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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이 요셉되기까지 (창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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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요셉되기까지 (창 45:1-8)

목사가 되어 누리는 축복 중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대상에서는 설교하며 제가 제 삶의 이야기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성도들을 만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살아왔던 날들이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기뻐하며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제가 책 한권 꼭 쓸거예요. 보세요 제가요 꼭 책한권을 쓸거예요” 아무리 “꼭”을 자주 해 보지만 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기도 안쓰는데 무슨 책을 쓰겠습니까마는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쉽지만 그 삶이 내 것 일때는 쉬운 것이 아니구나 생각을 해봅니다. 요셉이 요셉 되기까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는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과, 최고의 정상에 올라가 있는 요셉과, 멀리서 곡식을 사러왔던 형제들이 눈물가운데 만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만남은 22년만의 만남입니다. 형제들인데, 마땅히 함께 했어야 할 형제들인데, 지금 22년 만에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리가 된 요셉이 숨겨왔던 자신을 나타내면서 22년의 한을 풀고 있습니다. “형님들 내게 가까이 오소서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22년 전에 당신들이 팔았던 요셉입니다”. 지금 요셉은 22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마음 한쪽 구석에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어쩌면 잃어버린 듯 그렇게 살아왔을진대 22년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요셉의 목소리, 형제들은 아마도 너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합니다. 형제들에 의해 팔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지금 요셉은 형제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22년 전에 팔았지만 형님들이 판 것이 아니요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요셉의 삶에 해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을 해답으로 말하기까지는 2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은 왜 울어야 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동안은 왜 아파야 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유난히 인생살이가 이렇게 힘든 줄로만 알았습니다. 형제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팔려 와서 종살이를 10년하고, 그리고 감옥살이를 3년을 합니다. 나름대로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이상하리만큼 그의 인생은 꼬일 대로 꼬여 가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대로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나고 말 것 같은 절망감이 왔을 것입니다. 은혜는 받았지만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고 꿈은 꾸었지만 꿈은 꿈 되지 못하고 말씀은 받았지만 말씀이 말씀되지 못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해답을 알기 전에 요셉은 사실 일찍이 꿈을 꾸었지만 꿈이 무엇인지 몰랐었습니다.

어느 날 강력한 은혜는 받았는데 그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기도를 하였지만 내가 왜 이런 기도를 했어야 했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관계는 꼬일 대로 꼬여 처음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아 늘 형제들보다 좋은 옷을 입었지만, 이 아버지의 편견이 요셉을 더 힘들게 한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시기와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에는 형제들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결국은 같은 형제임에도 이 형제와 함께 할 수 없다하여 노예로 팔아버리기까지 했습니다. 팔려가 종살이를 10년이나 했지만, 왜 그러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감옥생활을 3년이나 했지만 왜 감옥생활을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았습니다. 해답을 알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22년 만에 요셉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는 것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사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합니다.

