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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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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눅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주님의 비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 깜짝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의인이라 믿었던 바리새인이 불의한 자가 되고 죄인이라 믿었던 세리가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는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협박하고 그래서 물질을 빼앗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의를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간음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즉 말씀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았던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신앙적으로 경건하다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헌신 또한 대단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이라고 하지만 24시간 금식이 아니라 해 떠 있을 동안 행하는 금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금식은 물도 먹지 않는 절대 금식으로 해가 뜨겁게 내려쬐는 중동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또한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마23:23), 달리 표현하면 집에서 나는 극히 사소한 작물에 대한 십일조까지 엄격히 계산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태도는 정말 존경할만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십일조를 잘 내기로 유명하지만 과외로 들어오는 소득까지(예컨대 선물) 십일조로 계산하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기도할 만도 합니다. 그들은 민족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사람들입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를 통치하면서 국세는 직접 걷어 갔지만 지방세는 세리들에게 맡겼습니다. 세리들은 일정액만 로마에 바치면 되었기에 백성들에게 사기치고 협박하여 더 많은 돈들을 거두어갔습니다. 이것을 토색한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치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되지도 못했고 모든 공민권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들은 죄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바리새인이 더 경건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충격적일 정도로 우리의 판단과 상반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이 번역은 마치 바리새인도 의롭지만 세리가 더 의롭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처럼 오역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개역개정판은 다음과 같이 정확히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마치 바리새인과 세리 둘 사이에 재판이 벌어졌는데 하나님이 세리가 옳다고 손을 들어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리새인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세리는 도대체 무엇을 잘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이 세리가 삭개오처럼 자기 재산을 절반을 내어놓았다거나 자기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는 구체적인 회개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가슴을 치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세리가 옳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바리새인은 왜 실패했는지 또 세리를 옳다 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 분명히 깨닫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바리새인의 실패 1.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함

바리새인은 기도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실패는 곧 그들의 삶의 실패와 같습니다. 기도는 그의 내면의 의식구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한대로, 또 간구하는 대로 그렇게 변화되어 갑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즉각 문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며 기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청원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등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는 전혀 이런 면을 볼 수 없습니다. 11절과 12절의 기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여기에 무슨 청원이 있습니까? 여기에 무슨 찬양이 있습니까? 그는 실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랑은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는 데서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아마 관례적으로 성전에 기도하러 나왔을 것입니다. 그때 저 멀리서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이런 감사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세리와 비교해 보니까 자기는 너무 근사한 사람처럼 보이고, 자기는 너무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기도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옆을 바라보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사람을 향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가 사람을 향할 때는 비교의식이 들어 열등감에 빠지거나 반대로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우리 기도는 위를 바라보는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는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거나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는 기도입니다. 위를 바라볼 때는 결코 교만이나 자기 의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느꼈던 감정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6장 5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선지자는 말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제일 먼저 자기 입술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거짓과 허물이 다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첫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5장 8절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기만 잡으며 일상사에 잡혀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움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기 죄인 됨의 발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진정한 우리 모습은 세리처럼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하는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전에 왔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 경건만 자랑하고 나옵니다. 아마 이런 삶은 다른 곳에서도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성경 공부와 연구 모임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자기 지적인 만족만 취하고 나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것들은 실상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 체험이 빠져버린 무미건조한 교리일 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자기의 신념과 욕망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실상은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그것은 올더스게이트에서 진정한 회심을 하기 전의 요한 웨슬리와 같다 할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입니다. 감리교를 영어로는 Methodist 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형식주의자 또는 율법주의자의 의미입니다. 그만큼 웨슬리가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율법주의자처럼 살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역에서 열매가 없었고, 본인은 늘 불안해하며 살았습니다. 율법주의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판의 시각을 갖기도 쉽고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대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만든 기준에 합당할 때는 스스로 자기가 의로운 존재처럼 착각하며 그렇지 않은 세상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올더스게이트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그의 사역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그의 말을 듣기 시작하고 그의 말을 통하여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구원역사가 그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아무리 많은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 선생이라고 불렸을지라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를 향하여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3:5). 거듭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절대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세리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의 기도들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금식하며 재를 무릎 쓰고 나아갔으며 이렇게 회개하였습니다.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1:7)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의 잘못 2. 다른 사람을 멸시함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사람을 판단하고 멸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의 자세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달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긍휼의 마음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해의 눈이 생기는 것이지요. 같은 죄인으로서 느끼는 동병상련과 같은 마음입니다. 거대한 적을 앞두고 서 있을 때는 약한 자들끼리는 서로 단합하고 함께 싸우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설수록 인간은 연대성은 더 견고해집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하면서도 내 마음이 더 무뎌지고 사람에 대한 판단의 마음이 든다면 실상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의에 취해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리처럼 기도하고 난 이후에 다른 사람을 판단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이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은 결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신념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 신념을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도덕 기준으로 보니까 세리가 기분이 나쁩니다. 그와 한 지붕 아래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불쾌합니다. 그래서 세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세리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분리시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도덕주의자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마음이 없습니다.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격리시킵니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그가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속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는 자기 일만 열심히 해야 합니다.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누가 그 은밀한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참으로 무거운 양심으로 하나님과만 상대할 때에는 타인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거기서 전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홀로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알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타인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비밀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우리는 그에 대해서 판단할 수도 알아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바리새인은 교만하게 함부로 한 인간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곁에 세리와 같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용납해야 합니다. 내 판단으로는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또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옳고 정확합니다.

