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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 싸개속의 생명 (삼상 25:28~29, 요 1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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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싸개속의 생명 (삼상 25:28~29, 요 12:24~25)

‘발자국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환경지수를 측정하는 도구인데 한 사람이 차지하는 땅이 얼마인가에 따라 측정합니다. 우리나라는 발자국 지수가 아주 낮은 편입니다. 발자국지수는 낮을수록 환경파괴도 적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침대는 항상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불은 자고나면 개켜서 장롱 속에 넣으면 공간을 본래대로 환원합니다. 가방은 항상 부피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자기는 다시 접어 넣으면 공간을 환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색종이를 가지고 전부 뜯어 모자이크처럼 펼쳐놓습니다. 그리나 우리나라는 종이접기를 하여 너비를 아주 작게 줄여놓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공간을 환원하고 발자국지수가 낮다는 말입니다.

  보자기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다 싸는 한국의 포용력과 슬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양사람들은 ‘나’라고 하여 개인주의적인 말을 하지만 우리는 ‘우리’라고 하여 집합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는 포용적 용어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편 가르기, 끼리 문화 등이 발달하여 우리 전통사회의 관습과 맞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발달했다는 포장문화와 외형문화를 보세요. 우리는 싸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싸서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한복을 입을 때는 두루마기를 마지막에 입고 두루마기는 절대로 벗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속에 입은 모든 것을 감추는 것입니다. 두루마기의 기능은 싸개입니다. 오래 전 여인들은 두루마기뿐만 아니라 얼굴을 감추는 싸개가 있었습니다. 감추는 것과 포용하는 것이 동시에 발달한 싸개는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합니다. 이런 우리의 의식 때문에 발달하는 것이 쌈밥이고 또 내숭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나발이란 사람은 갈멜족속이며 마온사람이며 부자였고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부인은 잘 얻었습니다.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고생할 때에 다윗이 보낸 용사 10명이 나발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발은 “다윗이 누구길래 나에게 달라고 하는가”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군사를 보냅니다. 나발 대신 아비가일은 다윗을 접대하며 남편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정성을 봐서 용서합니다. 아비가일이 베푼 잔치 후에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그 모든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발은 낙담하여 돌같이 되어 열흘 후에 죽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내 주의 생명은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다윗의 생명은 생명싸개 속에 있다고 합니다. 다윗의 생명이 안전할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새 것은 생명, 사랑, 치유, 회개 그리고 창조입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쌍둥이 가운데 한 아이의 심장에 큰 결함이 생겼습니다. 의사는 이 아이가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이 아이가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이 아이의 절망적 상태를 본 한 간호사가 쌍둥이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에 넣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 인큐베이터 속에 나란히 눕혔습니다. 얼마 후에 보니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던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두 아이는 정상으로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신문사에서 이 소식을 듣고 서로 포옹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의 제목을 “생명을 구하는 포옹”이라고 하였습니다.

  아기의 팔이 생명싸개입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싸개는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팔에 안기는 것은 생명을 보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히는 것은 생명싸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팔, 손 안에서 생명을 보존 받고 살아갑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 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팔을 의지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우리 팔이 하나님의 팔을 대신하는 생명싸개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모든 생명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생명싸개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생명싸개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사무엘상 25:29에는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입니다.

  생명싸개 속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생명의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태초에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분이십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큰 군대가 되게 하신 분이십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빼앗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생명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살은 절대로 불가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싸개의 유일한 주인입니다.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 폐지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1997년에 23명이 사형 당한 것을 끝으로 10년 동안 사형이 한 건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134번째 사형폐지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야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합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 안 죽을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 누구는 죽을 사람입니까? 누구는 안 죽을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생명은 다 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하지 않은 생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보호 장치는 인간에게 극진합니다. 낮의 해가 우리를 상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밤의 달도 해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정말 좋은 찬양입니다.
  생명싸개는 생명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은 눈동자와 같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생명을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꺼”라고 하실 것입니다. 다른 것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생명 주머니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절대로 안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두 종류의 희귀한 동물이 있습니다. 캥거루와 코알라입니다. 캥거루는 47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캥거루는 새끼를 보호하는 주머니를 배에 가지고 있는 유대류(有袋類)입니다. 말하자면 육아주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키우는 생명싸개입니다.

