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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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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2-33)

사이먼(Paul Simon)과 가펑클(Art Garfunkel)이 작사 작곡하여 부른 '거친 물결 위에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노래는 명실 공히 팝송의 명곡이며, 저의 개인적 애창곡 리스트에서는 비틀즈의 'Let It Be'와 1, 2위를 결정할 수 없는 베스트 쌍벽이기도 합니다.

  이 곡의 가사는 자기의 연인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 때 자기가 그 험한 세파 위에 놓인 다리가 되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평안히 건너가게 해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당신이 지치고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when you weary feeling small)" "당신의 눈가에 눈물이 고일 때(when tears are in your eyes)" "제가 그걸 모두 닦아 드리겠어요(I will dry them all), 저는 당신 편에 서 있어요(I am on your side)."라고 시작되면서, "인생이 험해지고 친구를 찾지 못하게 될 때(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거친 물결 위의 다리와 같이 나를 당신을 위해 바치겠어요(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라고, 계속해서 3절 끝까지 구구절절 감동 깊은 가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연히 이 노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곡으로 흔히 사용되는데, 정작 미국에서 9.11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는 이 곡이 너무나도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고 해서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오히려 한동안 이 곡을 틀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인생에 거센 풍파가 사정없이 몰아치고 더구나 그것을 홀로 외로이 당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렇게 내게 찾아와서 곁에 서 준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야말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의 그야말로 '거친 물결'에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 친히 찾아와 주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그들 곁에 서 주시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인생의 고난과 역경의 풍랑을 당하게 될 때에도 왜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지 그 이유들을 이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가 홀로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22절과 23절에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에 앞서 15절로 21절에 보면 저 유명한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 이후 예수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들이 엉뚱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줄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 15절에 보면 배부르게 먹고 난 무리들은 이제 이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평생 논밭 갈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터이니 얼마나 좋겠나 하는 계산을 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런 잘못된 '메시아 기대'에 혹 당신의 제자들이 시험을 받게 될 것을 예방하고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즉시 재촉하여" 빨리 떠나게 하시고 또한 그 무리들은 그런 정치적 운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흩어 "보내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셔서 "거기 혼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해가 저물도록 아니 한밤이 지나고 새벽에 제자들이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나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습관은 사복음서에서 너무나도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광야에서, 산에서, 다락방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새벽에, 저녁에, 철야로, 식사 시간에,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여러 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자주 열심히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어쩌면 좀 의아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만큼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한 분은 없지 않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니 정말 기도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다 통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인데도, 그런 예수님조차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이처럼 간절하고도 부지런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셨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고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또 그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조목조목 기도를 해 주셨던 분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에도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흥분하여 예수님을 세상 군주처럼 모시고자 하는 무리들의 시도들로 인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시험을 받지 않도록 "재촉하여" 그들을 먼저 보내신 주님께서 그들을 위한 기도 또한 빠뜨리실 리가 만무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날 밤 그 시각에 풍랑으로 인하여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시기 직전까지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어떤 교인의 어려운 형편을 기억하고 기도해 준다면 누구나 다 크게 위로를 받고 감사할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사정을 위하여 구역예배 시간이나 새벽기도회 때 함께 기도해 주는 것 또한 여러분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로 세월을 낭비하고 있을 때에 그 뿌리에 도끼를 갖다 대는 주인을 만류하시며 조금만 더 참아 주시기를 오늘도 우리 대신 간청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지 않고 다 보전되게 하기 위하여 오늘도 당신의 십자가 공로를 성부께 아뢰며 우리 죄 사해 주실 것을 대신 중보해 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를 받고 있는 성도가 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 아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늘도 보좌 우편에서 바로 곁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 직소(直訴)하면서 이처럼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고 계시는데 그 택함을 입은 양자(養子)가 구원에 실패할 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계시는 보좌 우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과 엄청난 거리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우리 주님의 기도가 이 간격을 완전히 '0'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한시도 끊이지 않고 우리를 위해 드려지고 있는 한, 저와 여러분은 그 어떤 경우에도 '홀로' 외롭게 있는 시간이나 장소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위하여 눈물짓고 기도하신" 그 주님께서 또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서도 항상 기도해 주심으로써 "오늘도 한결같이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 어떤 인생의 풍랑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가 위험을 당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와 안위해 주십니다.