이렇게 기도한 세리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혹시 이 세리는 삭개오가 아니었을까요? 아마 삭개오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를 세리 삭개오와 연결시킬 수는 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19장 1절에서는 세리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처럼 세리와 같은 기도를 올리고 있었지 않았을까요? 자기 인생을 후회하며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 기뻐 예수님을 만나러 갔고 여의치 않자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코믹하면서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결정적인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당장 나온 반응은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어놓겠다는 고백입니다. 자기가 토색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스스로 의롭다는 바리새인은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가고 결국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반면에 죄인중의 죄인이었던 세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길로 갔습니다. 누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오류는 전도현장에서 왕왕 벌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앙인을 보면 그가 전혀 신앙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취급을 하려 합니다. 자기는 마치 구원의 확신에서 한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누가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는데 그 안에는 예수님은 빠져 버리고 냉랭한 사영리 식의 구원교리만 붙잡고 있는지. 상대방은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실상 그가 세리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인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마음에 이런 판단의 마음이 없지는 않은지 조심해야 합니다. 또 스스로도 항상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리와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리는 하나님 앞에 고개도 못 들고 죄인의 모습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다 드러내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은 그가 의롭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마치 자신은 의롭고 구원에 확신도 있는 사람처럼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로 다른 사람도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속지 마십시오.

상한 심령의 기도

세리의 기도는 단순히 바리새인과 비교되는 기도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가장 모범적인 자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체험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바리새인와 세리에게 예수님이 오신다면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 그 기쁨 또한 세리가 더 클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 그가 더 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에게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7장 41절에서 43절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빚진 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니리온의 빚을 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주인이 둘 다 갚은 갚을 것이 없으므로 빚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러면 둘 중에 누가 더 고마움을 느끼겠습니까? 당연이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 두 기도에서 세리는 더 많은 죄를 지었기에 더 많이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신의 빚이 적다고 하여 하나님께 덜 감사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빚쟁이이면서도 자기는 덜 빚졌다고 하며 스스로 당당해 하며 한편으로는 세리를 나무라고 있는 격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 많이 발생했습니다. 바리새인 중 하나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눅7:36-39).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서 영접하며 입 맞추지도 않았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죄 많은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고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고마워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스듬히 누워 계신 데 그 뒤 모습만 보아도 감사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여자는 자기 머리털로 그 눈물을 닦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 맞추고 그 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왜 이런 행위를 하였습니까? 많은 죄를 탕감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갈 때 이런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이런 은혜의 마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세리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물론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입술만의 상투적인 고백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바리새인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 저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모르는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며 기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찢는 기도입니다. 14절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나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할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의인인 채 하며 자기를 높일수록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51편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불쌍한 자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울고 있는데 외면 할 사람이 없듯이,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애통하는 심령을 못 본 채 외면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프면 온 신경이 쓰입니다. 그렇게 아파해야 피와 면역체들이 그쪽으로 몰리고 그래서 낫게 됩니다. 상한 심령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이 땅으로 끌어내리는 통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이 고백하였듯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습니다.”(대하14:11) 사람들은 강한 자를 따라가지만 하나님은 약한 자를 도우십니다. 약한 자가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리처럼 겸손하고 자기 가슴을 치는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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