5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7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입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결정을 내립니다. 8절에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요셉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막연하게 믿어 왔는데, 그렇게 막연하게 믿어 왔던 것을 눈으로 보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보이는 것은 형님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보이는 것은 형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보이는 것은 형님들로 인하여 무던히 버거운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22년 만에 그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는 것만 말하고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알지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을 절대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나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이곳에 나를 당신들 앞서 이곳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될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될 이유입니다. 언제인가 우리는 그때 내가 믿음으로 더 살았어야 되는데.... 그때 내가 믿음으로 더 열심히 살았어야 되는데... 자책하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인간적으로 사는 사람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지금은 열심히 사는 사람과 대강 신앙생활 하는 사람 차이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언젠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믿음으로 살았어야 되는데... 그때 이기기 잘했었구나...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요셉은 지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님들이 나를 팔았지만 판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 하시려구요. 이러했던 요셉의 삶속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삶에는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매달려있지만 사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보이는 부분은 내가 힘들어하고 내가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여러분 요셉의 삶을 거울로 들여다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은 하나님이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보이는 그 어떤 것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 같아도 참으로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 결정합니다. 요셉의 삶에 계셨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들이 나를 팔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앞서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생명을 구원하시려구요. 목사 개인적으로 늘상 이런 기도를 하곤 합니다. 말씀을 전하러 가게 되면 하나님 누군가가 나를 초대하고 초대받아서 제가 온 것 같지만 이러한 사람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음을 느끼게 하옵소서 이것이 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보내셨다면 그저 우리끼리 몸부림치다 좋아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판것요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보냈다 이것은 그동안 요셉의 삶의 해답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해답을 해답으로 말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요셉이 요셉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먼저 하나님은 요셉의 삶에 요셉의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무엇으로 입니까? 꿈으로입니다. 늘상 한번씩 꾸는 꿈이지만 언젠가 요셉은 너무도 선명한 꿈을 꿉니다.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열한개의 단이 둘러서서 자신을 향하여 절하는 것입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너무도 신이납니다. 형제들에게 가서 자신의 꿈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꿈이야기를 들은 형제들이 얼마나 마음에 걸렸겠습니까? 우리 형제들이 그러면 너한테 머리를 숙일까? 몇일 후에 요셉은 또한 번의 꿈을 꿉니다. 전에보다 더 선명하게 이번에는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 자신을 향하여 절하는 것입니다. 꿈의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요셉은 형제들에게 뛰어가 얘기합니다. 형님들 내 꿈 얘기를 들어주세요. 형들이 또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부모님과 우리가 너에게 절하랴? 중요한것은 이꿈이 너무도 선명했고 내용은 알수 없지만 너무도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 꿈이 참으로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 꿈은 절대로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요셉을 출세시키거나, 요셉을 크게 만드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꿈이 아름다운 이유는 요셉의 꿈안에는 그 날의 요셉의 꿈안에는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요셉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심으신 것입니다. 꿈을 통해 요셉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싸인은 무엇입니까? 요셉아 이제 너의 삶은 너만의 삶이어서는 안된다. 요셉아 이제 네가 살아야 되는 이유가 너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셉은 17살에 꿈을 꿉니다. 그리고 종살이를 10년 합니다. 그후에 감옥생활을 3년 합니다. 그 후에 전에 없었던 풍년을 맞습니다. 7년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꿈을 꾼후에 20년후 인류에 대 기근이 밀려옵니다. 내일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20년 후에 있게될 인류의 대 기근을 앞두고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계획을 세우고 요셉의 삶에 개입하시어서 요셉을 통하여 그 구원계획을 펼쳐갈 그 엄청난 구원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셉이 꿈을 꾼후에 요셉의 삶속에는 도도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제 흐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이 요셉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면서 보이는 부분은 요셉의 삶이지만 이제 단순히 요셉만의 삶이 아닙니다. 요셉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꿈이 있으십니까? 잠언서 29장 18절에는 “묵시가 없으면, 비전이 없으면, 꿈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백성이 망할짓만 하거니와”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꿈이 없다면 당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면 백성이 망할 짓만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29장 18절에 “묵시”를 다시 번역하면 “비전”이나 “꿈”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비전”과 “꿈”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꿈”은 내가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한번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은 그 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느냐, 하나님의 소원이 담겨 있느냐, 하나님의 원하심이 있느냐 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 꿈이 있으십니까? 소원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라고 말할 것이 있으십니까?

