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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향기로운 냄새와 지극히 거룩한 것 (레 1:1 - 레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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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냄새와 지극히 거룩한 것 (레 1:1 -  레 2:17)

  단체여행을 떠나게 되면 출발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숙지해야 할 정보나 주의사항 등을 여행자들에게 미리 공지해 주게 됩니다.
  특히 그 여행의 목적지가 다들 처음 가게 되는 곳이거나 거기까지 가는 여정이 험난한 경우에는 그것이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그런 오리엔테이션의 내용이 각 여행자들에게 잘 숙지되고 또 잘 지켜져야 안전한 여행을 하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행군을 시작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단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을 지음으로써 광야행군을 위한 준비작업을 마쳤으며, 이것이 출애굽기의 끝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 땅을 향한 본격적인 대장정은 민수기 1장에서부터 나오게 되는데, 그 사이에 레위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레위기 전체는 곧 이스라엘이 광야행군을 해 나가는 동안에 각 백성들이 숙지하고 지켜야 할 수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오리엔테이션의 내용은 아주 특이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생전 처음으로 경험해 보게 될 광야라는 생소한 자연환경에 대한 정보도 아니었고, 장거리 행진 중에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요령 따위도 아니었습니다.
  이 레위기 전체의 내용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라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생활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율법으로 다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 절대로 실수하거나 실패해서는 안 될 절대규범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레위기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특히 '5대 제사'에 관한 율법을 제일 서두에 두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에 제일의 급선무로,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너무나도 명백하게 선포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5대 제사'들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명하시는 예배생활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지키는 성도가 되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전부(全部)의 것을 올려 바치는' 번제(燔祭)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생활을 해야 합니다.

  1장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회막"은 바로 '성막'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며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서 제사드릴 장소로 지정된 곳이었습니다.
  그 제사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누구든지"는 예배에의 초청이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음을 뜻하며 "예물"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는 무언가 바칠 것을 반드시 가지고 와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이처럼 '회막'에 나아와서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은총과 그것을 유지하는 특권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제사들 중에서 제일 먼저 명령된 것이 바로 3절에 나오는 "번제(burnt offering)"인데, 이것은 짐승의 제물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태워서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번제'라는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하늘로 오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직역하면 '타오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희생제물을 태울 때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제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완전히 상달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화제(火祭)"라는 말은 거제, 요제, 전제와 더불어 제사 드리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며,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그와는 달리 제사의 '종류'를 구분하는 명칭들입니다.
  물론 번제는 "단 위에 불살라"서 바치는 것이므로 자연히 항상 "화제"의 방법으로만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이런 번제를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여호와께서 만족하시도록, 인정하시도록'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이 번제는 "그 전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바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나중에 6절 이하에 보면, 이 번제에 쓸 짐승은 "가죽을 벗기고" 난 후 나머지 모든 것은 다 "각을 뜨고" 그 "머리와 기름"과 심지어 "내장"까지 바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그 희생제물을 잡기 전에 먼저 그 제물을 바치는 본인이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곧 자기 몸을 바치는 대신에 그 짐승을 바치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번제는 그 제물 드리는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제사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의 번제"가 9절까지 기록되어 있고, 계속해서 10절부터 13절까지에서는 "양이나 염소의 번제"가, 그리고 14절부터 17절까지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드리는 "새의 번제"가 나와 있습니다.
  '양이나 염소'는 소를 바칠 능력이 없는 자를 위한 것이고, '새'는 양을 바칠 능력도 없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드리는 번제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재력의 고하에 관계없이 정말 '누구든지' 자원하기만 하면 번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이 드리는 '새의 번제'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다루어진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실 소나 양으로 드리는 번제의 경우에는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는 일'은 제사장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본인이 직접 수행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새의 번제'의 경우만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사장이 직접 다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9절과 13절, 그리고 17절에 보면, 그 세 종류의 번제 중 그 어떤 것이 드려져도 끝에 가서는 다 꼭 같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번제물이 화제로 바쳐질 때 그 제물 타는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롭게' 상달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신 온전한 제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열납하시는 여부는 결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이 온전히 바쳐졌느냐 아니냐'에만 달려 있음을 여기서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일 첫 번째로 명하신 제사는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다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번제'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부를 위로 올려 드리는 예배'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현대교인들은 이 방향을 거꾸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아야 하고 물질의 복을 약속 받아야 하고 인생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받는 등, 무언가를 '위로부터 내려 받아야' 은혜로운 예배가 되는 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내려 주시지는 않고 그저 올려 받기만 원하셔서 이런 제사를 명하신 것이겠습니까?
  적어도 이런 '번제'를 명령 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구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을 뿐 아니라 '가나안 땅'이라는 소망의 약속까지 이미 받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것 두 가지만 생각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이런 '번제' 정도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한다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광야생활의 불편하고 부족하고 힘들고 어렵다는 것들은 그들이 예배 생활에 불충해도 될 만한 아무 이유도, 변명도 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장망성으로부터 이미 구원을 받았고 또한 저 천당의 영생이라는 최고최대의 축복 역시 이미 보장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 '출애굽'의 은혜가 정말 우리의 진심으로 감동되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 감사, 감사가 계속 위로만 올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 '영원한 가나안'의 소망이 정말 우리 모두의 심령 속에 확신되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시간은 그 순서 하나하나마다 그저 기쁨, 기쁨, 기쁨이 하늘 보좌를 향하여 솟아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이처럼 이미 받은 은혜와 축복을 깨닫는 성도라면 교역자나 평신도나, 부자나 빈자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자신의 것 모두를 바치는 온전한 번제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감히 '값싸게' 모실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하나님을 모시는 자세와 정성이, 무슨 대통령을 모시는 보좌관이나 대기업 총수를 모시는 비서관이 하는 것보다 도대체 어떻게 더 못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문자 그대로 '시간, 힘, 물질, 땀, 눈물, 마음' 이런 전부를 몽땅 다 '단 위에 불살라서 위로 바치는' 것이 되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꾸 세상 쪽으로 내려가기 마련입니다.
  예배는 그런 우리 모두의 '하향적'인 본성을 '상향적'으로 바꾸어주는 유일한 시간이요 장소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는 말씀대로, '전부를 다 태워서 위로 바치는 번제'의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쪽으로, 자신의 감사를 위쪽으로, 자신의 물질을 하늘 창고로, 자신의 서원을 그 보좌 쪽으로 계속 올려 드림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최고(最高)의 것을 먼저 바치는' 소제(素祭)를 통하여 교회를 섬기는 예배생활을 해야 합니다.