  본문 24절부터 27절에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대로 배를 타고 이미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거슬리면서 세찬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밤 사경" 즉 오늘날 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탄 배로 찾아오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이 풍랑을 당하고 있던 동안 어쩌면 그 제자들에게서는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길로 우리를 보내어서 이렇게 고생하게 하셨나?"하는 불만과 원망의 말까지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들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항해는 예수님께서 제자더러 "가라"고 명하신 길, 즉 그들 마음대로 결정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당신께서 가도록 보내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망할 길로, 죽을 길로 보내실 리야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파도가 높고 바람이 세차다 하더라도 절대로 무엇이 잘못될 수는 없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그 위험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욱 가까이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밤 사경 새벽녘에, 즉 제자들이 밤새도록 풍랑과 싸우다 이제 지칠 대로 지쳐있을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이미 배가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있은" 후의 일이니 결코 물가의 얕은 곳을 걸어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로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에 전혀 상상조차 못할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이라"고 무서워한 것도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평생에 최고로 반가운 한 마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바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내니"라는 말은 "바로 나다." 즉 "나야 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사실 그전에도 예수님을 이미 셀 수도 없이 자주 만났습니다.
  맨 처음에 제자로 불러 주실 때부터 시작해서, 어떤 때는 전도여행 파송을 받고 돌아와서 다시 만나 뵙기도 했을 것이고 또 매일 밤마다 자고나서 다음날 아침이면 또 주님 얼굴을 새로 뵙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 예수님의 얼굴이 반가웠던 때가 그 전에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나야"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이때만큼 더 기뻤을 때가 있었겠습니까?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그들이 큰 고난을 겪던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 잘 알고 매일 만났던 예수님이었지만 그 같은 고난 중에 찾아와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안위해 주시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 제자들은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더욱 뜨겁고 가까운 주님과의 관계를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경의 물결은 자주 닥쳐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가고 있는데도 때로는 불의의 풍랑이 저와 여러분을 기습해 오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도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생길까?"하는 생각이, "나는 그래도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교회 충성하려고 노력도 많이 하고 있는데도 왜 내게 육신의 질병이 생기고 내 가정에는 문제가 끊이지 않고 내 사업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가?"하는 의문들이 우리에게도 자주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여러분은 절대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풍랑을 당하고 있는 여러분의 그 인생도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라고, 통과해 나가라고 보내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재수가 없어서, 운이 나빠서, 신수가 좋지 못해서 남달리 괴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라면 그 얼마나 암담한 노릇이겠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처럼 허무하고 절망적인 우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일생의 모든 출입은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고 목적이 분명하며 결과는 합력하여 선하게 되어 있는 가운데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주님께서 이끌고 가게 하시는 실로 완벽한 인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난해도 그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길이며 우리가 병들어도 그것도 주님께서 가게 하신 길이니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같은 인생의 풍랑을 통해 더욱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안할 때는 도무지 맛보려야 맛볼 수 없는 예수님과의 특별한 교제를 우리는 우리가 죽음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의 편안한 자리에 앉아서 설교 듣는 시간 동안에는 "안심하라"는 말씀이 뭐 그리 반갑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집안 일 다 평안하고 만사가 형통할 있을 때에는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이 무슨 감동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에게 진짜 모진 풍랑이 닥쳐올 때, 그리고 그 고난의 사투가 한밤을 지새우고 '밤 사경'에까지 지겹도록 이어질 때, 그래서 온 몸이 탈진하여 "아이고, 주님, 이젠 정말 더 못 살겠습니다."라는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바로 그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새롭게 듣게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왜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까?
  비록 우리가 인생의 풍랑 한 복판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가라고 보내신 길이기 때문에 결코 그 배가 뒤집어질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며 때가 될 때 반드시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저께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고 갈릴리의 험한 풍파 잔잔케 하셨던" 예수님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안심하나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해 주시는 음성을 들음으로써,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전보다 더욱 깊이, 완전히 새롭게, 그야말로 '맛보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28절 이하 31절에 기록하기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만일 주시어든"이라는 말은 '혹시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말 성경에 "만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하자면 'if'가 아니라 'since'라고 번역되는 것으로서, 즉 '당신이 바로 주님이시니'라는 의미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는 물 위를 걸어갈 도리가 없지만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즉 이 사건이 시작될 시점에는 베드로에게 분명히 남다른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곧 "오라"고 허락해 주셨으며, 그 말을 듣고 배에서 내린 베드로는 실제로 물 위를 걸어서 몇 발자국 나아가기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잠시 잘되어 가던 도중에 베드로는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 말씀만 계속 믿고 갔으면 끝까지 물 위를 걸었을 것인데 그 눈이 주님을 떠나서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순간 그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며 그 결과 "빠져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발이 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된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 저 살려 주십시오."라고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여기 이 '의심'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두 마음을 갖다'라는 뜻으로서, 예수님만 바라보던 마음이 바람과 물결을 보는 마음으로 대신 바뀌어 버린 것을 지적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그 믿음이 약하여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그냥 내버려 두시거나 조금이라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너 이 못난 놈, 물 좀 먹고 정신 차려라."고 좀 허우적거리게 한 후에 건지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구원을 요청하자마자 "즉시 손을 내밀어" 건져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이것은 네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다."라고 자상하고도 따끔하게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사복음서에서 이 외에도 자주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동안 이들은 온갖 약한 믿음, 실족하는 믿음, 의심하는 믿음들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거나 방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 믿겠습니다."라고 당돌하게 요구하는 빌립에게는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는, 친히 성경 개인 교습을 통하여 메시아가 어떻게 고난당해야 한다고 예언되어 있었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깨닫고 믿게 해 주셨습니다.
