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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을 위한 고난 (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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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위한 고난 (롬 8:12-17)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는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생각하기를, 자신의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여기거나 내 자신이 바르게 살지 못해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고난은 죄의 값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레미아 2:19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악을 행하지 않고 아무 죄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마1:21). 저와 여러분의 죄는 물론 모든 인류의 죄를 예수님께서 다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까지도 다 속량함을 받게 하셨습니다(갈 3:13).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가르치십니다. 고난은 없으면 좋을 듯하지만 사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며 성숙해집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는 우리에게 고난의 길을 허락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도록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키울 때 때때로 군복무같이 고난을 배우는 길로 인도하기도 하고 혹은 부득이 그 길을 걷게 하며 미안해하다가도 한편 그 일을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부모님들이 원하는 것은 자녀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영광을 원합니다. 그 영광을 위해 자녀들에게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하기도 합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키우실 때 고생을 가르치는 일이 때때로 매우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고생을 겪게 하시고 그 고생을 통해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 동물의 세계에도 사람들의 세계같이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동물들이 그 새끼들을 키 울 때 성숙하게하기 위해 고난을 주는 것을 "젖떼기 갈등"(Weaning conflict) 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찌르레기라는 새는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오면 처음에는 먹이를 잘 주지만 어느 정도 커서 독립할 때가 되면 먹이를 주는 횟수를 점차 줄인다고 합니다. 새끼들은 날개를 불안하게 떨며 부모에게 엄살을 부리기도 하면서 며칠 전에 부모와 다른 반응을 경험합니다. 다 자란 재갈매기의 경우 새끼들이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서 먹이를 얻으려면 머리와 몸의 자세를 가능한 낮추어 서 부모에게 다가간다고 합니다. 딱새라는 새의 경우, 새끼들이 태어난 지 9일 동안은 먹이를 달라고 울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먹이를 주지만 10일이 지나면 먹이를 달라고 울 때만 주고 15일쯤 되면 더 이상 둥지에 앉아서 먹이를 달라고 만하는 새끼들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이를 주어도 부모가 둥지에서 점점 멀리 떨어지기까지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주기 때문에 결국 부모를 쫓아다니는 것보다 내가 먹이를 찾아 먹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고 비로소 독립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동물이나 사람들이나 부모가 자녀들의 성숙함을 바라는 것은 같습니다. 어린 때의 습관을 끊어내고 이제 부모와 같은 그런 수준의 성장을 위해 어린 습관을 끊는 고난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성숙함입니다. 성장하고 성숙하고는 다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갖는 습관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고난이 오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잘 거치면서 영광도 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난과 영광은 무엇입니까?

첫째, 영생의 영광을 위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고난입니다(영생의 영광을 위해 성령 충만 받는 고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큰 영광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 이것은 이 세상에서 90세, 100세, 200세를 살게 되어서 오는 영광, 어른대접을 받는 영광과도 비교가 안 되는 큰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선물로 주시지만 그러나 고난과 함께 주십니다. 그 고난은 영생을 위해 우리가 죄의 습관, 육체의 욕심대로 사는 습관을 끊게 하시는 고난입니다. 영원히 살면서 누릴 그 하나님의 세계의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더 좋아하게 만드시면서 세상의 그림자 같고 질이 낮은 그런 것들을 끊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령의 충만을 주시면서 술을 끊게 하시는 것입니다. 술을 끊는 것이 고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것은 영생수를 마시는 것인데 이 성령 충만한 빛, 이 영광, 이 영생의 영광의 빛을 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술이 끊어지는 고난을 기쁨으로 받게 됩니다. 술만이 아닙니다. 마약 대신 성령의 기쁨, 음란 대신 성결의 기쁨, 주먹 대신 화평의 기쁨, 미신 대신에 복음을 믿는 기쁨, 무정한 마음 대신 사랑이 가득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은 성령을 받을 때 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 충만은 큰 영광입니다. 영생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위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고난입니다.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는 죄에 빚진 자이나 육신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영생의 생명의 영광을 위해 성령을 순종하여야합니다. "빚진 자"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죄의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죄 값을 갚아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래서 의인이지만 그러나 죄의 습관, 죄의 성품을 갖고 있는 면에서는 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며 찬송을 부릅니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 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빚을 갚아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빚은 갚아졌습니다. 빚진 자이나 빚을 갚음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의 요구에 굴복하면서 육신대로 살면서 죄를 지어서 육체 의 요구 앞에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를 죄로써 만족시키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육체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의 요구를 따라서 살 때 영의 요구가 육체의 요구를 이기면서 우리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제 육체의 젖을 떼는 젖떼기의 갈등을 겪지만 그러나 이제 비로소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 바로 성령 충만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전에는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었는데 이제는 성령 충만 받은 것이 간증이요 영광이 됩니다. 이것이 영생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위해 영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죄 대신 성령 충만을 받는데 이 일에 고난이 옵니다. 여러분, 은혜 받으려면, 성령 충만 받으려면 우리는 육체의 고집을 이기고 은혜 받는 자리에 힘써 나아가야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의 고난과 영광입니다(자녀의 영광을 위해 신앙 고백하는 고난). 우리에게 오는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형상이 죄로 인해 제 모습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형상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 그 영의 생각을 따라서 변화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본문은 말씀합니다.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을 받고 육체의 죄를 이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합니다. 확신을 갖습니다. 서로가 꼭 닮은 생각을 하고 통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들입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율법적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노예가 아니고 아들이 되었습니다. 입양이 되었습니다. 양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영은 아들의 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 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갖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일을 할 때 도우신다” 라는 감동 가운데 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후사로서, 즉 후계자요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는다는 확신을 갖고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사명, 큰일을 맡는다는 것은 고난입니다. 베드로 가 고난을 받았고 바울사도가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목숨 건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영광스러운 축복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바울 사도는 모든 교회에서 존경하는 하나님의 종이요 사자요 그리스도의 일을 맡은 후계자로서 본이 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이 영광스러운 간증이 되고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맡기시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에게 수고의 고난이 있지만 그러나 갚아지는 영광이 더욱 클 것입니다. 큰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기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은 그분의 영광, 즉 영생의 영광, 아들의 영광, 후사의 영광을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함께 한 후사"를 만드십니다. 그러나 대신 주님의 고난을 같이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 사"가 되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주님의 남기신 수고, "고난도 함께" 받기를 원하십니다.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 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에게 성령 충만 받는 고난, 신앙고백의 고난, 큰일을 맡는 고난도 주십니다. 영광을 위한 고난을 주십니다. 이 고난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잘 감당하면서 큰 영광의 면류관을 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연히 온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기 위해 잠시 허락하신 고난임을 기억하시고,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고,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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