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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를 위해 태어난 사람 (엡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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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위해 태어난 사람 (엡 1:3~7)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두말 할 나위 없이 ‘예배’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게 예배입니다. 그리고 천국 갈 때까지, 더 나아가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할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교회에서 하는 모든 활동 중에 한 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택해야 합니까? 예배입니다. 교회에서 교육, 전도, 봉사, 선교, 교제 등 모든 게 다 중요하죠. 그러나 예배는 중요하다기보다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크리스천은 예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이런 사실은 성경 전체가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혹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은 잘 몰라서, 또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타성에 젖어서 예배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면 큰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드리나 마나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살아있는 예배’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예배의 본질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를 반성하고 회복함으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1] 인생의 제1목적 : 예배

성경을 보면 곳곳에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에 강조를 거듭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배는 인생의 목적이란 사실입니다.

① 창조의 목적 :

우주의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곧 그것들의 존재 목적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목적도,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다름 아닌 ‘예배’입니다.

시19:1 보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았음을 증거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러므로 만물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게 마땅합니다. 시66:4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정말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보면서 그저 그런가 보다, 기껏해야 “야~ 멋있다!” 감탄사를 연발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영안이 열리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새롭게 보입니다. 자연의 모습 하나 하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봅니다. 말하자면 자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한 예술품으로 보입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도, 지저귀는 새소리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 믿고 하나님을 만난 후 처음 수학여행 갔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등반했는데, 그 전에도 여러 산을 등반한 경험이 있었지만 전혀 달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냥 좋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그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고, 마치 산의 구석구석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렇지만, 특히 우리 인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의 표현대로 신묘 막측합니다. 내 몸 하나만 들여다봐도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습니까? 인체의 신비는 정말 생각할수록 대단합니다.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창조 목적을 뭐라고 증거합니까? 사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은 각자 자기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거 아냐?”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고 예배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곧 인간의 존재 목적이요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십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인생의 창조 목적이 어디까지나 예배라는 사실입니다.


② 구원의 목적 :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연의 자리에서 떠나버렸습니다. 자기가 마치 하나님인 양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영광과 이기적인 목적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자로 창조하셨는데, 그 사명을 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을 참 예배자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의 목적 역시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절~5절. “3 하나님 ...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 삼으신 것은 원대한 계획 가운데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계획이 무엇입니까?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과 천국을 주시는 겁니다. 이게 곧 신령한 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신령한 복을 주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6절 봅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찬송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게 그 목적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창조 목적도 예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예배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장로교 교리 학습을 위해 문답식으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을 보면 제1문에 이런 질문과 답이 나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한 마디로 예배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착각을 합니다. “내가 먼저 즐겁고 행복하고 그래야 예배고 뭐고 하는 것이지, 내 코가 석자인데 한가하게 무슨 예배냐?”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인생이 불행해지고 비극의 악순환 속에서 헤매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죠. 여기 가전제품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면 제일 좋습니까? 주인도 좋고 가전제품도 고장 나지 않고 ... 그러려면 매뉴얼대로 사용하면 됩니다. 그 제품의 제작자가 작성해 놓은 매뉴얼대로 사용하면 오래 오래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면, 구원 목적대로 살면 저절로 행복해집니다. 평안과 기쁨이 흘러넘칩니다.

여러분, 혹시 갖가지 문제로 고심합니까? 스스로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그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저런 이유들을 댈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가 뭔지도 모르고, 예배의 자리에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형식적으로 죽은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부터 인생이 엉킨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예배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인생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예배 없이도 혹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 행복이 아니라, 잠시 세상 것으로 희희낙락하고 있는 겁니다. 반대로 아무리 세상에서 환란을 당해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면, 예배의 의 끈을 놓지 않으면 결국은 승리하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2] 예배의 자세 : 하나님의 임재 앞에

그러면 “어떻게 예배할까?” 예배의 자세에 관해 살펴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시다” “하나님 내 앞에 계시다” 이렇게 믿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세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① 경외 :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잘 나타내 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성경 원어 헬라어 로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인데, 존경의 표시로 ‘손에 입 맞추다’ 혹은 ‘엎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워십’(worship)과 그 뜻이 일맥상통합니다.

worship은 worth(가치있는)과 ship(신분)의 합성어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신분이란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므로 그분에게 존경을 드리는 게 바로 예배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 그분의 영광, 위엄, 능력, 지혜 ... 이런 속성들을 기억하면서 그분에게 최고의 존경을 바쳐야 합니다. 구속주 하나님으로 그분의 사랑, 은혜, 권능, 영광 ... 이런 속성들을 기억하면서 그분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현해야 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이 얼마나 낮고 천한 존재인가를 묵상하면 더욱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② 감사 :

우리가 피조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면 정말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고난과 역경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다.” 어느 소설가가 작품 속에서 한 말이 입니다. 이 말을 잘 새겨보면 고난과 역경이 있든 없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었던 나 ...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를 사해 주시고, 영생과 천국의 복락을 주셨다는 사실! 이 한 가지만 생각해도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예배는 무엇으로 드린다고 했습니까?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 ” 우리의 기도에도 감사, 찬송에도 감사, 헌금에도 감사, ... 예배의 한 순간마다 감사가 포함될 때 그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충만히 임재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도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이보다 큰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영원히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갑니다. 천국은 지극한 복이 넘치는 곳이네 그 이유는 바로 항상 예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③ 헌신 :

