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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석을 치라, 네 가슴을 치라! (출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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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을 치라, 네 가슴을 치라! (출 17:1~7)ㅅ

1. 2008년이라는 이정표에 서서

성도 여러분, 시간이란 것이 너무나도 빠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2008년도를 시작한 것이 정말 어제 일 같은데 벌써 거의 한 달이 흘러갔습니다. 새해 들면서 결심한 일들을 아직 시작조차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지난 주간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광야길로 인도하셨을까?”를 묻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적인 답은 따로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에게 ‘인생이 광야’라는 것을 일깨우시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인생이 광야길을 걷는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광야길 같은 험한 여정을 지나 2008도라는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지나온 길이 힘들었기 때문에 여기는 그래도 조금 안정된 자리일 줄 알았는데, 어떻든가요? 여전히 예측불허, 돌발 상황의 연속입니다. 거기다가 우리 앞에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거대한 바위가 떡 하고 버티고 서서 앞을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느 방향이 제대로 가는 길이며 빨리 가는 길인지, 아니 어디로 가면 조금이라도 장애물이 없는 지역일지 잘 알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아주 오래 된 가요 가운데 김상진 씨의 “이정표 없는 거리”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 가사 가운데 “이정표 없는 거리 헤매 도는 삼거리 길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세 갈래 길 삼거리에 비가 내린다.” 인생이라는 것이 광야와 같아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는 이정표가 없고,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갈래 길’에서 고민하는데, 비마저 내린다는 이 가요의 노랫말처럼, 인생 광야 한 가운데 있는 우리의 상황이 꼭 그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생광야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때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반석을 치라!

1) 광야길에서 반석을 만났을 때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를 지나 머물게 된 르비딤이라는 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조금 지났을 때였습니다. 출애굽 제2년, 그들이 이 르비딤에 오게 된 것은 자신들이 정한 목표를 가지고, 자신들의 의지대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앞서 가시면서 인도하셨기 때문에 르비딤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로 도착한 그 르비딤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었던 것이지요. 르비딤은 원래 물이 많았던 지역으로 여러 개의 샘과 개울이 있어 물이 넉넉한 곳이었는데, 하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했을 당시는 가뭄 등으로 샘과 개울이 말라 물이 고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물이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들은 “우리와 우리 자녀들과 우리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모세에게 따져들며 항의했습니다. 그들은 물이 없는 문제로 모세에게 항의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모세와 다투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절은 “시험했다”라고 말합니다(2). 우리에게는 사막과 사막 여행이 생소한 것이지만, 지난 1년의 세월을 사막에서 지내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사막에서 물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살수 없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 운운 하면서 모세에게 거칠게 항의를 하고 그와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평소 언어습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늘 “‧‧‧ 해서 죽겠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혹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절에 보면, 앞에는 홍해 바다이고, 뒤에는 자신들을 애굽으로 도로 끌고가려고 따라오는 애굽 군대 사이에 처했을 때, 그들은 모세를 향해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16장 3절에서 신 광야에서 먹는 양식 문제로 또 다시 “애굽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절에서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 죽게 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항상 죽을 것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데리고 나오신 길인데도 말입니다. 사는 길, 영원히 살 길, 또 앞으로의 인생을 보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길을 가면서 “죽겠다”는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물론 어쩌면 그들이 “죽겠다, 죽겠다”라고 한 것은 반대로 “살고 싶다, 좀 더 나은 조건에서 살고 싶다”는 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중요합니다. 늘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담고 살던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정말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자신의 말대로 된 것이죠.

