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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와신앙 (마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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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신앙 (마 7:21-23)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믿음이 자라나지 않는 분들이 있다. 교회 안에 있지만 ‘불신자’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들은 교회 안에 있어도, 거듭난 성도가 아니라, 종교인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종교와 양심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종교의 씨앗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고, 양심의 씨앗은 선악을 알 수 있는 분별력을 말한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씨앗이 병들어, 부패한 종교와 부패한 양심의 열매들을 마구 맺게 되었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 종교와 상관없는 족속은 찾아볼 수 없다. 온 세상에 가득 찬 우상들을 보면, 하나님 없이 지내기보다, 차라리 자신을 돌이나 짐승보다 낮추어, 그들을 섬기는 편을 택한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하여, 인간이 경외하고, 존중함’이라고 한다. 인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면에서 보면, 기독교도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종교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초월적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한 계시의 종교와, ② 인간이 초월적인 분으로 여기고 만든 세상의 종교가 있다. 초월자의 계시를 따르는 종교를 ‘생명, 신앙’이라 하고, 하나님의 계시와는 아무 상관없이, 인간이 만든 것을 우리는 ‘종교, 우상’이라고 구분한다.

우상은 하나님의 계시와는 아무 상관없이, 순전히 자신의 호기심이나, 사색을 통해 만든 하나님을 믿는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기에,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다. 우상과 미신은 “사람의 능력이나 재주나 돈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게 좋도록 만든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은 미신이 좋아서 섬기지 않는다.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니다. 내게 좋도록 귀신을 달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란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 심각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잘못해석 하는 경우가 많다. 율법의 말씀을 행할 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왜 하나님께서 모른다고 하셨나?

일반적으로 목소리가 크고, 능력이 많으면, 신령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많은 권능을 행하면, 큰 교회를 담임하면 최고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되어졌다고 해도,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책망하시며 쫓아내셨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기에, 종교행위일 뿐이다.

(1) ‘주여 주여’라고 열심히 외치며, 3가지 놀라운 일을 했지만, 진실함이 없었다.

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

주의 종이라는 명목 하에, 거짓 예언과 거짓 환상과,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많다. 직분으로 갈 수 없다. 여기서 “노릇”이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 말씀을 적용시켜 보면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목사 노릇하며”, “내가 주의 이름으로 장로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집사 노릇하며”하는 말이 될 수 있다. 참다운 목사가 되어야지 목사 노릇을 하면 슬픈 일이다. 참다운 장로(집사)가 되어야지, 장로(집사) 노릇을 하면 비극이다.

‘노릇’이란 대역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광대’노릇을 의미한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한다. 이리도 양의 가죽을 입고, 양의 노릇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가짜다. 그러므로 어떤 직분을 맡아서, 노릇을 하는 사람보다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

②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다.

요즘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귀신들이 나갈 때는 굉장하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하나님의 역사가 막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모른다고 하셨다.

③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도 고쳤고, 앉은뱅이도 일으켰고, 장님도 눈을 뜨게 하는 이적을 많이 일으켰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내가 너를 모른다’고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적은 지금도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사탄도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잘 일으킨다. 잘 맞춘다는 족집게 무당의 이야기도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사도 있다. 허경영씨와 같이 눈만 마주쳐도 병을 고치고, 축지법을 쓴다는 사람도 있다.

이적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적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이 전부다. 복음이 전부다. 말씀이 전부다. 초대교회에도 그런 일들이 있다.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하였다.

주님과 연관 없는 사단도, 기적을 베풀어서,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기도 한다. (계13:13-14)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이적을 행하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자 하더라”고 했다.

사람들은 기사와 이적을 보고 따라다닌다.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또한 교회는 다 썩었다고 하며, 자신들에게 와야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들은, 권능과 능력과 예언까지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단이요, 거짓증거자일 뿐이다.

(살후2:9-10)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겉으로 보면,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주여, 주여’ 하였다. 선지자라고 하면서, 예언도 한다. 귀신도 쫓고, 능력도 행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2)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행위를 했다.

① 말과 행위가 같지 않았다. 어떤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보면, 교활하고 거짓일 뿐이다. 웅변술이 있어서, 말도 잘하고, 사람은 잘 끌어드리는데, 내용을 보면 진실이 없다. 그들은 종교적인 기술이 많아,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움직일 수 있는지 잘 터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정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중요하지 않고, 마음 중심이 겸손하고, 사랑하고, 진실해야 한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종교는 외면을 중시하고, 신앙은 내면을 중시한다.

② 그 사역의 주체가 주님이 아니요, “우리”요, “나”였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주님의 이름은 하나의 도구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분명히 주어가 “우리”다.

