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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의 복이여! (마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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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의 복이여! (마 5:1-4)

I. 눈물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을 말씀하실 때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습니다. 허나 두 번째 복을 말씀하실 때는 그냥 "애통하는 자는"복이 있나니 - 라고 했습니다. 어떤 애통인지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그냥 하나님 앞에서 우는 모든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애통은 애통자체에 복이 있다는 겁니다.

아이들 노래 가운데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우는 아이에겐 싼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주신데"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겐 이 노래가 사실일지 모르나 어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사실 일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기도생활에서만은 오히려 울면 모든게 해결이 됩니다.

그 눈물이 내가 흘리는 인간적 눈물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흘리시는 눈물, 하나님이 주신 눈물일때 그 눈물은 대단히 큰 복이 된다는 겁니다.

먼저 눈물엔 생리적 눈물이 있습니다. 눈망울을 촉촉히 적시기 위해 흐르는 눈물, 눈에 먼지나 티가 들어갔을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해 흐르는 눈물입니다. 이 생리적 눈물이 충분치 못하면 안구 건조증에 걸리고 이런 사람들은 인공 눈물이라도 넣어야 눈이 건강해집니다.

두번째 정서적 눈물이 있습니다. 기쁠때 슬플때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흐르는 눈물이 있습니다. 이 감정의 눈물이 많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답니다. 정서적 눈물은 장수에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여성분들이 남성들보다 오래사는 이유도 이 정서적 눈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정서 건조증에 걸린 사람은 감정세계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세번째 본문이 말하는 영적 눈물이 있습니다. 성경에 눈물을 표현하는 단어가 9가지 정도 되는데 그중 본문이 말하는 "애통한다"는 이 말은 우선 강도에서 가장 강한 표현이고, 그 내용이나 원인에서도 가장 신령한 눈물로써 대단히 영적인 눈물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눈물이요 성령님의 눈물이요 성령의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말합니다. 그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눈물입니다.

5장 1절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산으로 따라온 불쌍한 무리와 하나님 나라를 보고 싶어하는 제자들의 가슴에 흐르는 눈물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아파하지 마라. 애통하는 너희는 복되도다."

애통이란 말은 헬라어로 '펜테오'인데 본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애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에 '단장'이란 말이 있습니다. 끊을 斷, 창자 腸 - 단장이란 말이 생긴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진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러 가다가 한 지역을 지나가는데,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잡아옵니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옵니다. 마침내 새끼 원숭이가 있는 배에 올라타자 마자 어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병사들이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까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끼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큰 슬픔을 가리켜 '단장의 슬픔'이라 부르게 됩니다. 애통이란 말은 이처럼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을 의미합니다.

마태가 말하는 애통은 단순히 배가 고파 우는 눈물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갈 때 아파하며 우는 눈물, 국가적인 재앙이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살려달라 애원하며 흘리는 눈물, 하나님의 영광이 깨어질 때 느끼는 의인의 고통을 일컫는 말입니다.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 라는 아일랜드 속담이 있습니다. 눈물 그 자체는 괴로운 것이지만 눈물을 잃어버린 이 세대는 더욱 비극적인 시대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눈물없는 사람, 눈물이 없는 공동체, 눈물이 없는 세대를 향하여 한탄하셨습니다. 「애곡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나무라셨습니다.

아람속담에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토마스 왓슨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낙원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스펄전은 "천국은 메마른 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태가 말하는 애통의 첫 번째 영역은 죄 많은 자신을 보고 우는 눈물입니다.

II. 자신을 위한 눈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울지 않을 것을 인하여 울고, 울어야 할 때는 울지 않는 눈물이 왜곡된 시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흘려야 할 신령한 눈물이란 어떤 눈물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할 때 여인들이 뒤를 따르며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우리가 흘려야 될 신령한 눈물은 자신과 가정, 내자식들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흘리는 눈물입니다.

타성적인 눈, 안락의 눈으로 나를 볼때 이만하면 괜찮은 줄로 알았습니다. 신앙생활도, 영적인 상태도 남들만큼은 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I'm something. 그러나 어느날 성령이 내 눈을 열어 나를 보여주십니다. 영성이 민감해졌습니다. 그 맑은 눈으로 나를 보니 자기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 환상이 깨어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이 자랑하던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까지 쌓아올린 자아라는 바벨탑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자기속에 있는 것은 죄뿐이요 보여 줄 것은 허물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I'm nothing.