  2장 1절부터 3절 말씀에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소제(cereal offering)"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 '소(素)'라는 단어는 한자로 '흴 소' 즉 흰 빛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아마도 곡식 가루의 색깔을 두고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소제를 드리는 방법도 본 장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우선 방금 읽은 1절부터 3절에 기록된 대로 "고운 가루"를 그대로 드리는 것이 있고, 또한 4절에 보면 "화덕에 구운 것"으로 드리는 소제, 5절의 "번철에 부친 것"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프라이팬에 지진 것으로 드린 소제가 있었고, 또한 7절의 "솥에 삶은 것"으로 드리는 것과 14절에 나오는 대로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일 처음에 나오는 곡식 가루로 드리는 소제였습니다.

  아까 번제에서는 '전부'가 강조되었는데, 여기 소제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은 '최고급'입니다.
  우선 "고운 가루"라는 말부터가 곡식 가루들 중에서도 최상품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소제와 함께 드리는 "기름"은 바로 '감람유'인데 이것 역시 '풍성과 부요'를 상징하는 고급품이었습니다.
  "유향"은 유향나무의 열매에서 추출한 고급 향료로서 제물이 향기를 내게 하기 위하여 소제에 첨가되었습니다.
  또한 "첫 이삭" 역시 거두게 된 곡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제일 먼저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의 소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든 번제들이 다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이 소제들에 대해서는 각각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뜻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소제를 드리기 위하여 곡식 가루를 가져오면 그것을 전체를 다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고 2절에 있는 대로 "가루 한 줌"만을 취하여서 그것을 유향과 기름과 함께 단 위에 불살라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은 한 동물을 그 가죽만 제외하고는 나머지 고기의 전부를 다 태워서 하나님께 바친 번제와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처럼 곡식 가루의 한 줌만을 화제로써 하나님께 바친 후 나머지는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3상반절에 있는 대로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즉 소제물의 대부분은 양은 실제적으로는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의 식량으로 쓰였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오직 제사와 성막 봉사에만 풀타임으로 일했고 다른 생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께 가져오는 제물 중의 일부로써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정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에 곧 이어서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고 3하반절에서 선포하셨습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는 말은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됨'을 뜻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소제물 중에서 직접 하나님께 바쳐진 것만 '특별히 거룩한 것'이 되고 나머지 제사장의 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좀 덜 거룩한 것'이 되어야 어울릴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단 위에서 화제로 드린 '가루 한 줌'뿐 아니라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간 나머지'까지 다 합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10절에서도 꼭 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성도가 예배시간에 드리는 모든 예물은 곧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직접 바쳐진 것과 꼭 마찬가지이며 그 예물이 교회를 통하여 쓰이게 되는 것은 전부가 다 '지극히 거룩하게' 사용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시간과 힘과 물질들이 그 어떤 일이든지 교회를 운영하고 성장시키기 위하여 쓰이기만 하면 그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서는 헌금의 일부가 교역자 사례로 쓰이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헌금이 선교나 구제에 쓰이는 것은 거룩한 일 같은데, 목사와 전도사의 생활비로 쓰이는 것은 무언가 세속적인 용도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또 목사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고 말씀을 전하는 이 거룩한 일을 하면서 돈을 받는다는 것은 무언가 어울리지 않고 불경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이면서도 다른 직장을 동시에 가지고서 교회에서는 사례 받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목사가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오는 제물 중에서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한 것들을 나누어 주도록 명하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쓰이는 것들 역시 당신께 직접 태워져서 바쳐지는 것들과 꼭 같이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교회에서는 교역자들이 첫 사례는 당회장 목사가 직접 전달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인 줄로 알고 함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며, 재정부원들과 평신도들 역시 교회 경상비 중에서 교역자들의 사례를 위해 쓰이는 액수 또한 '지극히 거룩하게' 쓰이는 것인 줄로 알고 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만 남아 있는 사르밧 과부를 향하여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엘리야라는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얼마나 이기적인 요구요 또한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 제물은 바로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광야생활하면서 그 귀할 수밖에 없었던 곡식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 가장 먼저 수확한 것을 일단 소제로 바쳐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지 적선하듯이 남는 것 가지고 당신께 바치는 것을 기다리실 분이시겠습니까?
  그처럼 '최고의 것'으로 '제일 먼저' 바쳐진 소제물은 제사장의 생계와 성막의 유지를 위하여 사용됨으로써 실로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게 사용하신'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인생의 구심점을 이렇게 찾아야만 합니다.
  내가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돈을 벌고 있는지, 갈팡질팡하지 말고 바로 이 문제의 초점을 예배생활을 통하여 똑바로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야말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이 하나님을 진정 내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자 하는 신자에게 구체적인 '삶의 중심'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돌려지는 것 역시 "여호와께 드려지는 지극히 거룩한 화제"가 되었음을 기억하면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제일 급한 것'을 교회를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그 제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열납되는 것을 진정 기뻐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광야행군을 위한 하나님의 첫 명령은 무슨 인생 상담이나 삶의 요령이나 도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이처럼 오직 '예배생활'이었습니다.
  '전부를 바치는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최고의 것을 바치는 소제'를 통하여 '광야교회를 섬기는 것'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예배생활의 불충에 대하여서는 무슨 바쁜 시간이니 피곤이니 가난이니 하는 그 어떤 것도 핑계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여가시간이 많아지면 더 긴장이 헤이해지고 게을러지는 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악습 아닙니까?
  IMF가 일어났을 때에는 갑자기 교회들이 부흥하더니 이제 숨 좀 돌리만 해지고 오히려 교회성장률은 급속히 떨어지고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정말 우리가 영적으로 정신을 차리고서 이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악한 시대의 조류를 반드시 거슬러가야 할 때입니다.
  각 교인은 이 현대사회 속에서 주일 불성수의 시험을 반드시 이겨야만 하며, 교역자들은 주말 연휴를 이용해서 교인들을 예배출석으로부터 빼앗아가 가려 하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합니다.
  예배생활에서 해이해지면 개인구원에서부터 시작해서 교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다 끝장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거 구라파 교회가 그렇게 해서 실패한 역사를 보면서도 어리석게도 꼭 같은 전철을 밟아서야 하겠습니까?