아무튼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비록 물이 없다고 해도 자신들을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막막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보여야 할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기까지 오기 전, 애굽에서 열 가지의 기적을 경험했고,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광야에 접어들었을 때, 마라에서 쓴 물이 단물로 바뀌는 경험을 했고, 엘림에서 열두 개의 샘물과 종려나무숲도 경험했습니다. 또 먹을 양식이 없자,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 이슬과 메추라기 우박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물이 없는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어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test)하시고자 하신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충분한 경험을 했어도 삶의 어려움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믿음보다는 본성에 더 가까운 불신과 원망이 나오기 마련인가 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온갖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죽게 되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그러하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사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광야도 삶의 물이 항상 넉넉한 것만은 아니었고, 늘 편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안정은 고사하고 아무런 위험이 없거나 또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지금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것이 반, 혹은 그 이상은 힘들고 또 나머지는 어느 정도 편하고 안정된 것으로 짜여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은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삶의 샘물이 터지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어차피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문제들과 생각지도 뜻하지도 않았던 일들은 연속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 터져 흐르게 하시는 샘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사랑과 은혜와 복이 넘쳐흐르는 샘, 이 샘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광야길의 반석에 대해 하나님은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모세는 위기의 순간, 백성들이 자신을 불신하고 원망하며 싸우려 들 때에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5, 6절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데리고 호렙산으로 가서 거기 있는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반석은 말 그대로 딱딱한 암반입니다. 딱딱한 바위에서 물이 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백성들 가운데 젊은이들을 모아서 땅을 파라고 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지팡이를 손에 잡고 반석을 쳤습니다. 그렇게 그 반석을 쳤을 때에 지금까지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는 물이 솟아나와 그들은 흡족하게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때 모세가 쳐서 반석을 통해 흘러나온 물의 양을 가리켜 '강'이라고 표현했습니다(시105:41).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녀노소 백성들과 그 가축들이 충분히 마시고도 남을만한 물이라는 뜻도 되지만, 실제로 강을 이룰만큼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반석이 깨지면서 그렇게 많은 물이 나오다니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즉 물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불신하지 않고, 원망하거나, 딴 생각 품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험에서 낙방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의 샘이 터져 흡족히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하나님이 정말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앞에 여러분을 가리고 있는 그 거대한 장애물과도 같은 바위에서 은혜의 샘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는 반석은 어떤 것일까요? 인생에 막막한 문제가 있습니까?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직장 때문에 힘이 듭니까? 돈 때문에 힘이 듭니까? 건강이 문제입니까? 사람이 문제입니까? 오늘 본문은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풍성한 물을 줄 반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반석을 칠 지팡이는 무엇일까요? 사실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는 그가 목동 시절부터 손에 들고 다니던 것이었습니다. 지난 40여 년 간, 모세가 의지하고 사용했던 지팡이는 그냥 평범한 지팡이였습니다. 양을 치기 위하여, 양들을 인도하고, 양들을 공격하는 짐승들을 쫓아내는데 사용했으며, 자신의 몸을 의지하는데 사용하던 평범한 지팡이였고, 모세의 손때가 묻어있는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여러분의 손에 쥐어서 있으면서 반석을 내려칠 수 있는 지팡이 역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여러분의 손에 있는 지팡이는 약속의 말씀이고, 여러분이 늘 드리는 기도이고, 여러분이 입으로 흥얼거리는 찬송입니다. 또 여러분의 지팡이는 예배이고, 전도이고, 봉사입니다. 오늘 성경은 여러분에게 있는 바로 그것으로 여러분의 인생의 반석들을 내려치라고 말합니다. 즉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서 그것을 회피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그것을 향하여 더 많은 기도와 찬송과 봉사를 쏘아대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반석을 만나면 그냥 낙심하고, 돌아서려고 하고, 좌절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향해 맞서십시오! 언젠가 실험하는 것을 보니까 계란을 던져 바위가 깨어지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하물며 찬양, 기도, 예배 등으로 여러분의 삶을 반석들을 향해 던지고 또 던질 때, 그것들이 안 깨어질 리 있겠습니까? 올해는 반드시 여러분의 지팡이로 반석을 깨트려 거기서 은혜의 강물이 터져 흐르는 것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의 가슴을 치십시오!

이어령 교수의 강의에서 프랑스 시인인 보들레르의 시에 관한 것을 들었습니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Baudelaire, Charles-Pierre, 1821.4.9~1867.8.31)는 1800년대 중반을 살았던 천재적인 시인입니다. 그의 시 가운데 <스스로를 벌하는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나는 그대를 칠 것이다.
아무 증거도 없이 너를 내려칠 것이다
모세처럼
그래서 흐르는 너의 눈물로
내 가슴의 사하라 사막을 적시려 하노라 ․․․․․․“

이 시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은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비평은 이러 했습니다. 이 시에서 보들레르가 “나는 그대를 칠 것이다”라고 할 때, “그대”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비롯한 건강한 여성들을 말하며, 그런 여성들을 향하여 보들레르는 “나는 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여성들, 특히 건강한 여성들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것의 표현이며, 나아가 이것은 여성 학대 내지는 새디즘의 과격한 표출이라고 했습니다. 즉 건강이 좋지 못하고 유약한 남성이었던 보들레르는 건강한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이 시를 통하여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령 교수는 “이 시야말로 보들레르의 영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보들레르는 자신의 메마른 시적인 감수성과 자신의 사막 같은 영성 때문에 깊이 고민을 했고, 그래서 찾은 방법이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그러한 자신을 적셔주어서 사하라 사막 같이 메마른 시심(詩心)과 영성(靈性)을 회복시켜 줄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어령 교수의 보들레르 강의를 인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우리네 삶은 광야길 일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그렇지만 그 광야길 같은 인생에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샘물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인생이 광야라는 것은 수시로 느끼면서도, 바로 거기 그 자리에 있는 샘물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보들레르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을 때려서라도 자신의 딱딱한 영성을 적셔야 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쳐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가슴입니다. 울어야 할 사람도 우리 자신입니다. 광야를 광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의 영성, 반석을 딱딱하고 굳어 있으며 우리의 길을 가로 막는 것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의 영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때로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는 우리의 심성,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지팡이로 쳐야 할 것은 우리의 가슴인 것입니다. 즉 광야길 같은 인생에서 만난 삶의 반석보다는 더 우선적으로 내려쳐야 할 것은 여러분의 가슴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그들 앞에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왔던 것처럼, 만약 오늘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슴을 친다면 바로 거기에서 생각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4. 삶의 반석을 믿음의 지팡이로 치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삶의 반석을 여러분이 들고 계시는 말씀, 기도, 찬양, 봉사라고 하는 지팡이로 적극적으로 내려칠 때에 바로 그 반석에서 강물이 터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암벽이나 절벽을 만나거든 거기서 샘물이 터질 것을 기대하고 그대로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먼저 내리쳐야 할 것은 광야 같은 인생길도,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반석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그것만 보고서 원망하고 불신하는 여러분의 가슴입니다. 그 불신의 가슴, 원망의 가슴을 말씀의 지팡이, 기도의 지팡이, 찬송의 지팡이, 전도의 지팡이, 봉사와 섬김의 지팡이로 내려쳐서 여러분의 가슴에서부터 은혜와 복된 샘이 터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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