바로 이 순간 일어나는 행동이 애통입니다. 울어도 끝이 없고 옷을 찢고 마음을 찢어도 끝이 없는 그 비참한 상태를 애통이라고 합니다. 애통은 자아가 깨어지고 부셔지고 찢어지고 불타는 순간 느끼는 아픔입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깨지면 망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는 깨지면 삽니다. 가슴이 깨지고 열리면 세상이 다가옵니다. 눈물샘이 깨지면 하늘이 보입니다. 자아가 깨지면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일찌기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말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뼈가 쇠하였도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아파하고 또 아파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장담과 다짐이 무너지는 순간 통곡하며 울었고 평생토록 닭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못난 자기를 깨닫고 울었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할 능력이 없고 행하는 것마다 죄뿐인 자기를 발견하고 울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자기 모습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애통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는 순간 더러운 모습의 자기를 발견하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애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사람마다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통의 눈물은 순수한 것입니다. 죄를 보고 애통하는 자를 예수님은 용서하십니다. 자기를 보고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의 은혜를 부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복되구나 눈물이 있는 자들이여. 오 놀랍도다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들이여 위로가 너희 것이로다!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미래 수동태로 되어 있지요. 위로하는 분 - 주어가 숨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하나님입니다. 애통하는 자를 하나님이 위로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 되냐는 것입니다.

위로라는 헬라어는 "곁에"라는 단어와 "부르다"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내가 애통할 때 그 애통은 누군가를 내 곁으로 불러오게 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라는 말과 보혜사 성령이란 말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얻을 것임이요!"

애통은 자기 성찰에서 시작이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모르는 사람,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교만의 눈으로 자기를 보기 때문에 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내 영의 눈이 열리면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비참한 미래를 보게 됩니다. 이대로 가면 나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는가? 깜짝 놀라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오늘의 실패는 내가 심은대로 내가 거두고 있는 것이었구나. 이렇게 사는 아비와 어미를 둔 내 자식들은 무엇을 거둘까?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심은 것이 없었으니 거둘 것도 없습니다. 뒤늦게나마 새벽부터 씨를 뿌리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요.
나를 살리고 자식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힘은 눈물에서 시작이 됩니다.
눈물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꿉니다. 눈물은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눈물은 황폐한 땅을 축복의 땅으로 바꿉니다.

유대문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나는 너의 죄로 인해 너희를 징벌하노라. 너희는 이제 에덴 동산을 떠나 슬픔과 곤고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의 자비는 그치지 않고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사실 너희는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삶의 곤고 가운데 있게 될것이다. 그러나 나는 천국 창고에 값진 보물을 쌓아두고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 보물을 얻는 비결은 바로 눈물이다. 삶의 고난이 너희를 억누르고 슬픔이 너희를 사로잡을 때 그래서 더이상 너희 힘으로 견디지 못할 때 너희 눈으로부터 이 눈물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할 때 너희의 짐이 가벼워짐을 느낄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이 말을 들을 때 슬픔이 그들을 엄습해 왔습니다. 눈물이 그들의 눈에 고이더니 뺨을 타고 흘러 내려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눈물이 메마른 땅을 적셨습니다. 이 눈물이 처음으로 메마른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손대대로 눈물로 땅을 적셨고 그때마다 슬픔은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인간은 슬픔 가운데서 눈물을 흘려야 했지만 땅은 또한 이 눈물로 인해 기름지게 되었다는 유대문학의 설명입니다.

III.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눈물

마태가 말하는 두번째 애통의 대상은 가족, 이웃 내가 속한 공동체의 약점 때문에 우는 눈물입니다.

우리가 흘려야 될 또 다른 신령한 눈물이란 어떤 눈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하신 분이셨지만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셨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나옵니다.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다 보면 유모어에 관한 책들이 퍽 많이 나옵니다. 미국 서점에 가서 보더라도 유머에 관한 책에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물에 관한 책은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눈물, 애통이란 것은 현대인들에게 인기없는 주제입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성경에 비문처럼 쓰여있는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참된 애통은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점까지도 자신의 허물인줄 알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애통은 곧 이웃을 향한 애통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신앙인이 흘려야 할 또 다른 신령한 눈물입니다.