2008년을 시작하여 1월 마지막주를 맞았는데 내가 2008년을 살아야되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살아야 되는 이유에 하나님은 계산되어 있으십니까?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내 삶에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소원을 두고. 그 소원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말 아십니까? 당신에게 소원이 없다면 남보다 큰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꿈이 없다면 걸어가야 할 이유, 달려가야 할 이유, 살아야 될 이유, 이것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어쩌면 막연한 하나님만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셉의 꿈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계획에는 언제나 마귀의 방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땅에 보내십니다.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질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고 마귀는 당시 바로의 마음을 충동질 하여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법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십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것입니다. 구원계획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귀는 그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더 먼저 알고 당시 헤롯의 마음을 충동질 하여 2살 미만의 아이는 다 죽이라는 법을 만들어 놓고 기다립니다. 그냥 보면 인간의 역사이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처절한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그냥 보면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 구원계획앞에 마귀도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냥 보면 형제들의 시기 질투로 인한 사건이지만 마귀는 형제들을 통해 요셉의 꿈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실 마귀는 요셉에게 관심없습니다. 그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비전을 흐려놓고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 이 마귀의 작전앞에 안타깝게도 그 꿈들이 비전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대를 살아야 되는 이유를 상실한 세대라고 말합니다. 실컷해야 더 큰 아파트 더 큰 자동차 7살 8살 9살때부터 더 좋은 대학을 목말라하며 학원을 3개 4개씩 보냅니다. 살았다는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자가 되어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당신안에 소원이 있는가? 당신안에 꿈이 있는가도 묻지만 우리의 꿈이 단순히 우리의 욕심을 이루고 한을 푸는 정도여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으면, 걸어가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가지고 있는 시간적 여유, 물질적 여유는 여러분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인생에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꿈이 꿈되는데는 시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꿈은 꾸었는데, 은혜는 받았는데, 아멘 했는데, 감사했는데, 그 앞에 펼쳐진 삶은 종살이 10년, 직장이 아닙니다. 노예생활입니다. 그리고 감옥생활 3년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숨어계십니다. 아무것도 못하시는 것처럼, 돕지 못하는것처럼, 하나님이 계시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종살이 10년, 하나님이 무엇을 했는가? 내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는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했는가? 내가 나름대로 믿음으로 살았는데 나름대로 기도하며 살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온갖 오해를 받으실지라도 사람의 원함따라 춤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꿈을 이루어가십니다. 오해를 받으시면서도 말입니다. 시련이라는 환경을 통해 하나님은 요셉을 보이지 않게 이끌어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을 통해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요셉의 꿈을 죽여갑니다. 종살이 10년 하는 동안 마귀가 뭐라고 참소했겠습니까? “하하 너 꿈꾸었니? 그 꿈 별거 아니야” 얼울하게 한 여인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 갈 때 마귀는 뭐라고 참소했겠습니까? “너 봐라 하나님은 널 돕지 못하잖아” 사랑하는 여러분! 아마도 요셉의 삶은 그렇게 쉬운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삶을 향한 성경의 평가는 단호합니다. 시련가운데 있어진 요셉의 삶을 향한 성경의 평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얽힐 대로 얽혔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평가는 노예생활 10년 하는 그의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형통하였더라”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3년을 하는데 성경의 평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형통하였더라” 형통이라고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잘 풀렸다는 말 아닙니까? 잘 해결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요셉이 잘 풀렸습니까?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얽혔는데, 왜 요셉의 삶이 형통인가? 그것은 성경의 오해인가? 아닙니다. 중요한것이 있습니다. 