  "만져 봐야 알겠다."는 도마에게는, "정 그렇다면 네 손가락 가지고 직접 다 만져 보고 제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당신의 못 자국 창 자국을 내 보이시기까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믿음이라는 것도 결코 하루아침에 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삼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할 신앙으로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약한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거덜나고 말 믿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모습이 또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도 나름대로 믿음의 체험이 있기에 지금까지 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나름대로 말씀에 은혜도 받아보고 회개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사명의 각오도 다지고 하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 얼마나 자주 '두 마음'이 들었습니까?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그래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었던데 갑자기 내 바쁜 인생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만 시험에 빠져 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출발할 때에는 물 위로도 당당히 걸어갈 용기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 쪼들리는 생활에만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기면서 그대로 불충에 빠진 적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예배 시간에는 이제부터는 교회중심으로 제대로 신앙생활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가도 교회당 문 밖으로만 나가면 당장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신경이 쓰이고 이 불신사회가 주는 위협에 압도당해서 순식간에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때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눈이 예수님을 떠나버린 순간들이 비일비재한데도 신기하게도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아직까지 파선은 하지 않고 견디어 오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 아니겠습니까?
  이게 어떻게 우리의 노력 때문이며 우리의 공로 덕분일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이것은 오로지 '성부께서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전하시는' 성자의 사랑의 힘 때문일 뿐인 것입니다.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셨던" 그 예수님께서 오늘도 "사랑하는 그의 제자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 주시면서" 이 약하고 못한 저와 여러분의 '상한 갈대' 같은 믿음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 같은 믿음도 불어 버리지 않으시고 끝내 재기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을 꼭 확신하고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처럼 제자들을 찾아와 주심으로써 이 사건은 너무나도 멋진 유종지미를 거두게 됩니다.
  본문 32절과 33절에 그 사실을 기록하기를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 어떤 풍랑도 '예수님께서 함께 오르신 배' 앞에서는 당장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처럼 고난 중에 주님을 만나게 된 제자들은 그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성자 하나님'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분이십니다.
  2천 년 전에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시며, 그들을 안위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일깨워 주시던 그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곁에 항상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과 동행하는 믿음 있는 성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풍파 속에서도 오히려 최고의 평안과 안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것'을 그리는 미술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회에는 정말 평화롭게 보이는 장면들이 그려진 갖가지 그림들이 응모되었습니다.
  양떼가 노니는 전원이라든지 잔잔한 바다 위에 미끄러져 가는 듯한 돛배의 그림, 혹은 엄마 품에 안겨 잠자는 아기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 등이 그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일등을 차지한 그림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닷가 낭떠러지 절벽의 한 틈바구니에 있는 보금자리 안에서 어미 갈매기 품에 안겨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새끼 갈매기들을 그린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때때로 풍랑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맛보는 평화로움은 더욱 더 달콤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 평화와 안식은 오로지 예수님을 알고 그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성도가 타고 가는 인생의 배는 결코 뒤집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찾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신자에게는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같지도 못한 믿음을, 우리 스스로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약한 믿음을,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붙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고 계신 한에는, 그 택자에게 결코 실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친 물결 위에 다리가 되어"라는 그 노래의 3절에 보면 "당신이 친구가 필요하다면 바로 뒤에 내가 있어요(If you need a friend, I am sailing right behind)."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험한 세파를 헤치고 나가는 자기 연인이 어려움에 빠지면 즉시 도와 줄 수 있도록 항상 바로 그 뒤를 바짝 따라가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예수님이야말로 중보기도로, 위로의 말씀으로, 또한 즉시 붙잡아 주시는 손으로써 늘 우리 곁에 바짝 붙어서 동행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며 도와주시는 이 주님만을 계속 바라보고 의지함으로써, 영육 간의 모든 시험의 풍랑을 넉넉히 이기고 저편에 있는 영광의 포구까지 안전히 도달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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