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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적성숙의 길(3)- 감격적인 예배 (계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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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성숙의 길(3)- 감격적인 예배 (계 4:1-11)

  제가 목사안수를 받고 전임사역을 한 지가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교회와 목회의 현장에 있으면서 잊지 못할 사건, 잊지 못할 이야기, 잊지 못할 사람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남자성도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보통 가정의 평범한 가장이었던 이 분에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몸에 큰 질병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뒤늦게 발견된 암을 수술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제 기적만 바라보고 있을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부인의 얘기를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 어색했던 찬송과 기도가 점점 익숙하더니 종종 찾아볼 때마다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분은 예수를 잘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수술한 그의 몸은 점점 악화가 되었고, 이젠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거동도 불편한 채 병원에 누워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같이 눈물로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의 몸은 굳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마지막이 가까이 옴을 직감한 저는 보통 때보다 더 자주 병원에 드나들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분이 돌아오는 주일에는 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는 도저히 밖의 출입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간청으로 아주 어렵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그 날 거의 누워서 예배를 드리다 시피 했습니다.  저는 그날 그가 드린 예배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묵도부터 시작해서 축도로 마칠 때까지 그는 한순간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몸은 맘대로 할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과 모습에서 그는 예배의 감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내면서 앞으로의 모든 예배가 바로 저런 예배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는 살아있어야 하고,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번 드려도 감동이 없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한번을 드려도 감격이 있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 한번으로 우리의 일주일, 1년, 아니 우리의 평생의 곤고함을 덮어 버릴 수 있습니다.  내적성숙의 길은 말씀, 기도와 함께 예배에 있습니다.  매번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늘감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감격적인 예배는 과연 어떤 예배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 중요한 진리를 몇 가지로 찾습니다.

첫째는 보는 예배입니다.

본문은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의 일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마지막에 될 일에 대한 예언을 받아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현재보다 미래에 관해 초점을 둡니다.  그것도 상징적인 표현을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성경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모두 미래나 상징으로만 된 것은 아닙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현재에 관한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 아시아지역에 펴지 있는 교회에 관한 교훈을 전하고 4장부터는 요한이 하늘나라의 예배를 설명합니다.  하늘나라의 예배는 오늘 지금 드리는 예배와 같이 우리가 하늘에 가면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형태나 내용은 다르겠지만 예배라는 본질은 동일합니다.  그 하늘나라의 예배를 사도요한이 강조합니다.  그런 예배에서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1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은 지금까지 하늘나라에 대해, 특히 하늘나라의 예배에 말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보지는 못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몰랐습니다.  가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직접 가서 보았습니다.  본 결과 요한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젠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과 말로만 듣고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에 큰 은혜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펜을 들어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읽은 계시록이요,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느낌이나 감동에 있어서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림으로만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말로만 들은 것과 실제로 가서 본 것과는 다릅니다.  부분적으로 보는 것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은 감동의 차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나이아가라라는 폭포가 있습니다.  저는 그곳을 처음에는 그림으로만 보았습니다.  말로만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곳이 멋있고 아름답다고 해도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니까 잘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서 직접 보았습니다.  가서 보니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그렇게 멋있고, 웅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폭포의 가장 근접한 곳까지 떨어지는 폭포를 볼 때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냥 입이 딱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차이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야구를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라디오를 통해 중계방송을 들었고, 또 텔레비전을 통해 야구경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부분적인 것만 보여주기 때문에 야구의 재미를 잘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실제로 경기장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야구만큼 정교하고, 과학적인 경기가 없습니다.  한 선수가 베팅을 하자 수비수가 자기 자리를 찾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한눈에 들어오자 야구의 묘미는 더 멋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야구만이 아니라 실제로 보는 경기가 그렇습니다.  모든 운동 경기는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서 전체적으로 보면 감동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예배가 감동적이기 위해서는 실제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감동이 있습니다.  요즘은 예배를 텔레비전으로도 드리고, 영상으로도 봅니다.  그것은 부분적입니다.  전체적인 감동을 받고, 정말 예배의 감격을 원하면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실제로 보아야 합니다.  광경을 보고, 상황을 보고, 예배드리는 모든 것을 보면서 우리는 감격적인 예배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발걸음이 예배가 있는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감격의 현장에 내가 서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예배의 감동은 시작됩니다.  날마다 예배의 자리, 예배의 현장으로 발걸음이 옮겨져서 예배를 실제로 보면서 감동과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듣는 예배입니다.

요한은 하늘나라의 예배를 본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보는 것에서 이제 듣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라고 말합니다.  5절에도 “그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귀에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예배의 감동은 바로 거기에서 절정에 이른 것을 알려줍니다.

감동적인 예배는 듣는 예배입니다.  내 귀에 뭔가가 들려오고, 내가 예배를 통해 들어야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와서 들리지 않고, 뭔가를 들을 수가 없다면 그것만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예배는 어떤 예배라도 감격적일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을 들으십니까?