서두에 제가 이런 표현을 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에 개입하시면서 “요셉아 이제 너의 삶은 너만의 삶이어서는 안된다 이제 네가 사는 것은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신것이다”. 중요한것입니다. 보이는 부분에 요셉의 삶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요셉 안에 심겨진 도도한 하나님의 섭리, 구원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형통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요셉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삶은 얽혔습니다. 꼬였습니다. 그런데 형통은 무엇입니까? 요셉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이 막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행형!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형통은 보이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고 그 어려운 중에 꿈을 붙들고 살았다구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꿈이 있어야 한다구요, 요셉은 종살이 10년하면서 가슴속에 큰 꿈을 잃지 않았다구요, 감옥생활을 3년하면서 그는 가슴속에 타오르는 꿈을 잃지 않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NO”합니다. 요셉은 꿈꾸고 재수 옴붙었습니다. 오히려 꿈을 꾼후에 그의 삶은 얽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게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가물어 메마른 땅에 저수지가 말라 땅이 쫙쫙 갈라지고, 땅에 먼지가 퍽퍽 일어나는데, 아세요? 3미터만 땅을 파고 들어가보면 그 안에는 도도하게 샘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저수지는 말라 비틀어진것 같지만 그 안에 물결은 흐릅니다. 흙을 만나면 흙을 넘고 돌을 만나면 돌을 넘어 흐를대로 흘러갑니다. 마치 요셉의 삶은 말라 비틀어졌고 꼬일대로 꼬였지만, 요셉안에 심겨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는 감옥에서도 노예생활중에도 누가 죽이려고 해도 누가 팔아도 한번도 막히지 않고 이루어져 가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면 형들이 나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22년만에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판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것이 있습니다. 땅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샘물이 언제까지나 땅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솟아납니다. 이것이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오해를 받으시면서 요셉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것처럼 그렇게 숨어계셨지만 언제까지나 숨어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솟아납니다. 그리고 요셉의 입을 통해 고백하게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판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냈다고 말입니다. 요셉의 삶은 얽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은 요셉만의 삶이 아니었기에 그는 형통했습니다. 요셉의 삶은 얽힌것 같아도 요셉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막히지 않습니다. 요셉은 꿈을 붙들고 산것이 아닙니다. 그 꿈에 대한 이야기는 45장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그 꿈에 대한 해답은 22년만에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요셉은 거대한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미래를 계획했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버거웠을 것입니다. 그에게 분명한건 꿈도 아니고 무엇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한 분. 안믿으면 안되는 사람으로, 단하나 틀림없는 것 있습니다. 저 여인의 유혹앞에 내가 망가져서는 안된다. 내가 오늘 무너져서는 안된다. 그렇게 달려왔는데 지금 그 해답을 말하게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종살이 10년하면서 꿈을 꾸었겠습니까? 감옥생활 3년 하면서 나는 꿈이 있어 나는 꿈대로 이루어질거야 이렇게 긍정적 사고로 몰아붙였겠습니까? 아닙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종살이 하면서 하나님 아니면 위로받을 자가 없었고 하나님 아니면 상대도 해주지 않으면 때로는 하나님 붙들고 울었고 아파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해답을 말하게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 갔지만 사실 우리 모두도 감옥에 있는것 같습니다. 특히 여자분들은 다 감옥에 있는것 같애요. 그래서 여자 성도들 하고 이야기 하다 보면 꼭 이런 말을 합니다. “어디가서 푹 쉬었으면 좋겠다”. 내가 볼때는 늘 쉬는데도, 뭘 그렇게 어디가서 쉬고 싶은지... 또 가 본들 갔다오면서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집이 제일이야. 그런데 아세요? 때로는 우리가 이런 환경속에서 믿음이 좋아서 믿는것 같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이 없이는 안되는 사람으로 우리를 끌어다 놓습니다. 왜 아파야 하는지, 왜 울어야 하는지 모르고 그렇게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감히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에 나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평가와 사람의 평가는 다릅니다. 계시록 2장 9절에 서머나 교회가 “나는 가난하고 나는 헐벗었다. 