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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 32:22-31, 롬 1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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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 32:22-31, 롬 16:1-10)

    야곱은 우리가 잘 알듯이 ‘발뒷굼치’라는 뜻이 있는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된 데는 그가 태어날 때, 쌍동이 형인 ‘에서’의 발 뒷굼치를 붙잡고 태어났다 해서 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야곱은 그 이름이 마치 예언이기나 한듯이 발뒷굼치 붙잡고 사는 생을 산 사람입니다. 쌍동이임에도 둘째로 태어난 것이 억울해서 기회만 엿보다가 형의 어수룩한 것을 빌미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에게 주는 마지막 축복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는 도망쳐서 외삼촌의 집에 가서 살면서 무일푼에서 일약 거부가 되어 다시 도망쳐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일어서고, 항상 쫓겨 도망치는 삶을 산 것이 야곱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위대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은 인물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그 민족과 국가의 이름이 되었고, 그의 열두 아들이 그 민족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는 위대한 조상의 반열에 서게 된 것입니다. 어찌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까?

    1. 야곱은 운명에 맡겨 살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쌍동이의 둘째로 태어나 당시로서는 운명적으로 가문을 이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러한 운명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복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알고 그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축복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야곱의 정신을 가진 백성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 그 가나안 땅은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부분 비옥한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비도 별로 오지 않아 먼지만 휘날리는 척박한 땅입니다. 그나마 같은 조건에서 아랍사람들이 사는 땅에서는 구멍만 뚫으면 석유가 쏟아지는 데, 바로 그 옆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는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쓸모 없는 땅이 이스라엘 땅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지금 그 검은 황금이라는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땅에서 사는 대부분의 아랍사람들 보다 그 척박한 땅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야곱의 정신 때문입니다. 운명에 맡겨 살지 않는 야곱의 정신이 이스라엘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가? 어느 곳에도 젖과 꿀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험준한 산악과 먼지만 자옥한 돌짝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으면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게 해 줄 것이다. 지금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다면, 바로 우리가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이러한 정신으로 척박한 땅에서 새로운 삶을 뿌리내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켜 오늘의 이스라엘을 건설한 것입니다.

    여기에 야곱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정신은 운명에 맡겨 살지 않는 개척의 정신, 변화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의 정신, 기독교 정신입니다.

가로막은 홍해 앞에서 운명에 주저앉았다면 이스라엘은 해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로막은 여리고 앞에서 주저앉았다면 가나안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로막은 사람들의 벽과 지붕의 벽 앞에서 돌아섰다면 중풍병자는 고침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가로막는 벽들을 믿음으로 물리침으로서 새 역사를 이루어간 사건들입니다. 이 속에는 모두 운명에 맡겨 살지 않는 믿음의 정신이 깊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야곱은 돌베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죄로 고향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형의 보복이 두려워 멀리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외로운 길에서 야곱은 평생에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몇 날 며칠을 걸쳐 낯선 길을 가는 동안 들판에서 홀로 외로이 낙엽을 이불 삼아 돌을 베개삼아 누어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꿈속에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멀리 하늘 나라가 보이고 그 높은 곳에 아스라이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는데 야곱이 누어있는 머리에서부터 그곳까지 긴 사다리가 놓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 사이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28:15

여기서 야곱은 최초로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일어나 그 베었던 돌베개를 세워 제단을 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인생에는 돌베개를 베는 때가 있습니다. 그 돌베개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시간, 딱딱하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의 시간들이 없지 않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돌베개의 시련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자신의 두꺼운 껍질이 벗겨질 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돌베개를 베는 시간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사다리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야곱은 얍복나루에서 거듭났습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난 지 20년만에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성공한 삶이요, 금의 환향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고향을 멀리 바라보는 야곱의 마음은 두려움과 공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형 ‘에서’는 아직도 20년 전의 원한을 풀지 않고 칼을 갈고 있고,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물질은 어느 정도 가졌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텅 빈 인생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20년 전 고향을 떠날 때, 그 고독하고 어려웠던 시간에 돌베개 베고 자던 벌판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나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을 잊은 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야곱은 돌베개로 제단을 쌓은 후 한번도 다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하여 달려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얍복나루에서 홀로 엎드려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실로 20년만의 기도요, 20년만의 꿇는 무릎이었습니다.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였다고 하는 것은 밤새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주여, 내게 문제가 있나이다.
  형의 칼은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 데 나는 갈 곳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 쌓은 것이 없나이다.
  이제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요, 나의 힘이십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발 뒷굼치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여정을 물은 것입니다. 남의 발귓굼치 붙잡고 살던 세월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의 인생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말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라. 하나님과 씨름하며 살아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별명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이 후에 야곱은 이스라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의 이름도, 그 국가의 이름도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16장에 바울사도의 문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과 그들에게 붙여진 짧은 별명들은 읽는 우리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자아내게 합니다. 거의 2000년 전에 그렇게 거기에 모진 핍박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산 사람들의 이름을 직접 들을 때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완성된 성경도 없었고,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해줄 특별한 지도자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뜨거운 믿음 하나만 가지고 신앙을 지키고, 어쩌다가 만나는 바울사도와 같은 분들에게서 목마르게 버텨오던 신앙의 갈증을 채우면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같이 뜨거운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충성스런 성도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이름 앞에 붙여진 별명들을 보아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별명은 바울사도가 붙여준 별명들입니다.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 뵈뵈...,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 첫 열매 에배네도..., 그리스도안에 인정받은 아벨레..., 이러한 별명은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오랫동안 겪어오면서 그러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고 붙여준 별명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별명이 있다면 그 별명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일군..., 사랑의 성도..., 착하고 충성된 종..., 등등이 붙여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만 많다 뺀질이, 입 잘나와 삐질이, 앉은방아 끄덕이..., 등등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야곱은 ‘이스라엘--하나님께 엎드리는 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시몬은 ‘베드로-반석’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모두 그 삶 속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허겁지겁 살다가도 가끔은 멀리 내다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끔은 뒤를 돌아다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인생에서 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남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회학자인 안토니 캄폴로(Anthony Campolo)박사는 95세 이상 된 고령자 50명을 상대로 "당신이 만일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백한 답변 세 가지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 더 많이 비우며 살겠다(reflect more). 욕심 버리며 살겠다.
  둘째, 좀 더 모험을 하겠다(risk more).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겠다.
  세째, 내가 죽은 뒤에도 남을 수 있을 만한 일을 하고 싶다(fruit more).
인생의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한 이 세 가지는 참으로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95세가 되어 이런 생각을 해서는 이미 늦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올 때는 누구나 빈손으로 왔지만 갈 때는 반드시 자신의 삶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텅 빈 인생으로 영원한 고향 하나님 나라에 다달았을 때, 다시 채울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충성스럽게 살아서 나의 삶을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들로 가득가득 채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삶의 흔적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는 물론 하나님께 아름다운 별명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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