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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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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의 복 (마 5:1~4)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의 슬픈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쁨을 경험할 때도 있고 슬픔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즐거울 때도 있고 가슴 아픈 사건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25살 난 아들이 등산을 갔다가 실족해서 사망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슬픈 마음을 담백하지만 냉혹하고 지독한 아픔을 품으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앞으로는 절대로 아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아이는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한다. 함께 밥을 먹을 수도 함께 여행할 수도 없다. 함께 큰소리로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다. 학교 다녀오겠다며 제 엄마와 나를 껴안아주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남은 생을 그 아이 없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죽기 전에는 그 아이의 죽음의 고통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의 실족, 그리고 영원히 계속되는 절대 부재, 네가 없는 슬픔이 내 가슴을 마구 찢는구나.”

옛말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뒷산 선산에 묻고, 사랑하는 자녀가 먼저 죽으면 평생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이런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이 아픔을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또 사랑의 기쁨을 나누던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한 남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총각으로 있다가 60세가 되어 처음 사랑을 하고 아내를 3년 6개월 만에 암으로 잃은 신앙인으로 마음의 아픔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거의 언제나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마치 하늘과 같아서 나의 모든 것들을 뒤덮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나는 또다시 훌쩍이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오늘 밤에는 철부지 슬픔이 지옥처럼 다시 입을 벌린다. 실성한 말들, 비탄에 젖은 후회, 위장의 울렁거림, 악몽 같은 현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아내를 데리고 간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항의합니다. “내가 풍요롭고 행복할 때는 당당하게 나타나시던 분이 왜 곤경에 빠져있을 때에는 침묵하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은 생체해부자, 가학성 변태자, 짓궂은 저능아입니다. 아무리 잔인한 사람도 뇌물을 받거나 하면 일시적으로나마 자비를 베풀며, 때로는 자신의 잔악한 행동에 지쳐서 잠깐 누그러지기도 하건만 왜 하나님 당신은 아무리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까?”

욥과 예레미야는 마음에 지독한 슬픔을 품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만날 때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내 살과 부딪친 사람, 서로 삶을 나눈 사람이 갑자기 떠나면 잠깐의 아픔이나 슬픔이 아니라 가슴을 후벼대는 애통함을 경험하고 고통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슬픔과 아픔을 겪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슬픔을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누구도 이 지독하고 냉혹한 아픔에 동참하거나 대신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이런 아픔을 겪은 성경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 가장 큰 아픔을 겪은 사람, 슬픔의 사람, 눈물의 사람, 애통의 사람은 구약에 나오는 욥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가졌으나 한 순간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과 소유물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그것만으로는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들어온 소식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비고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태어난 생일을 저주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한 것이 저주가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이 자신을 저주해서 아픔 속에서 고통당하는 슬픔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찾아와서 남편을 만든 하나님을 저주했고 그에게 나가 죽으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눈물과 애통을 가진 욥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고통을 넘어 자신을 지켜보던 하나님의은혜를 다시 깨닫습니다.

또한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도 있습니다. 그는 욥처럼 개인적인 고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민족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자기 민족은 축복받은 민족,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하는 백성으로 선포하고 싶은데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왔습니다. “이 백성은 죄악의 백성이다. 내가 이 백성을 심판하겠다. 이 백성은 저주받았다. 이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서 슬피 울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런 선포를 하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자기 민족을 향해서 저주를 퍼붓는 자신의 모습이 한탄스러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흘러 내입의 음식이 되었다. 내 머리통이 눈물 창고가 되어서 내 눈에 눈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는 자기의 비통함과 애통함을 고백하면서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아픔을 애통해 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 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사야 53:4)

예수님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보면서 통곡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마태복음 23:37)

그는 하나님의 백성인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 흘리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3년 동안 공생애를 하시면서 어떻게 사셨을지 묵상해 봅니다.‘예수님은 3년 동안 웃으면서 사셨을까? 아니면 울면서 사셨을까? 예수님은 미소 지으면서 사셨을까? 아니면 울상으로 사셨을까?’

성경에는‘예수님이 미소 지었다, 웃었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정말 웃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평상시 예수님은 늘 미소와 웃음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얼굴 표정이 밝았고 친밀감이 있었으며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사랑의 모습이 그의 얼굴 속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누가복음 10:21)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고 이야기하셨을 때 밝은 모습으로 아이를 안고 그들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기쁜 마음과 친밀한 모습으로 환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만지실 때도 친절한 마음으로 손을 붙잡고 세워주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은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고침받기 원했을 때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님 뒤에 서서 옷자락만 만지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돌아서서 따뜻하고 친밀한 눈길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여인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는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와 따뜻한 사랑의 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애통함은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에는 예수님이 미소 지었다는 말씀이 없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애통했다는 말씀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울음 속에 우리의 울음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애통 속에 우리의 애통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통곡 속에 우리의 통곡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통곡은 우리의 통곡을 기쁨으로 바꿔주십니다.
예수님의 통곡은 우리의 애통을 기쁨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삶의 기쁨과 즐거움보다 외로움과 절망감을 강조하며 우울함과 애통함과 자기 연민을 즐기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 평안을 주는 종교, 찬양하는 종교입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희열을 만끽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편 30:5)
“여호와는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편 147:3)

