세바가 목욕을 했을까요? 다윗을 유혹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다윗이 강압적으로 오라고 해서 정을 통했겠지만, 단 한 번 정을 통한 뒤 아이가 들어선 것도 다분히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배란기를 다 계산해서 유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의혹은 나중에 밧세바가 나단 선지자와 공모해서 자신의 소생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치밀한 계략을 부리는 데에서 설득력을 얻습니다(왕상 1: 13-31). 밧세바는  순진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먼저 유혹했느냐, 밧세바가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먼저 유혹했느냐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고 할지라도 일차적으로 왕으로서의 다윗은 책임을 면키 어렵습니다.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사무엘 하의 저자가 밧세바의 인격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 채 오로지 다윗의 행동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밧세바는 자기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는 것만 능동적으로 했습니다. 그 밖의 모든 행위가 수동적입니다. 다윗이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이끄는 대로 간음사건이 일어난 것이지요! 비록 치밀한 계략을 숨긴 채 밧세바가 먼저 알몸으로 다윗을 유혹했다고 할지라도 다윗이 자기의 충신 우리아 장군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중단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기어코 정을 통하고야 말았습니다. 모든 책임은 다윗에게 있습니다!

<권태→무모한 일탈→죄악→파멸>
이렇게 해서 다윗은 간음죄를 벗어나가기 위하여 아주 간교한 꾀를 냅니다.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아를 후방으로 불러서 밧세바와 동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밧세바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씨라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의 음모는 뜻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간교한 다윗과 달리 우리아는 우직했습니다. 만고의 충신이었습니다. 8절에 보니까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발을 씻으라는 말은 아내와 동침하라는 히브리 관용어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내와 회포를 풀라고 했는데 우리아가 응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고생하는데 어찌 자기 홀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있느냐는 항변이었습니다(11절).

아, 다윗과 얼마나 대조가 되는지요!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부하들은 생각지도 않고 충신의 아내와 정을 통했는데, 우리아는 자기 목숨을 바쳐 다윗을 위해 충성할 뿐 아니라 전쟁이 계속되는 한 일신의 평안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 헷사람 우리아가 다윗의 비윤리성을 온 몸으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1차 작전이 실패하니까 이번에는 아예 술에 잔뜩 취하게 해서 술기운으로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2차 작전도 실패했습니다(13절). 우리아를 자기 집에 내려가게 하는 작전이 무위로 끝났습니다. 가장 희생을 덜 치르고 아주 손쉽게 자신의 죄를 은폐할 수 있는 기막힌 전략이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지요. 임신한 밧세바도 어떻게 할 수 없고 그 남편 우리아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제 다윗은 앞뒤 돌아보지 않고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었습니다. 아예 우리아를 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없애버리기로 했습니다. 전방에 나가 있는 총사령관 요압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습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한 최전선으로 우리아를 앞세우고 나갔다가 그만 홀로 내버려두고 다른 군사들은 일제히 퇴각해서 우리아만 맞아 죽게 하라는 음모였습니다. 요압과 공모해서 살인교사를 했던 것이지요!

이제 우리아가 죽어 없어지면 밧세바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우리아의 씨라고 우기면 끝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밧세바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남편이 없기 때문에 간음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맞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아는 자기를 없애라는 사형 집행서를 들고 요압에게 갔습니다. 순진무구한 우리아와 간교하기 짝이 없는 다윗이 또 한번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신앙의 사람 다윗이 어느새 청부살인업자로 변모했습니다.

다윗의 3차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다윗의 지시대로 우리아는 전사했습니다(17, 24절). 우리아가 죽었다는 보고를 들은 다윗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진실을 영구히 은폐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이 죽었으므로 밧세바를 쉽게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아가 죽은 뒤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와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다윗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든 죄악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져들고 모든 문제는 일거에 해결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삼하 11: 27절은 기막힌 말씀을 던집니다. 다윗이 행한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는 것입니다.

