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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 (요 13: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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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 (요 13:21-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영국에서 「유다의 얼굴」이라는 연극이 상연된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누가 가룟유다의 배역을 맡을 것인가? 하며 많은 배우들을 찾아다니며 가룟유다 배역을 찾는 얘기인데, 이 극의 마지막이 인상깊다고 합니다.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나와서 크게 한 목소리로 외치면서 막이 내려진답니다. “당신도 가룟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룟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룟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관객이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그러나 정말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룟유다가 될 수 있을까요? 가룟유다처럼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가룟유다처럼 마귀에게 너무나 잘 속는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귀에 속삭이는 자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역사하는 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는 어느 날 갑자기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 버려.’ 하는 생각을 넣어주었다고 했습니다. 가룟유다는 그 생각이 마귀가 넣어 준 생각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예수를 팔아버릴까? 팔면 누구에게, 또 얼마나 받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룟유다가 그런 생각을 당연히 받았겠습니까? 자기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처음에는 당황했겠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드니까 나중에는 그 생각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마귀가 그 생각을 넣어 주었음을 알았다면 품었겠습니까? 그러나 “단지 생각 뿐인 것” 같았지만 마귀가 넣어준 생각을 품는 것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27절에 보니 마귀가 가룟유다에게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유다는 자기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은 30에 팔게 되고 정신이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서야 자기가 예수를 은 30에 팔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물리려고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자결을 하고 맙니다. 마귀에게 조종 당하다가 결국 파멸 당하는 아주 전형적인 예를 가룟유다를 통해서 우리가 봅니다. 마귀는 가룟유다 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역사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마귀가 다가왔을 때도 그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2) 고 물으면서 다가갔습니다. “아니야, 다른 실과는 다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를 나무 열매는 따먹지 말라고 하셨어.” “너 정말 바보구나. 하나님이 네가 그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을 알고 먹지 말라고 그런 거야. 먹어. 참 좋아.” 마귀는 마치 아주 친한 친구처럼 속삭여오는 존재로 하와에게 다가왔습니다. 이 생각이 하나님이 주는 생각인지 마귀가 주는 생각인지 분별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뱀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마귀라는 것을 정식으로 소개하고 하와에게 다가왔다면 하와가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마귀가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마태복음 4장1-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시고 마귀에게 세 번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마귀가 예수님에게 속삭입니다. “배고프지? 너는 능력이 있잖아?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기적을 보여줘.” “나에게 절하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줄께.”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마귀의 공격이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역사합니다. 여러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별의 별 악한 생각과 미혹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줍니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만큼 끔찍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죽고 싶은 생각! 죽이고 싶은 생각! 슬픈 생각 자기 연민, 우울증, 집 나가고 싶은 생각! 온갖 음란한 생각!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누가 알까봐 두려울 정도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그렇게 당황스러울만큼. 지금 예배드리시는 이 시간에도 그런 생각에 시달리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려두면 큰 일 납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면 무서운 결과가 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으로 보시며 우리를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아무리 잘 차려입고 오셨을지라도 중심으로 판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삼상 16:7)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실까요? 생각과 행동은 단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동은 그 전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잠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마귀가 넣어 주는 생각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잘 보시면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인지 마귀가 주는 생각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육체의 생각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술취함과 방탕함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 자신을 파괴시키려는 마귀의 공격입니다. 여러분, 음란과 방탕에 이끌리는 생각이 떠오른 적이 없었습니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거나 유혹을 받으면 마귀의 역사임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마귀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여러분을 이렇게 유혹한다면 분명히 거절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속삭일 때 맥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둘째는 우상숭배와 술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려는 마귀의 공격입니다.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하나님은 믿지 못하면서 귀신에 대하여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게 마음을 엽니다. 현재 점 집은 번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을 보거나 부적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 혹시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에 관심을 가져 본 적 없습니까? ‘재미로 보는 건데 어때.’ 이제는 그 생각의 실체를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분별을 하지 못해서 너무나 쉽게 접근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두 번 째 부류는 여러분이 어지간히 믿음만 생기면 금방 분별이 됩니다. 그런데 세 번 째는 성도 중에 분별하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셋째는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투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입니다.
이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를 깨뜨리려는 마귀의 공격입니다. 마귀가 은혜받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가장 교활한 방법이 다투고 분리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분 중에, 교회 안에 중직이 이것이 아직 분별이 안되시는 분이 많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또는 가족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 서로 화를 내는 것이 마귀 역사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장 취약한 성격이 화를 잘 낸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쉽게 화를 냅니다.