에드워드 제드슨의 말을 들어보십시요. "고통과 성공은 다정한 길동무이다. 만일 여러분이 고통없이 성공했다면 여러분 앞에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성공도 못하고 고통만 받았다면 당신 뒤에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참으로 진리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겐 이웃을 살리려는 눈물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심장을 안고 이웃을 바라볼 때 잃어버린 영혼 때문에, 사탄에게 빼앗긴 백성 때문에 아픈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저희들이 몇년 전 싱가폴 교회들을 탐방 갔을 때 로렌스 콩 목사님과 같이 손을 잡고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기도 중에 "우리 류 목사님의 눈을 열어 교회 밖 잃어버린 영혼, 죽어가는 영혼, 사탄에게 빼앗긴 영혼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요. 저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불붙는 마음을 주십시요"라는 절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때 로렌스 콩 목사님의 가슴 속 불이 내 심장에 옮겨 붙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목회 철학이 바뀌었습니다. 불신자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로, 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아는 교회로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은 뒤에는 누군가 수고하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눈물로 기도해 주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시카고 강변에 "커늘 클라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불량배를 대상으로 전도설교를 해서 많은 불량배들을 회개시켰습니다. 그 비결은 설교 중에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울보 목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이 창피해서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눈물도 그쳤고 그후부터는 설교를 해도 회개하는 사람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깡패들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 울보가 되게 해 달라고 했더니 눈물이 돌아왔고 다시금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교회를 위해 울 수 있기를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언젠가 우리교회 간증 잔치에 오셨던 강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교회 가장 모범적인 교회의 하나로 알고 온 한소망교회에 눈물이 모자란다는 겁니다. 성도들의 기도의 양이 모자란다는 겁니다. 마땅히 마음과 몸과 물질을 담아야 할 제직들의 헌신의 양이 모자란다는 겁니다. 깊이 없는 헌신 때문에 성령님이 탄식하신다는 겁니다. 주실 축복을 쌓아두었는데 모두들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비전도 여러분의 눈물을 먹고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비전채플 건축도 우리의 눈물로 세워져 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려는 그 눈물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당신의 눈물은 이웃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IV.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

마태가 말하는 세번째 애통은 하나님 나라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나라를 위한 눈물입니다.

성경의 애통은 자기를 보고 하는 애통, 이웃을 향해 우는 애통에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나라를 향한 애통입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죄로 사무친 백성을 보면서 울었고,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울었고 멸망될 도성을 보고 울고 또 울어서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곧 동족의 구원을 위한 애통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도 똑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이 나라의 아픔과 상처가 보입니까? 타락과 멸망을 향해 치닫는 사회와 문화가 보입니까? 민족의 아픔과 위기를 보십시요. 오늘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애통을 필요로 했던 때가 또 있었나 싶습니다.

애국자가 다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두 애국자입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겐 조국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위인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특별히 조국이 큰 어려움에 빠져있다는 비보를 전해듣고 찢어지는 마음을 부둥켜 안고 울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노라"(느1:4).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나라의 운명이 멸망으로 기울어져 가는 민족의 쇠운을 보고 가슴치며 울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사랑하여 주셨는데 이 민족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 한번은 평안도 어느 시골집에 일본 관헌을 피하여 은둔하고 있을 때 주인장이 귀한분 오셨다고 비단 이부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선생은 이 비단 이부자리를 부둥켜 안고 "내 동포, 내 형제, 그리고 애국동지들은 망국의 한을 품고 이 밤도 이역만리 해역에서 노숙하며 떨고 있는데 나는 평안한 잠자리에 있구나."

잠못 이루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언제나 애국자들에겐 눈물이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설교인 "일사각오"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로 제단이 더렵혀져 가는 모습을 보고 울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대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구나."고 외쳤습니다.