나는 어렵게 산다 했지만 네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나니 실상 부요한자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계시록 3장 17절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 말하지만 네가 너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 가난한것, 눈먼것, 벌거벗은 것을 네가 모르는구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나는 가질만큼 다 가졌어, 나는 이정도야, 자기 스스로 아무리 행복을 느껴도 성경은 “아니다” 할 수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성경의 평가에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믿고 선교사로 순교자로 드려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감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느껴질때 하나님이 꿈틀대신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싶을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이 뭐라 해도 가슴에 그리스도가 메마르지 말아야 될 메말라서는 안되는 너무도 분명한 이유입니다. 요셉은 지금 해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는 울음은 형제들을 끌어안고 우는 울음은 지난 22년의 울음과는 색깔이 다릅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꿈을 꾸고 꿈이야기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꿈이 이루어진것을 보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요셉은 보이는 사람의 사건이 아니라 그동안 숨어 계셨던 그 하나님이 보여지고 보이는 하나님의 사건,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는 믿음으로만 믿었지만 지금은 눈으로 보며 믿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 요셉이 형제들에게 꿈이야기를 한뒤에 그의 삶이 얽히면서 요셉의 삶속에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내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비전이 드러나기 전에는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던것 같습니다. 말없는 요셉입니다. 아마도 종살이 하면서 10년간 노예생활하면서 사람들이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요셉 너는 어쩌다 노예가 되었니?” 말이 없습니다. 만약에 말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 형놈들 때문에, 형놈들이 나를 팔았어, 내가 그냥 안둘거야” 마음속에 칼을 갈고 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갔을때 아마도 같은 죄수들이 아마도 물어봤습니다. 여러분 혹시 가본 경험 없습니까? 안물어 봤을까요? “요셉 너는 왜 감옥에 왔니” 죄송하지만 그대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응 그년 때문에” “ 날마다 유혹하잖아 그래서 나는 믿음지키려고 벗어던졌는데 그것이 증거물이 되어서 감옥에 왔어” 그런데 요셉은 말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말하게 되면 보이는 것을 말해야 되니까. 말하게 되면 사람의 사건은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하려면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사건속에서 어쩔수 없이 사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맞지요?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만 숨어 계십니까? 예수님에게도 입니다. 불법재판을 받는데 우리 하나님이 눈을 감습니다. 맞고 끌려가는데 하나님이 눈을 감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달리는데 우리 하나님이 놓아 둡니다. 그리고 무덤에 갇히는 순간까지도 놓아둡니다. 전부다 사람 마음대로 마귀마음대로 되는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22년동안 말이 없던 요셉이 말을 합니다. 이제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팔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가지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에 있어 해답을 알고 계십니까?

지난 주일 지난 한해 너무도 젊은 나이에 남편을 홀연히 하늘나라로 보낸 집사님 한분이 아들 하나 안고 밥을 먹는 것을 보며 함께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주고 받으며 울고 울었습니다. “교회 오는데는 얼마나 걸리나?” “예 목사님 이 아이 데리고 오는데 2시간 걸려요.” 멀리 부천으로 이사갔지만 교회를 놓을수 없다고 버스를 타고 갈아타고 그 아이와 함께 오는 것입니다. “힘들면 가까운데로 가지 그래” “목사님 그럴수 없습니다. 우선은 와야 할 것 같아서 와요” 믿음으로 살았는데 기도했는데 언젠가 하나님이 벅찬 감격속에 은혜를 주셨는데 내 기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끌려갑니다. 이때 요셉은 말이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물어 말하게되면 보이는 사건만 이야기하게되고 그러나 그 보이는 사건들이 날 결정내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부분이 나를 결정내게 하는것 입니다. 또 한번은 주님을 보고 가야 됩니다. 믿고 싶어서 라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오늘 또 주님 보고 걸어가죠.

저는 우리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 기도할 때 이런기도를 합니다. 주님 물론 하늘나라 가면 해답을 알겠지만 언젠간 요셉처럼 보이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것을 말할수 있는 해답을 해답으로 말할수 있는 그날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보곤 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삶속에 하나님이 숨어 계신듯 드러나지 않습니까? 남보다 울었기에 남보다 아팠기에 더 큰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쩌면 만난바 될것입니다. 시작된 2008년 1월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2월을 준비합니다. 우리 변함없이 내 삶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순 없지만 성경에 평가는 인정해 주실것을 믿고 그렇게 달려가 봅시다.(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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