  몇 주 전 미국에서는 이집트 출신인 미국인이 두 딸을 살해하고 잠적하였습니다. 둘째 딸이 비무슬림과 교제한다고 하여 아버지가 두 딸을 총으로 쏴 죽인 것입니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명예 살인’(Honour killing)을 한 것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고 하면서 죽인 것입니다. 딸의 생명이 아버지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딸의 생명까지 빼앗는 것이 종교적 신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바른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버지는 생명싸개 역할을 못하고 생명을 버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문화 활동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종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감싸다’란 말이 있습니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휘감아 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기를 포대기로 감싸다’라는 말을 합니다. 둘째는 허물이나 약점을 덮어 주거나 두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막내라고 감싸주다’는 말을 합니다. 그 외의 의미가 있지만 이 말은 한 결 같이 보호와 도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는 감싸주고, 덮어주고,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시편 40:2에는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장치는 생명연장 장치 정도가 아니라 생명싸개입니다.

둘째, 생명싸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29절 하반절입니다. “내 주의 원수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원수의 생명은 하나님이 던지고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 싸여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싸시면 안전하게 보호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시면 누구도 돌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말라기 4:1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원수와 악인의 생명은 지푸라기같이 쉽게 타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은 절대로 안전합니다. 생명싸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을 보세요. 자궁(子宮)은 문자 그대로 생명싸개입니다. ‘아들의 궁’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궁에서 태어나니 누구나 공주요 왕자입니다. 자궁은 하나님의 신비가 숨어 있는 생명주머니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입니다. 아기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완벽한 생명보호 장치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싸개는 도처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도피성이란 것이 있습니다. 요단강을 기점으로 48개 성읍 중 6곳이 도피성입니다. 요단강 동편 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이 세 곳이 도피성입니다. 요단강 서편 게데스, 세겜, 헤브론, 이 세 곳이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은 문자 그대로 도피하는 성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입니다. 과실 살인이나 누명에 의한 살인을 막기 위하여 만드신 생명싸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보호 장치입니다.

  마태복음 18:4에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이 만드신 귀한 것들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요나가 햇볕을 가리고 있는 박 넝쿨이 시들게 하십니다. 요나는 넝쿨이 시드는 것을 보고 불평하였습니다. 박 넝쿨이 시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보이신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시드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기의 홍콩 무술영화를 보세요. 대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악당이 주인공의 집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다 죽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일 때 충신이나 유모가 아기를 안고 피신합니다. 장면이 바뀌고 아이가 청년이 되어 무술을 연마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내려가서 원수들을 찾아 복수합니다. 악당 두목이 훨씬 무술이 월등합니다. 주인공은 실컷 맞다가 막판에 극적으로 승리하고 등에 칼을 차고 주인공은 유유히 길을 떠납니다. 옛날 미국의 서부영화도 보시면 보복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피의 보복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율법이 이를 증명합니다. 율법에는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자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마치 보복법이 우선적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생명보존법이 우선입니다. 이슬람의 코란을 보세요. 구약의 보복법과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복수하느라 절대로 전쟁이 끝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생명을 빼앗게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을 보존하십니다.

  마태복음 10:29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드신 어떤 생명도 귀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사야 31:5에는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보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사람을 그냥 버려두어 생명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십니다.

  시편 18:2에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합니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보호하십니까? 생명을 사랑하시니까 그렇습니다. 한 생명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매라고 합니다. 진리는 속임수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합니다. 의는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신발을 신으라고 합니다. 평안은 사탄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합니다. 믿음은 의심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합니다.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 의, 평안, 믿음, 구원, 이 모두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보호를 위한 하나님의 생명싸개가 전신갑주입니다. 이렇게 전신갑주를 입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원수가 침범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10:9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십니까? 보호하고, 풍성하게 하고, 생존하게 하고, 그 안에서 공급하기 위하여 문입니다. 그 문 안에 생명과 구원이 있습니다. 그 문 밖에는 생명과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는 온 세계, 온 인류를 다 싸고 있습니다. 생명보자기는 온 세계를 다 싸기에 충분한 큰 싸개입니다. 우리교회가 생명을 보존하고 함께 하는 생명싸개가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은 생명이 흐르는 곳이 돼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생명싸개 안에서 구원받으세요! 우리 모두 생명싸개로 구원하세요!

  생명과 구원이 보장된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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