하나님께서는 기쁨과 축복, 은총과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까요? 정말로 애통하면 복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역겨워지기도 합니다. 결코 인생을 애통해 하면서 우울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자만이 참된 사명을 가슴에 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첫 번째 복은 내 자신과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내 몸을 꼬집으면 ‘아야!’하고 소리를 내며 고통을 표현합니다. 이처럼 육체가 건강함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왜 문둥병이 위험하고 무서운 병입니까? 누군가 꼬집어도 아픈 줄 모르고 뜨거운 물에 손가락을 집어넣어도 뜨거운 줄 모르며 깨진 유리병과 날카로운 칼날을 붙잡아 손이 비는데도 모를 정도로 육체가 썩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육체가 건강하지 않고 고통의 지각이 마비가 된 것입니다. 육체에 치명상을 입어 고통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할 때 마취 주사를 놓고 하루가 지나도 깨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주사를 잘못 놓은 것입니다. 몸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일주일이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면 몸은 건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고통을 아는 것은 육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육체가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위에 있는 기쁨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을 때 도망가지 말고 부딪치십시오. 고통에 부딪칠 때 스트레스를 뛰어 넘어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인 세계 속에 애통함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인 피폐자이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정신적인 애통이 있어야 부딪치는 문제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심과 걱정에 부딪쳐 그것을 넘어가는 참된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 악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거짓을 행하면 거짓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이 진리로 바뀌고 불의가 정의로 바뀝니다.

우리 속에 정신적인 애통이 없어서 계속 미숙아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정신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났거나 만나지 않아도 영적으로 애통하지 않으면 영혼에 병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양하지 않아도 영혼의 갈급함이 없으면 영혼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생이라면 영혼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애통해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속에 자녀 된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애통함 속에 자기 변화가 있습니다.
애통함 속에 자기 성숙이 있습니다.
애통함 속에 자기 갱신이 있습니다.

영적인 애통은 우리 삶의 축복입니다.
육체적인 애통을 느끼는 것은 축복입니다.
정신적인 애통함을 느끼는 것은 축복입니다.
영적인 애통을 느끼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만을 좋아하면 영적으로 빈곤한 상태가 되기에 애통을 느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삶의 고통과 어려움이 다가올 때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다고 비겁하게 비껴서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 진정한 감사, 진정한 찬양, 진정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두 번째 축복은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매어지도록 애통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자녀를 생각하면 기도할 수밖에 없고, 자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고, 자녀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맡기면서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애통함 때문에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길을 가다가도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애통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교회를 생각하면 애통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마음속에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바로 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교회를 향해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보면서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교회가 부정과 부패로 가득 차  있으면 안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는데’라고 애통해하면서 95개조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애통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람이 변하고 공동체가 바뀌어 그 안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들어갑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할 때마다 애통함이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 민족이 축복을 받을까? 어떻게 공의와 정의가 세워질까? 어떻게 생명과 풍요가 이 땅에 나타날까?’이처럼 애통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시며 충성심과 헌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애통해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사명을 받는 사람입니다. 마음속에 애통해하는 자리가 우리가 일할 자리입니다. 애통해 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애통해 한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애통함 속에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공동체는 죽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애통함이 없는 문화와 문명은 이 땅 위에서 해체될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나라가 살아납니다. 불의와 악을 보고 애통하면 그 땅에 공의와 정의가 생겨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일터에서 쫓겨나 거리를 해매는 이를 보고 애통해할 때 기업이 성장하고 풍요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홀로 사는 노인, 부모 잃은 어린 아이를 보면서 애통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복지와 섬김과 나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애통함이란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생명을 걸 때 애통함이 생겨집니다. 받은 상처가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애통함이 있습니까?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눈물 흘려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습니다. 애통했던 사람만이 애통의 현실 속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애통해하는 곳에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을 보면서 애통하셨기에 아들을 이 땅 위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보면서 가슴으로 애통해 하셨습니다. 죄악에 얽매인 사람들을 애통해 하면서 용서해주셨습니다. 질병 때문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지면서 고치셨습니다. 사탄의 억압 속에 있던 사람들을 애통해 하면서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물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면서 모든 애통하는 자들에게 쉼과 새로운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자녀들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가르쳐주십시오. 애통할 줄 모르면서 자라는 자녀들은 거만해지고 남의 아픔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 있어 보지 못한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애통할 줄 모르는 민족과 사회는 바뀔 수가 없습니다. 애통해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애통해 하시는 마음으로 사랑해 주셔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섰습니다. 평생 동안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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