여러분, 요즘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옳다고 여기는 문제로 자꾸 싸우지는 않습니까? 다 잘해 보자고 하다가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사람, 미운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눈이 뜨이지는 않습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내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면 계속 화가 납니다. 그것은 가룟유다처럼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 되자고 싸우는 법이 없습니다. 옳은 것은 좋은데, 영적 근원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내고 싸우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부 싸움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가정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너무 답답하니까 싸우지만, 싸웠다는 것 자체가 마귀에게 속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싸우지 마십시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지금 현재 여러분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가 가족이거나 형제거나 또는 교우들이거나 미혹받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내가 같은 믿음의 형제나 가족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역사한다는 것을 모르니까 그런 것입니다. 마음에 미워하게 하고 한을 품게 하고 용서하지 않게 하고 싸우게 하는 것을 모르니까 다 잘해 보자는 뜻으로 다 옳고 그른 것을 잘 가리자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요. 알고 나면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마귀가 그렇게 부추기는 것을 알고는 누가 그렇게 따라하겠어요? 성경을 보면 구원을 받고도 싸우는 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싸우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라는 증거입니다.

(고전 3:1-3) “형제들아 내가 ... 너희에게 ...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제까지는 몰라서 그랬다면, 이제부터라도 싸운 다음에는 어린이부 예배에 가기로 합시다! 어린이부 예배로 인도해도 화내지 않기로 약속합시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항의하지 않겠나? 하는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어린이들이 어른 예배드리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분별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바로 잡는 일을 꼭 싸우고 안해도 됩니다. 싸우면 일이 더 안됩니다. 싸우지 않고 성령이 역사하심 가운데 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요 하나님 역사입니다.

고전도전서 6장1-9절에 보면 싸울 것이면 차라리 손해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전 6:1-9)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여러분, 싸워서 이긴들 무엇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가 된 것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울 일이 생기면 차라리 손해를 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만의 영으로 역사하여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교만의 함정이 무섭습니다. 자기 뜻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면 무서울 정도입니다. 누구도 그를 가르칠 수 없게 됩니다. 
교만이 얼마나 무서우냐 하면 “구원의 확신을 받으라.” 하면서 교회를 깨뜨립니다.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라고 광고를 대대적으로 붙이는 구원파 이단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자는 것 가지고 한국 교회를 무섭게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성령 받으라 방언을 하라.” 하면서 교회를 깨뜨립니다. “전도해야 한다.” 하면서 교회를 깨뜨립니다. “선교하자.” 하면서 교회를 깨뜨립니다. 왜냐하면 말은 옳은데, 태도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마음 힘들게 하게 하고 시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겸손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교만은 교회를 깨뜨립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마귀가 주는 생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조나단에드워드 목사님이 쓰신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책 중에 겸손함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겸손에도 진정한 겸손과 거짓 겸손이 있는데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면 겸손한 행동을 하고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짓 겸손한 사람이고,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어떤 왕이 신하의 발을 씻겼다면 그는 자신이 대단한 겸손한 행위를 하였다고, 신하들에게 본을 보였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왕의 발을 씻겼다면 그는 전혀 자신이 겸손한 행위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당연히 그리하여야 할 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종이 자기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왕의 발을 씻겼다고 자랑하고 떠들고 다닌다면 사람들이 웃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 주님의 종입니다. 정말 주의 종인지 아닌지는 그가 종 취급을 받아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종 취급을 받아서 기분 나쁘면 종이 아닙니다. 종 취급을 받을 때 ‘당연하지, 내가 종인 걸.’ 그러면 이 사람은 정말 종인 것입니다. 여러분, 영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역사하시고 마귀도 여러분에게 역사하는데 똑같이 여러분 생각 속에 지배해 들어옵니다.

마귀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생각의 영적 뿌리를 정확히 분별하여야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이 주님이 주시는 것일까 마귀가 주는 것일까?’ 분별이 되고 나면 그때는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품으렴 예수님께서 반응을 하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었다면 내 마음 속에 성령의 근심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라면 악한 생각이 들어올 때 깨닫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도의 마음에 마귀의 생각이 있으면 성령의 근심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과 27절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에게 마음의 생각을 버릴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10절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가룟유다의 마음을 찔러 주었습니다. 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내 떡을 받아먹을 자가 나에게 발꿈치를 들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은 안하십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알아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깨닫고 돌이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를 안하니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게 누구인가?” 하고 제자들이 동요했지만 가룟유다는 끝내 그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있는 생각을 마귀가 주는 것인데 자기가 붙잡으면 주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으십니다. 어떤 생각을 붙잡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무슨 생각을 붙드느냐 하는 것은.