  "우리가 선지자 노릇을 하였고, 우리가 쫓아냈고, 우리가 행하였다.”이다. 주의 이름은 단지 하나의 수단이나 도구에 불과하다. 헬라어에서 전치사 없이 나오는 명사, 구격(具格)은 ‘수단이나 방편’으로 쓰인다. 헬라어 원문에 3차례 모두 “주의 이름으로”라고 구격으로 씌어졌다.

그들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면서 드러내기 원한 것은, 바로 “주님”이 아니라, “우리”(자신)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3장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지 않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40년 동안 걸어본 일이 없고,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앉아 구걸하던 그가, 베드로 사도에 의해 걷게 되었다.

이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둘러, 모여들었다. 그때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라 말했나? (행3:1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리고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영광을 돌렸다.

본문의 주인공들이나, 베드로 사도나 똑같이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본문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주님의 이름은 한갓 수단, 방편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철저히 부인했다. 
예수님의 이름이 주체가 되고, 자신은 다만 그 이름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그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로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종교와 신앙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종교는 자신을 위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믿음이며, 신앙은 주님을 위해 계시하신 믿음이다. 그렇기에 종교는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 팔아먹는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희생한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살펴보시기 바란다.

2.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21)

(1)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면, 잡혀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불러야 한다.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

결혼하려는 신랑신부에게,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라고 대답하였다. 왜 사랑하느냐고 했더니, 조건이 좋기 때문이라면 문제가 있는 사랑이다.

지금은 상황이 어렵기에, 상황을 봐서 조건이 좋아지면, 결혼을 하겠다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다. 우리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할 때, 부자가 될 것 같아서,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믿는다면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

또 마음에 품은 것을 고백하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고백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여도, 마음으로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처럼 입 다물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하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정한 고백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 되심을 시인하고 드러내야 한다. 입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인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앙은 입으로 믿고,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 정, 의, 전체다. 다시 말해 전인격적으로 믿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지식만의 구원은 가짜 구원이고, 감정만의 구원도 가짜이고, 의지의 결단만으로 주님을 영접한다면, 그 역시 가짜구원이다.

‘주여’라는 말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나는 당신의 종이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런데 실제로 주여 주여 열정적으로 주님을 부르면서, 정말 순종하지 않는다면, 입술의 표현일 뿐이지 거짓말이다. 종은 주인에게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 자기주장이나 견해가 없다. 오직 순종과 헌신뿐이다.

(2)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문 (마6:1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 주님은 (요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여, 다 구원받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는, 믿지 아니하는 불신의 죄만 보신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름은,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며, 예수님만이 나의 목표요, 목적이요, 전부요, 생명이요, 나의 가치관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나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만 한다. 우리는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사랑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우리는 명심하여, 나의 기분, 경험, 내 생각은 접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고, 교회를 이롭게 하고,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자. 우리의 신앙을 키워, 은혜의 깊은 자리에 들어가자. 그리고 초심을 버리지 말자.

우리가 봉사하는 이유는, 우리의 봉사를 알아달라는 말이 아니다. 인정받으려는 함도 아니다. 다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으려 함이 아니다.

(3) 주님께서 아시는 자다.

안다는 말은 경험한다, 낳았다는 말이다. (23)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제2 부정과거) 못하나니” 이 뜻은 “내가 너희를 만난 적이 결코 없다, 낳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을 믿으며,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였다가, 타락한 자들이 아니다. 처음부터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이다. 거듭나는 체험은, 수없이 반복되는 일상적인 체험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 중에, 단 한 번 체험하는 1회적인 체험이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지옥에 갈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 이를 성도의 견인(堅忍, 끝까지 견딤, perseverance)라고 한다.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하였다.

결론이다. 예수님을 미신적으로 믿고 있으면, 주님이 모르신다. 미신적인 믿음은, 주님이 모르신다. 주님과 관계없는 믿음이다. 미신은 예수님을 어르고 달래서, 나에게 좋도록 하는 생활이다. 예수님께 기도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를 좋도록 만드는 기도가 종교다.
 
예수님의 이름을 나를 위해 쓰지 말고, 내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 신앙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미신은 철저하게 이 세상에 국한한다. 이 땅에서 잘 되기만을 바라는 의식이라면, 이는 기독교적인 미신이다. 신앙에는 영생이라는 이 위대한 비전이 있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내가 만든 하나님, 종교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계시한 말씀을 따라 살자. 우리 자신이 주님의 도구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라.

이 문제가 바로 되지 않으면,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다. 우리의 신앙은 오로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신앙이다. 우리는 신앙의 목표이시며 푯대가 되시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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