애통하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애통할 줄 아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던 눈물이 바로 이런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잠시 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포위된체 일백만 시민이 굶어 죽고,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처참히 학살당하며 성전은 무너지고 도시는 파괴되고 회개를 모르다가 비참하게 망해갈 조국의 내일을 보시며 안타까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심정으로 이 나라 이 민족, 이 백성 이 사회를 향한 뜨거운 눈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비운의 역사 앞에 조국을 지키며 울던 순국선열들의 그 눈물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민족을 구원코자 피를 흘리며 울던 순교자들의 눈물.

"하나님이여 내 조국을 내게 주시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스코틀랜드 해변가에서 울며 몸부림하던 존 낙스의 그 눈물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총칼로 세운 나라는 망하는 때가 있으나 기도의 무릎으로 세운 나라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백성이 이만큼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도 새벽마다 밤마다 울며 기도하는 기도의 종들이 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골짝 저 언덕에서 날마다 부르짖었던 믿음의 선진들의 눈물이 골짜기마다 흘러 넘쳤기에 오늘 내 백성이 이만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 지하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었습니까? 땅이 넓기 때문이었습니까? 백성이 지혜롭기 때문이었습니까? 우리의 도덕적인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었습니까?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까? 이 민족의 힘은 기도의 힘, 애통의 힘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질적인 저하를 가져온 이유가 있다면 구국의 기도는 사라지고 위복의 기도만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각산의 구국의 제단이 무너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골짜기마다 울부짖었던 믿음의 선진들의 눈물이 메말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민족이 살아나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나라를 위한 기도가 회복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구국의 기도가 살아나야 합니다.

정말 금년 한해는 우리교회가 중차대한 시간들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 또한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 심장에서 흘러야 합니다. 지난날 불충했던 과거를 통회하는 베드로의 눈물이 있어야 쓰임받는 제자가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는 희생이 있어야 사랑받는 성도가 됩니다. 자식의 영혼을 끌어안고 몸부림하는 가나안 여인의 기도가 있어야 가족을 구원합니다. 천국 계단은 눈물로 오르는 계단입니다.

V. 눈물이여 쌓여라!

언젠가 화요 목자모임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교회에서 한국교회 앞에 선포하는 교회의 비전을 나눈 강의를 목자들과 함께 비디오를 통해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한 설교를 다시 듣다말고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1) 그 비전이 너무 귀해서 울었습니다. 종아 너는 너무 약한데 주님이 네게 귀한 비전을 주었구나. 불신자를 구원해 주님의 심장 속에 있던 바로 그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기특한 생각을 어찌하게 되었느냐? 성령의 역사를 제한없이 받아들이겠다는 그 결정을 어찌 네가 하게 되었느냐?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2) 그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힘이 들어 울었습니다. 외로워서 울었습니다. 고독해서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그 비전과 함께 하시겠다 약속해 주셔서 또 새로운 힘이 솟아 올라 울었습니다. 나와 나의 비전을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시길래 그 약속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3) 내민족, 한국교회는 사명이 큰데 나라는 작고 힘이 없습니다. 일본과 중국은 날로 힘이 커져만 가고 저들의 패권주의는 그 옛날처럼 숨긴 발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 저 북쪽 공산국가, 가난한 백성을 끌어안고 가야합니다. 가슴이 아파 울었습니다.

4) 목사도 울고 목자들도 울고 우리는 함께 울었습니다. 내 몸도 울고 마음도 울고 영혼도 함께 울었습니다. 성령도 탄식하며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① 세상이 부러워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눈물이 터진 자는 복되도다.
② 억울해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탄식소리를 듣고 나를 보고 우는 눈물이 쏟아진 자는 복되도다.
③ 내 감정에 북받친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신령한 눈물이 흘러내리는 자는 복되도다.
④ 교회의 비전을 이루고 싶어 몸부림하는 눈물, 내가 더 크게 쓰임받고 싶어 몸부림하는 그 눈물이 이 교회 안에 한없이 쌓여가는 자는 복되도다.
⑤ 이 시대, 이 백성 나라와 민족을 살리려는 에스더, 느헤미야, 모세와 예수의 눈물이 심장에서 터진 자는 복되도다.

그때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내 교회가 살고, 한국교회가 살고 이 민족이 사는 그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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