결국 사탄이 가룟유다에게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27절에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룟유다를 향한 말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간 마귀를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악한 생각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어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것이 성령의 근심인지 모릅니다. 그저 자기 마음의 갈등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하여 주님은 나만 알아들을 있도록 나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돌이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사랑인지 모릅니다. “목사님 나 들으라고 말씀하셨죠?” 이렇게 말하는 순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고 맙니다. 무엇인가 깨달아졌다면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말고 성경 말씀으로 확인하고 마귀의 생각에 대하여는 대적해야 합니다.


저는 마귀의 생각에 대적하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악한 생각으로 시달리면서도 그것이 마귀가 역사하는 것인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모범생이고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이중적인 위선자처럼 살았습니다. 온갖 더러운 생각, 악한 생각, 음란한 생각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이니까 누가 알겠어요!’ 그저 부끄러워 했고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실제로 해볼 수 없는 온갖 것들을 생각으로만 해보는 것이 큰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몰래 하는 상상 속에 무서운 영적 역사가 일어나는 줄 몰랐습니다.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 고통과 좌절, 자신에 대한 절망감, 영적 침체에 빠져들었습니다. 설교를 해도 기도를 해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중심을 아실텐데.’ 하는 생각으로 좌절했습니다. 그래서 목사직을 그만 두려고까지 했습니다. 그게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무슨 목사를 하느냐? 사람들 보는 눈 앞에서만 거룩하고 깨끗한 목사이면 무엇하느냐?’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인 줄 몰랐으니까 계속 무너지고 또 무너지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저를 구원해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마귀가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주었다고 하는 말씀 속에 마귀가 우리에게 생각을 넣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주는 생각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그리고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날마다”의 위력을 아십니까?
성경은 의로운 롯이 소돔과 고모라로 이주해 간 다음 그 땅 사람들의 불법한 행실을 날마다 보고 들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아내와 딸 마저 소돔과 고모라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날마다 마귀가 우리에게 생각을 집어넣어주는 것이 무서운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삼손은 능력이 많은 사람으로 블레셋 사람을 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여인과 연애하게 됐는데 그 블레셋 여인이 날마다 그 능력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묻고 재촉하는 소리에 그의 마음이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영적 능력의 비밀을 말하게 되고 머리를 깍이고 두 눈이 빠진 채, 블레셋에 포로로 묶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마귀가 생각을 통해 역사하도록 내버려두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그 마귀가 하라는 대로 종노릇하는 무서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왜 성도들이 음란한 일에 빠지고 거짓말을 하고 싸울까요? 날마다 마귀가 그 생각으로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대적하지 않으면 떠나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건드리고 건드리고 또 건드립니다.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언제까지나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서 지낼 것입니까? 여러분 마음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제는 견고하게 말씀에 서야 합니다.

“날마다”의 능력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마귀가 가지고 성도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들이 날마다 말씀과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날마다 듣는 말씀은 상한 심령과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이 일을 결코 작게 여기면 안됩니다. 날마다 새벽에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날마다 말씀을 큐티하며서 묵상하는 일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이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세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면서 우리 안에 새 생각이 자리잡게 됩니다.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은 자기가 마귀와 싸워 이길 뿐 아니라,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사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감옥 생활에서 찬송 생활로]란 책으로 유명하신 멀린캐로더스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젊은 시절 모험과 스릴을 찾아 헤메다가 군에 입대하여서는 탈주병으로 감옥까지 갔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성령을 체험하고 회심하여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모든 일에] 적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고가 생겨도 기뻐하고, 병이 들어도 감사하고, 낭패를 겪어도 찬송하며 나아갔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네가 이래도 기뻐하겠느냐. 이래도 감사하겠느냐?’ 했지만, 캐로더스목사님은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을 지켜 나가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놀랍게 체험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귀에게 속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분별합시다. 뿌리가 어디입니까? 성령의 근심은 없습니까?
오늘 회개함으로 마귀의 궤계를 분별하여 마귀의 손에서 풀려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의 생각, 생명의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 전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가 주는 생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미 여러분 안에 그 생각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생각을 계속해서 주시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하십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시는 주님이 여러분의 인생도 주장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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