성경에 보면 예배를 표현하는 단어가 여럿인데 이런 단어도 있습니다. 헬라어로 ‘라트류오’(λατλευω)입니다. ‘봉사하다’ 혹은 ‘섬기다’라는 뜻인데, 영어로 예배를 Service(섬김)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흔히 예배를 ‘은혜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산물 내지 결과입니다. 동기나 목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정성을 바쳐야 합니다. 정성이 없으면 건성으로 드리는 예배, 허탕을 치는 예배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배에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도 최선을 다해서, 찬송도 최선을 다해서, 말씀도 최선을 다해서, 헌금도 최선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높은 사람을 만난다고 가정해 보세요. 요즘 삼청동(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전화 기다리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 대통령 당선자가 만나자고 하면 대개 어떻게 할까요? 아마 때 빼고 광내고 난리일 겁니다. 조금만 높은 사람을 만날 때도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예배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될지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 준수, 태도, ... 등 예배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다 알아서 잘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의 예배가, 우리교회의 예배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드려지는 살아 있는 예배, 참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예배의 범위 : 공예배, 개인예배(경건의 시간), 생활예배

예배의 범위는 무한대입니다. 주일이나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모여 공식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예배를 드립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매일의 생활 자체가 예배입니다.

① 공예배 :

공예배는 기본적이고 아주 중요한 예배입니다. 아무리 개인예배를 잘 드려도 공예배를 빼먹거나 건성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공예배 시간은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떼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공예배는 선약입니다! 가장 중요한 분과 미리 선약을 해 놓은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합니다. 이미 카렌다에 미리 다 표시해 두었잖아요. 특히 주일예배 경우는 아예 빨간 색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늘 기억하고 기다리고 준비하고 ...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내 영혼도 살아납니다.

여러분,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를 아시죠?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959년 소련의 후르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는데, 그 기간 중에 주일이 됐습니다. 그는 후르시초프에게 교회에 가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유물론 공산주의자가 응할 리 없죠. 거절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교회에 함께 가지 않으려면 1시간 반만 기다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상대측에서 외교 관례가 어떻고 하면서 항의합니다.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선약이 있어서 그럽니다. 당신도 귀하지만, 가장 귀한 하나님과 만나기로 선약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시오.” 그랬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공예배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② 개인예배(경건의 시간) :

공예배가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 마치고 “하나님 안녕히 계세요! 다음 주일 또 올께요. 아참, 다음 주일은 친구하고 놀러가기로 했지. 다음 다음 주일에 다시 올께요. 그때까지 심심하시겠지만 잘 계세요!” 이렇게 말하는 게 맞습니까? 아니죠. 하나님은 매 순간 어디서 무얼 하든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도 늘 예배해야 합니다.

하루 중에 짧은 시간이라도 경건의 시간을 마련해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성경 묵상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 그럴 때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생활예배까지 가능해집니다.

③ 생활예배 :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분입니다. 이런 속성을 가리켜 ‘편재성’(遍在性, Omnipresenc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순간마다 하나님의 의식해야 합니다. 꼭 찬송하고 기도하지 않는 시간에도, 공부하고 일하고 있을 때조차 하나님 임재 앞에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게 마땅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합니다. 에녹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엘리야와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그대로 들림 받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평범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교회에서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동일해야 합니다. ‘신행일치’(信行一致)라고 하죠. 또한 공예배 시간의 모습이 생활의 현장에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을 ‘예행일치(禮行一致)라고 불러봅니다.

사도 바울이 역설한 게 바로 이겁니다. 롬12:1 “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흔히 우리가 ‘선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이란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욕입니다. 주일에만 반짝 하고 평일에는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고 산다는 겁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매일 크리스천’(Everyday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돼야 참 예배자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4] 예배의 축복 : 은혜, 승리

이와 같이 참 예배자가 되면 하나님이 부산물로 결과로 놀라운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시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God's Presence)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친히 함께 계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거칠 게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매를 맞고 차꼬에 묶여 지하 감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 요? 행16:25~26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감옥에서 찬송하며 기도할 때, 예배의 현장으로 삼을 때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놀란 나머지 자살하려는 간수를 살리기 위해 탈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인 줄 알고 높은 관리가 와서 제발 출옥해 달라고 사정합니다. 유유히 출옥합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간수의 가족과 루디아 가족이 힘을 합쳐 빌립보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 ‘오페라의 검은 여왕’이라 불리는 소프라노 제시 노먼(Jessye Norman)을 아십니까? 내한 공연을 한 적도 있는데, 훌륭한 크리스천이죠. 여러 해 전 만델라가 남아공 대통령에 취임할 때 영국에서 축하 공연이 있었습니다. 7만명이 모였는데, 순서가 대부분 록 가수와 밴드의 프로그램들이었습니다. 괴성을 지르고 난리입니다. 흥분의 도가니입니다. 무려 10시간이나 그런 분위기가 계속됐습니다. 어두운 밤이 됐는데, 제시 노먼이 무대 위로 올라갑니다. 그 분위기를 어떻게 반전시킬지 어려운 순간입니다. 그녀는 한 동안 미동도 없이 서서 기도합니다. 그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찬송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부릅니다. 3절을 부르자, 조용히 경청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따라 부릅니다. 흐느낌도 있었습니다. 그 저리에 있던 한 가지가 다음 날 신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곳에 성령이 임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렇게 강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이 회복됩니다. 생활이 회복됩니다. 인생이 회복됩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들으시고 우리 자신의 예배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창조된 사람, 예배를 위해 구원 받은 사람, 예배를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시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참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인생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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