현재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듣는 것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가대의 찬양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귀에 가장 익숙하게 성가대의 찬양이 들려옵니다.  찬양이 참 중요합니다.  찬양을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가대는 늘 수고하는 것이고, 더 아름다운 찬양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찬양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지만 여기 모인 성도들이 듣기에 어떻게 들려오느냐에 따라 예배의 감동은 달라집니다.  분명 감격적인 예배에 찬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있습니다.

또 무엇을 듣습니까?  기도를 듣습니다.  매주일 장로님들이 여기에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물론 기도역시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지만 우리가 듣습니다.  그 기도에 역시 감동이 있습니다.  우리의 뜻과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올려지는 기도를 들을 때 성도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이 마치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예배의 기도가 성가대의 찬양만큼 중요합니다.  기도소리를 들으며 성도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 기도소리에 힘을 얻습니다.  기도에 따라 예배의 감격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기도를 잘 준비해야 하고, 또한 우리가 귀를 세워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듣는 것은 말씀입니다.  찬양과 기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결국 어떻게 말씀을 듣느냐에 따라 예배의 감격은 큰 차이를 냅니다.  예배의 감격은 말씀을 듣는 것이 좌우합니다. 말씀의 은혜가 감격의 예배를 결정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예배의 감격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늘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강단에 섭니다. 

그러나 듣는 예배이기에 듣는 사람들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어떻게 듣습니까?  말씀이 잘 들려옵니까?  안타깝게도 들리지 않고, 들을 수 없는 우리의 바르지 못한 태도가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가 쓴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책에 보면 교인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여러 형태로 설명했습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 생각파,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읽기파, 예배를 시작하면 졸기 시작하는 수면파,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간절약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에 있는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파, 예배 시간에 뒤적뒤적 성경을 읽고 있는 독서파, 주위의 아기에게 눈을 맞추고 까꿍거리는 유모파, 설교를 평가하려는 시험 채점파, 처음부터 팔장을 낀 채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파 등 천태만상의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듣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예배에서 무엇보다도 말씀이 들려와야 은혜를 받고, 그것이 감격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람이 전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하도록, 그래서 예배의 큰 감격이 있도록,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듣는 예배로 감격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말하는 예배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예배의 광경을 성경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5절에 보면 먼저 보좌가 있습니다.  물론 그 보좌에는 하나님이 좌정하시고 계십니다.  6절에 보면 그 보좌를 둘러선 네 생물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자, 송아지,사람, 독수리와 같은 생물입니다.  이 생물은 하나님을 보좌하는 하늘의 영들입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그 생물을 둘러선 24장로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성도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5장 11절에 의하면 생물과 24장로를 둘러선 천사가 있습니다.  그 수가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천사를 둘러선 모든 만물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포함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광경입니다.  보좌를 중심으로 네 생물과 24장로와 천군천사와 만물이 어린양과 보좌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보여준 행동이 무엇인가를 요한은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말하는 것입니다.  8절에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여기‘이르기를’이란 말이 바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24장로들이“자기의 면류관을 보좌에 던지며 가로되..” 여기 ‘가로되’는 곧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say, saying 입니다.  5장 12절에 천사들도 “큰 음성으로 가로되”, 13절에 모든 만물도‘가로되’ 라고 강조합니다.  한번 마음속에 여기 하늘나라의 예배를 그려보십시오. 보좌를 중심으로 네 생물과 24장로와 천사와 만물이 보좌를 향하여 밤낮 쉬지 않고, 큰소리로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예배입니다. 이것이 감격의 예배입니다. 감격적인 예배는 말하는 것입니다. 입이 열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어지고, 찬양과 기도로 입이 열어지고, 모든 성도가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가 진정 감격의 예배입니다.
감격하는 순간에는 늘 입이 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입이 다물어지는 것은 감격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감동을 받는 현장에서 입이 다무는 사람이 없습니다.  감격이 밀려오는데도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것이 감격입니다.  이런 감격의 예배를 위해 우리의 입이 열어지고,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배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나는 입이 열어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내 입이 열어지고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한 번도 입이 열어지지 않는 사람임 은혜 받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은혜 받고 감격하는 사람의 입은 언제나 열어져 있습니다.  입만이 아니라 마음도 열어졌고, 표정도 열어졌고, 그렇게 편안하고, 밝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거기에 감격의 예배는 이루어집니다.  결국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예배가 감격적인 것입니다.  그런 예배가 우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입이 열어지고 있습니까?  나는 마음이 열어지고 있습니까?  나는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세계 최고의 부자 록펠러에게 어떤 기자가 성공하게 된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십일조 생활이요, 두 번째는 교회와 목회자를 잘 섬긴 것이고, 세 번째는 매주일 맨 앞자리에서 예배드린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록펠러의 성공은 참된 예배, 감격적인 예배였던 것입니다.  예배의 성공이 곧 신앙의 성공이요, 인생의 성공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곧 우리가 추구하는 내적성숙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보고, 듣고, 말하는 감격적인 예배를 통해 날마다 큰 은혜를 받고 한 해 동안도 내적으로 성숙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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