<권태를 건설적으로 극복하기>
11장에서 일어난 스토리를 설명하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오늘 제 말씀의 주제는 권태입니다. 권태와 이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윗이 뻔뻔스럽고 비윤리적인 일을 서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권태 때문이었습니다. 11장은 다윗의 전무후무한 승전 기록을 적고 있는 삼하 5-10장 바로 뒤에 나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강력한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했습니다. 수많은 국가들을 줄줄이 쳐서 이겼으며 조공을 바치게 했습니다. 이것을 삼하 8: 14절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라는 말씀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다만 하나 아직 미결된 전쟁이 있었습니다. 암몬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을 가볍게 생각해서 총사령관인 요압에게 맡기고 자기는 후방인 예루살렘에서 쉬었습니다. 이제 이 정도면 됐다 싶어 권태가 찾아왔던 것이지요! 사방을 차례로 정복한 뒤 하나 남은 암몬과의 전투는 부하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여유 있는 휴식을 즐기는 것이지요!

1절을 보세요.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다윗은 아직도 긴장을 늦추지 말고 마지막 남은 전투를 진두지휘했어야 하는데 거듭된 전쟁에 권태를 느꼈습니다. 싫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부하들만 전쟁터에 보내고 자기는 팔자 좋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권태기에 타락은 순식간에 소리 없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윗이 긴장하고 있었을 때 언제나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이 다윗에게 시기심과 열등감을 느껴 여러 차례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강력한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수시로 위협했던 불레셋 민족을 근 10년 간에 걸쳐서 물리칠 때에도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뒤 17년 동안 이스라엘은 놀랍게 번영했습니다. 처음 12년 동안 주변 강대국들과 싸울 때마다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윗을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었을 때 다윗은 중년에 접어들었습니다.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지요. 다윗이 47세쯤 되었을 때 머리카락에 흰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청동 거울 앞에 섰더니 똥배가 나왔습니다. 그 옛날 전쟁터를 휘젓고 다니던 날렵한 몸매가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인생이 무상해지고 무료해지고 권태감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결혼생활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7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대개 정략적인 결합일 뿐 살가운 애정이 없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과의 결혼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사울을 뒤이어 왕이 되려는 생각으로 미갈과 결혼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미갈의 잔소리가 부쩍 심해졌습니다. 물론 지혜롭고 말 잘하는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았을 때에는 다윗 자신도 지혜로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15년 정도 지나니까 아비가일에게도 더 이상 신선함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결혼 생활이 무료해지고 삭막해져갔습니다.

인간 관계만 권태감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매달렸는데 승승장구, 하는 일마다 잘 되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잘 나서 잘 된 것 같은 착각이 생겼습니다. 자다가도 몇 번씩이나 일어나 자기가 이뤄놓은 성취가 놀랍고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권태가 물밀 듯 밀려왔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권태는 모든 것이 잘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찾아옵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많은 문제와 씨름할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서 고민하고 힘들게 일할 때에는 삶이 권태롭다고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평안하고 계획 세웠던 일들이 척척 잘 될 때 권태가 찾아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잊기 쉽습니다. 영적인 권태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때 세상적인 방법으로 일탈을 꿈꿀 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므로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다는 이유 때문에 다윗의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백주 대낮에 욕보이는 패륜아가 나타나질 않나, 왕권을 빼앗으려고 역모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다윗 가문에 칼부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탈의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던 것이지요!

영적 권태기에 빠져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천길 낭떠러지 코앞을 멋도 모르고 걷는 것 같이 위태롭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권태를 이겨야 합니다. 다윗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권태를 그릇된 방법으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불세출의 영웅, 위대한 믿음의 사람에게도 권태가 찾아왔습니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 종류의 권태감을 느끼는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다 권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이나 인간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권태가 찾아올 때 그 원인을 잘 분석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행을 한다든지 운동을 한다든지 아니면 좋은 취미 생활을 새로 시작해서 건전한 방법으로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첫 사랑이 어디에서 어떻게 떨어졌는지를 알아내어 신앙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본보기로 삼아 어리석고 위험한 일탈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수시로 찾아오는 권태를 믿음으로 잘 이겨내시고 열정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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