  또한 우리의 예배는 진정 '하나님과 통하는' 예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소위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목사들이나 그런 것을 좋아하는 교인들은 과연 '어느 쪽으로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불신자들의 기분에 맞도록 열어 놓은 예배'는 엄밀히 구분할 때 '전도집회'는 될 수 있겠지만 결코 예배는 아닙니다.
  바른 예배는 당연히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님 쪽으로 열려서 그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제사'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위쪽으로 올라가는 향기'나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쓰시는 제물'은 전혀 없이 그저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 인생들의 입에 떡 한 조각 물려주는 것을 예배라고 모이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잔칫집에 들어와서도 주인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손님들 저희들끼리만 놀고먹는 염치없는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인이라 해도 사실은 죄 사함이 확신되지 않고 천당구원이 안 믿어지는 사람들만 모인 자리에서는 만날 '예배를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될까?'라고 그저 '사람에게 주는 것'만을 신경 쓰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엄청난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격이 전혀 없으니까 하나님께 내 최고의 것, 전부의 것을 기꺼이 바치고 싶어하는 즐거운 마음을 '부담'이라는 말로 도배를 해 버리고 헌금도 예배순서에서 빼버리고 그저 예배당에 들어올 때 입구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기는 소위 '열린 예배'에 무슨 쇼 구경하는 기분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헌금도 그런 식으로 무슨 '입장료'처럼 내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하지만 진정 '하늘 아버지께 경배하는 예배'를 드리러 온 신자라면 과연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어른에게 인사드리러 찾아뵈러 갔을 때 가지고 간 선물을 직접 드리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해서 그저 문밖에 슬쩍 놓아두고 방에 들어갑니까?

  진정 구원의 확신과 천당의 소망이 있는 신자들의 예배,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뵈러 가는 예배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이 특권을 생각하면 '전부를 바치는 번제,' 내 시간의 전부, 힘의 전부, 물질의 전부, 마음의 전부를 다 바치는 제사가 당연히 드려지게 됩니다.
  내게 주신 '제일 좋은 것을 바치는 소제' 역시, 이것이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통하여 지극히 거룩하게, 가장 값있게 쓰이게 된다는 것이 오히려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막'에 임재해 주심으로써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이 위대하신 절대주권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제사'는 원래 단절되어 있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사람 편에서 반드시 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반응자세인 것입니다.
  오늘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로 이런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쪽으로 자기 심령의 '영적 상향성'을 유지하고 '지극히 거룩한 것'을 바치는 예배를 통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자기 인생의 '영적 축'을 똑바로 잡고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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