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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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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 (마 5:1~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새해인사를 나누며 복을 빌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도 복을 빌고 복을 받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물질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의 복, 재물의 복, 인간관계의 복도 주시고 인생을 사는데 필요한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축복문이 많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로 민수기에 축복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수기 6:24-27)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은혜, 평강과 같은 소중한 축복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비추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막 울던 어린아이를 어떻게 하면 달랠 수 있을까요? 맛있는 것을 가져다주고 안아주면 될까요? 울던 아이에게 엄마의 얼굴이 나타나면 아이는 울음을 그칩니다. 왜냐하면 엄마에게 모든 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예수님의 얼굴을 접할 때 그 안에 모든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신명기의 축복 말씀에서 우리가 받을 복을 셀 수 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신명기 28:3-8)

여기 많이 나오는 단어는‘복, 너, 네’라는 단어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있는 자리에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곳에 복을 주시고 소유하는 것을 풍성하게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만지는 것에 복을 더해 주시고, 대적자들이 나타나서 한 길로 쳐들어와도 다 내쫒아 버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조상들도 복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복에 대해서 참으로 관심이 많았는데 특별히 오복을 귀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동양 유학(儒學)의 경전인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편에 오복(五福)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 첫 번째 복은 장수(長壽)의 복입니다. 우리는 오래 사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른들에게‘백수 하십시오.’가 아니라 ‘백이십 수 하십시오.’라고 인사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복은 부(富)로 물질이 넉넉해서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강녕(康寧)의 복으로 우환 없이 건강하고 편안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유호덕(攸好德)의 복으로 덕을 좋아하며 즐겨 행하는 복입니다. 다섯 번째는 고종명(考終命)의 복으로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 곧 천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복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굉장한 중요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복을 묵상하면서 본문말씀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추구하는 복과 상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복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복을 선포하셨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과 달리 예수님의 삶은 오복과 상충되는 삶을 사셨던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장수하지 못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서른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부유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9:58)

성경은 예수님의 삶이 풍성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풍성하게 대접하지 못했음을 가르쳐줍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건강의 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우리의 죄와 질병을 몸에 지니고 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사야 53:4)

네 번째, 예수님은 단순히 덕을 좋아하는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덕을 좋아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목표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었기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다섯 번째, 예수님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으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비명에 돌아가셨고,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복의 근원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보여주시는 축복이 왜 우리에게 다가올까요? 그분은 이런 복을 받지 못하고 인생을 사셨는데 예수님은 세상의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복을 보여주시기 위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세상의 복을 받지 못하고 이렇게 사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넘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한 복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복을 보여주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복이 아니라 영원한 복, 궁극적인 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8:9)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과 존귀와 풍요를 버리시고 이 땅에서 가난하게 되셨는데 그 이유는 그분의 가난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이 낮아짐으로 우리를 높여주셨고, 그분이 고통을 받음으로 우리가 생명의 치유를 얻었다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예수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명백하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산에 올라가십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큰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로 사랑하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산상설교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산상설교 중 첫 번째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팔복 말씀입니다. 그리고 팔복말씀 중에도 가장 먼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이때 우리는 복이라는 말 때문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타나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당혹합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 이것은 우리 삶의 가진 것을 다 털어버리라는 뜻인가? 빈궁으로 가라는 뜻인가? 우리가 소유를 즐기면 안 된다는 뜻인가?’
세상은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가 아니라 경쟁 속에서 이긴 사람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한다고 말하기에 우리는 산상설교를 읽을 때마다 당혹하게 됩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성경은 때로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 당혹스럽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오해를 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진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먼저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이 자발적인 가난을 요청하셨다, 빈궁의 길이 곧 하나님 나라의 길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이해합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가난은 특별한 경우,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축복해주신 모습입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들이 자발적인 가난의 형태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가난을 예찬하거나 빈궁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결코 복이 아닌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부와 재물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자는 복 받은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난은 복이 아닌데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부는 복인데 부자는 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새로운 것을 경험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결코 가난과 빈궁을 예찬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심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 없는 모습, 용기가 부족한 모습,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 싫어하는 모습, 움츠려드는 모습, 수줍어하는 모습, 특성을 보여주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갈등하지 않고 순둥이처럼 사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좋은 게 좋은 거지.’하는 식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려 살아가는 것은 결코 기독교인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은 명백한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삶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넓혀가는 것입니다. 지경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영역들을 넓혀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삶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를 자꾸만 움츠려드는 기독인의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세 번째, 육신을 괴롭히고 금욕을 통해 자기를 절제하며 몸을 학대하는 것을 주장하는 말씀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잔치와 축제를 좋아하셨고, 먹고 마시는 것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함께 기쁨으로 먹고 감사했습니다. 기독교는 본래 감사하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서로 사랑하는 축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하나님께 인생의 길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마음이 가난해지는 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역사를 이런 순환논법으로 설명합니다. “평화는 번영을 낳고, 번영을 오만을 낳고, 오만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전쟁과 다툼을 낳고, 전쟁과 다툼은 가난을 낳는다.”
어떻게 보면 이 안에 인류 역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평화로 인해 번영합니다. 그런데 번영하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권력과 명예가 있다고 자랑하며 오만하게 됩니다. 그때 서로가 편견 속에서 갈라지고 그 속에서 전쟁이 나고 다시 가난해집니다. 이 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며 다시 평안을 찾는 악순환이 지속됩니다.
그런데 역사의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평화로 번영해야 합니다. 그때 오만으로 가지 않는 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부자가 되어도 교만해지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권력을 가져도 오만해지지 않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학식이 많아도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돈이 없다고 비겁해지지 않는 사람,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다고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해 진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이 나를 보시기 때문에 많거나 적어도 하나님을 향해서 나갈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제의 성공에 교만하지 않는 사람, 어제의 신앙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 초심을 가진 사람, 빈 마음을 가진 사람,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미래가 더 큰 것이라며 앞을 향해서 나갈 줄 아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쳐 놓은 울타리와 고정관념을 부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생의 길을 열어놓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교회까지 와서 누구의 아파트가 크고 누구의 아파트가 작은 것 때문에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지고, 입은 옷의 브랜드가 뭔가를 살피고, 출신학교와 출신지역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믿음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앞과 뒤가 막혔을 때, 좌우가 다 막혔을 때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 주님만으로 기쁨을 삼으려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고, 예수님께 더 드리고 싶은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할 때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없어야 합니다. 찌꺼기와 응어리진 것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정문제를 해결해주세요, 진로문제를 해결해주세요, 인간관계를 해결해주세요, 사업문제를 해결해주세요’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보물 같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의 복, 물질적인 복, 사업의 복,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복을 넘치도록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복 받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을 받아야 하나님이 너를 다스릴 수가 있다. 그래야 하나님이 너에게 가까이 올 수가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건강의 복, 사업의 복, 인간관계의 복, 물질의 복을 더해 줄 것이다.”
올 한해를 시작하며 가슴속에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해주세요. 빈 마음,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게 해주세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넘치도록 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막힌 담을 만들고 나서 하나님이 복주시지 않는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는 것들이 없게 하옵소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받게 하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감사함으로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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